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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지영 Nov 13. 2024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 권리

룸 넥스트 도어와 에드워드 호퍼

두 연기 천재,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의 만남만으로도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명색이 올해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수상작인데 상영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서두르지 않았으면 못 볼 뻔했다. 눈길을 사로잡는 감독의 미장센, 맨하튼의 정취와 두 뉴요커의 이지적인 대화만으로도 지적허영심을 채워주기 충분하다. 영화를 봤는데 명작을 읽고 예술작품을 감상한 느낌이 든다.



시그리드 누네스의 소설 <What are you going through, 어떻게 지내요>가 독창적 스토리텔링과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유명한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을 만나 영화로 재탄생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죽음을 주제로 책을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 잉그리드는 출판 기념 행사장에서 친구 마사가 암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몇십 년 만에 둘은 재회한다. 자궁경부암 3기로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 시달리던 마사는 스스로 존엄하게 죽기를 바라며 잉그리드에게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요청이 자살 방조죄가 될 위험이 있지만, 잉그리드는 친구의 마지막 여정을 돕기로 한다. 제목이 <룸 넥스트 도어> 이유는 고독사를 두려워한 마사가 자신이 죽을 때 누군가 '옆방'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듯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뉴욕타임스의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전쟁터에서 단련되었던 강인함으로 암에 굴복당하기보다는 저항하며 자기답게 살다 죽기를 갈망한다.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굴욕스러운 고통 속에 죽지 않겠어. 이것도 전쟁이고 두렵지 않아. 내 싸움의 방식을 보여주겠어   


말기암 환자이지만 남성적인 강인함과 결단력마저 느껴지는 마사 역의 틸다 스윈튼과,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지만 강단 있게 친구를 지지하는 잉그리드 역의 줄리언 무어의 연기 앙상블이 눈부셨다.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두 친구의 과거 남자친구였던 환경학자 다미안이 기후 재앙으로 곧 지구가 멸망할 지경인데 아들이 셋째를 낳은 것을 한탄하는 장면이다. 그때 잉그리드의 지혜로운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희망이 없는 게 아냐.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어떤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들렸다. 위로가 된다.



간결한 플롯 위에 감독의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연출이 더해지며 영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특히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결정적인 장면에 모티브로 사용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퍼의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은 두 친구가 도시를 떠나 마사가 빌린 집에 걸려 있다. 드디어 자신의 'D데이'를 정한 마사는 샛노란 정장과 붉은 립스틱으로 치장을 하고 호퍼의 그림처럼 선베드에 누워 꿈꾸던 마지막을 맞이한다.  고독과 소외를 나타내는 다른 그림과 달리 다섯 명의 인물이 함께 일광욕하는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이 있기를 바라는 마사의 마음이 담긴 설정이다.


에드워드 호퍼 People in the sun, 1960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호퍼는 대도시인의 고독과 공허함을 포착한 예술가로 사랑받아왔다. 작년 그의 첫 국내 개인전이 누적 관람객 33만 명을 기록하며 초대박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의 고독한 삶이 투영된 그의 작품이 얼마나 사랑받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고립되어 있는데,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고독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호퍼는 고독과 긴장감이 깃든 독특한 조명과 구도로, 장면에 깊은 감정과 서사를 불어넣는 시각적 언어를 제공하기 때문에 감독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최근 개봉한 <더 킬러스>는 호퍼의 대표작 <Nightwaks,  1942>에서 영감을 얻었고 곧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에드워드 호퍼>도 11월 17일 개봉예정이라니 호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둘만하다.



호퍼의 작품 외에도 마사의 집에 걸려있던 얼굴을 검은 베일로 가린 추도객들의 사진이 인상 깊다. 스페인 출신 알모도바르 감독은 장례식날 전신을 검은 복장으로 두르고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스페인의 장례문화를 담은 사진을 상징적으로 채용했다. 타인의 죽음에 말없이 동행하는 모습으로 제목 <룸 넥스트 도어>와 연결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소설인 <죽은 사람들>에 나오는 문장이 배우들의 목소리로 세 차례 나오는데 아일랜드의 눈 덮인 마을을 상상하며 눈을감고 되새기 시리도록 아름답. 눈이 내리면 어차피 모든 것을 덮는데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조차 덧없다고 느껴진다. 죽음이 그리 슬퍼할 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도 다. 고통 속에 사는 삶보다는 편안한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완성이 될 수도 있겠다.


<룸 넥스트 도어>는 고퀄리티의 연기와 연출은 기본이고 시각적 즐거움과 지적인 만족감도 주는 매력이 다양한 영화이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종영이 오늘내일한다. 서두르시라.


- 삶의 dignity와  A good death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 주변인을 잃었거나 죽음의 경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

-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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