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문(開門)

by 송지영

기다림은 허기와 닮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할 일을 씹듯 넘겼다. 사업자 등록, 통장 개설, 도장 제작, 로고 디자인. 이 작은 글방을 세상에 올리는 데도 필요한 건 끝없는 서류와 숫자였다. 글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었는데, 세상은 숫자로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세무서 민원창구.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입안은 바싹 말라붙고, 심장은 평소보다 네 박자 빠르게 뛰었다.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업종은요?”

긴장을 감추려고, 이미 책을 열 권쯤 낸 사람처럼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출판업이요.”

그 순간, 나는 정보통신업 – 일반 서적 출판업(221100) 코드 아래, 한 권도 출판하지 않은 채 출판사 대표가 되었다. 말은 거창한 1인 출판사였지만, 현실은 빛을 보지 못한 원고들이 대피해 있는 무허가 보호소에 가까웠다.


내가 쓴 소설들은 연애도, 판타지도 아니었다. 보호종료 아동이 된 스무 살 청년, 화재 현장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방관, 입양됐다 파양 당한 열세 살 소녀.

‘작품이 지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저희 출판사에서 출간하기에는 다소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돌아온 건 "건승을 기원합니다"로 끝나는 형식적인 거절 메일뿐이었다. 건승은 늘 기원만 받았지 실제로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내 글이 거기까지였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었던 건 나였다.

대학 후배의 로맨스 판타지가 여러 출판사에서 계약 제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원고를 퇴짜 놓은 편집자도 그 책에 줄을 섰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 매대에 책이 깔렸다.
선남선녀가 나란히 미소 짓는 핑크빛 표지, 설탕처럼 달콤한 제목, 손끝에 가볍게 잡히는 사랑 이야기. 몇 주 만에 재쇄가 찍혔고, 새로운 계약도 뒤따랐다.

그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세상.


그날은 글 대신 한숨만 파고 있었다. 누군가 풍경이 떨어질 만큼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해수였다. 한 손엔 소주랑 삼각김밥이 든 봉지를, 다른 손엔 분홍색 책을 들고 있었다.

“이 책이지? 내가 거금 들여 사봤다. 김작가님 읽고 감각 좀 키우시라고.”

며칠 전 친구의 문자에 한숨 쉬던 내 모습을 해수가 지켜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그녀는, 모르는 척 넘어가지 않았다.
“너도 요런 거 좀 써봐. 표지 몽글몽글하고, 제목 달콤하고. 딱 팔릴 준비가 돼 있잖아.”

나는 대꾸 없이 소주를 땄다. 딸깍, 경쾌한 소리가 허공에 튀었다.

“치워.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나 다시 읽어야겠다. 오늘 딱 맞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은 쓰렸다. 반 병쯤 비우고 나서야 입안의 쓴맛이 조금 가셨다. 열패감이 아니었다. 생존이 달려있는 이야기들이 가장 먼저 묵살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이었다. 무거운 현실은 외면하고 팔리는 책만 고르는 출판이라면, 그건 직무유기 아닌가.

책을 낸다는 건, 지워지지 않을 말을 남기는 일이라 믿었다. 그런 내가, 구식이거나 틀린 걸까. 팔릴지를 묻기 전에, 필요한지를 묻는 출간은 정말 불가능한 걸까.

"불가능하지, 이 언니야."
해수가 세상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더 잘 써서, 더 간절하게 말해서, 살아남게 하면 되잖아!"
누구에게 던지는지도 모른 채, 소리를 질렀다. 말이 벽을 치고 되돌아올 만큼, 방 안이 울렸다. 그 꿈은, 판타지 소설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책들이 출간되면 꽂아두려고 남겨놓은 빈자리를 쳐다봤다. 내 잔에 술을 따르던 해수가 내 눈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야, 아무것도 없다는 건, 뭐든 채울 수 있다는 뜻이야. 기죽지 마.”

한참 융단폭격하던 애가, 갑자기 다정하게 굴어서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게도.

“뭐래.”


그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던 거다. 뭘 해도 자꾸 주저앉게 되는 날. 다음 날, 나는 다시 할 일을 했다. 첫 의뢰인을 기다리며 계약서를 만들었고, 그 사람의 사연을 받아 들 준비를 했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곧 누군가가 들어올 것이다. 이곳엔,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위한 자리가 남아 있다.


제1조 (목적)
본 계약은 을의 구술을 바탕으로, 갑(당이출판사)이 서사를 창작하고 출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저작권 귀속)
창작된 원고의 저작권은 갑에게 귀속되며, 을은 해당 저작물에 대해 배포, 전시, 2차적 이용 등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제3조 (출간과 비밀유지) 갑은 계약일로부터 1년 이내에 을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소설을 출간하며, 출간 전까지 제삼자에게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

제4조 (계약의 해지)

허위 진술이나 서사화 불가, 타인 명예·권리 침해 등의 사유가 발생하면 계약은 즉시 종료되며, 쌍방은 민‧형사상 책임을 청구하지 않는다.


계약서를 완성하자, 이 허술한 공간에도 작지만 명확한 규칙이 생긴 것 같았다. 현실과 허구, 말과 침묵, 기억과 문장이 뒤섞이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몇 조 몇 항으로 명명된 약속이 생겼다는 건, 나름의 방어막처럼 느껴졌다.

몇 부를 인쇄해 책장 맨 윗 칸에 곱게 꽂아두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종이에 사인이 얹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나는 매일 커피를 내리고, 창밖의 변화를 살폈다.



더위를 누그러뜨린 초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번져,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확성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이쯤이면 일부러 들으라는 소리였다.

“아이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누가 돈 주고 글을 써달래요.”
“그건 몰러. 그래도 솔찬히 궁금하긴 해.”
“아니, 광고도 안 하고, 전단도 안 뿌리고, 저렇게 혼자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알아서 오겠냐고. 꽃집꼴 나는 거지.”

참다못해 문밖으로 나갔다. 나를 보자, 두 사람은 ‘어떻게 들었지?’ 하는 눈빛으로 허둥댔다. 그 모습이 꼭 짜 맞춘 개그 콤비 같아, 나도 모르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전혀 웃을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김민주라고 합니다.”

“우리 알죠? 나는 복권방 오 사장, 여기는 과일가게 박 사장님.”

“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옆구리를 눈에 띄게 찌르며, ‘네가 물어봐’ 신호를 주고받았다. 더 궁금해 보이는 박 사장이 입을 열었다.

“진짜 남 얘기를 책으로 써주는가?”

“네, 제게 이야기를 주시면, 저는 글로 써드리는 거예요.”

사장이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그게 머야, 물물교환이에요?”

“하하,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혼자 조그맣게 출판사 하는 셈이에요.”

“아, 출판사여? 그리 쓰면 될걸, 뭘 그리 어렵게 적어놨어. 아무튼, 김 사장. 오래오래 글 쓰시고, 번창하세요.”


사장의 말투며 손짓은 어딘가 투박했지만 이상하게 정이 갔다.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치면, 그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과일가게 앞을 쓸다 말고, 내 쪽까지 슬쩍 비질을 해주곤 했다. 서툴지만 분명한 마음이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나도 커피를 내릴 때 그의 잔도 함께 채웠다.

그가 나를 부르는 ‘김 사장’이라는 어색한 호칭조차도 묘하 싫지 않았다. 낯선 이름에 담긴 가능성이, 지금의 나에게 오히려 위안처럼 느껴졌다.

그날도 별다르지 않았다.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하릴없이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적을 가르, 문 위에 달아둔 풍경이 짧게 울렸다.

따알랑-. 열리는 문을 응시한 채,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탁자 위에 천천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마침내 이 방의 공기를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에 시든 얼굴, 오래된 그림처럼 바랜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은 말한마디 없이도 이미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묵직하고 어둡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온도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