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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출생주의

by 송지영

*허구와 사실의 경계에서 쓰였습니다.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창작입니다.


삶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고 믿는 세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믿는 청년들.

차가운 활자가 화면을 스쳐 갔다. 잊히지 않는 건, 인터뷰에 응한 청년의 표정이었다. 분노도 절망도 비치지 않은 얼굴. 차분하다 하기에는 무겁고, 평온하다 하기엔 어딘가 비어 있었다. 그 모호함이 더 궁금하게 했다.

반출생주의. 처음엔 허무주의의 변주쯤으로 여겼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말의 뼈대가 달랐다. 죽음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애초에 문을 열지 않는 편이 낫다는 확신. 존재하지 않는 쪽이 덜 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날, 화면을 보던 내 머릿속은 텅 비었다.
"뭐야, 이건...”

오늘, 같은 말을 꺼내는 스물일곱의 여자가 내 앞에 앉아 있다.
1998년생, 최유화. 전 간호사, 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누군가의 생을 지키던 사람이, 왜 ‘태어나지 않을 권리’를 말하게 됐을까.
삼 년째 백수인 나도 앞날이 캄캄하지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까지는 가지 않았다. 여전히 삶이란 어쨌든 한 발을 내딛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생각이 멈췄다. 혹시 나는 아직 덜 다쳤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건 아닐까.


녹음기를 켰다. 버튼이 눌리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이야기가 열릴 것만 같았다.
“지금부터 녹음할게요. 괜찮죠?”
유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 때의 뻣뻣함은 조금 풀린 듯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탁자 위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숨 고르는 소리, 짧은 정적, 목 안에서 삼켜지는 침. 말이 시작되기 전의 그 공백들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간호학은 원래 하고 싶었던 전공이었어요?”

유화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아뇨. 화학과에 가고 싶었어요. 실험 수업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부모님도, 선생님도 여자 전문직으로 간호사만 한 게 없다고... 계속 권했어요. 그게 맞는 줄 알았어요.”

말끝에 짧은 숨이 얹혔다.

“바보 같았죠.”


유화는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경쟁률이 20대 1이 넘는 서울소재 모교 대학병원에 입사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됐다’며 축하로 떠들썩했지만, 그녀는 유리상자에 갇힌 것만 같았다.

“병원 생활은 어땠어요? 다섯 달 만에 그만둔 이유가 있을까요?”

유화의 시선이 공중을 더듬었다. 오래된 필름이 거꾸로 감기듯 장면이 돌아왔다.

“그때... 알았어요.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걸. 매일, 밑에 악어가 입 벌린 구덩이 위를 건너는 기분이었어요. 헛디디는 순간, 언제든 삼켜질 수 있는...”

“어떤 점에서요?”

“학교에서 배운 거랑 전혀 달랐어요. 처음 보는 기계에, 터무니없는 환자 수, 낯선 용어와 절차까지... 한꺼번에 외워야 했고, 틀리면 안 됐어요.”

그녀의 손끝이 유리컵을 긁었다. 그 작은 동작에 불안이 스며 있었다.

“매일 프셉 눈치를 보느라, 일 말고도 견뎌야 할 게 너무 많았어요.”

"프셉? "

“프리셉터요. 신입 교육을 맡는 선배 간호사예요.”.

유화는 망설이는 듯하다 이내 마음을 잡은 듯 터뜨렸다.
“겉으론 교육이래도, 매일이 시험인 거죠. 물어보면 ‘또 말해야 돼?’로 무시하고, 안 물어보면 ‘왜 확인 안 했냐’하고. 실수하길 기다리는 자리 같았어요. 비아냥과 꾸중이 일상이었죠”

그녀의 낮은 목소리 속에는 이미 오래된 상처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듣기도 전에, 이미 눈앞에 장면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쨍한 형광등 불빛이 복도를 가르고, 소독약 냄새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발걸음 소리와 기계음이 일정한 박자로 포개졌다.

발령장을 받은 직후, 유화는 NICU (신생아 중환자실) 문턱에 섰다. 프리셉터 이연수가 곧장 말했다.

“NICU에서 앉아 있을 시간? 없어. 하루 종일 뛰고, 집 가서도 공부해야 해. 안 하면 못 따라가. 알겠어?”

그게 엄살이 아니라는 걸, 첫 주가 끝나기도 전에 알았다. 근무표엔 여덟 시간이라 적혀 있었지만, 퇴근은 늘 열두 시간을 넘겼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건 식사 포함 서너 번뿐이었다. 한 번의 실수가 곧 생사를 가르는 곳. 긴장을 내려놓을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달이 지나, 불안한 채로도 손은 병동의 리듬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인라인 필터 안쪽에 작은 기포가 맺힌 걸 발견했다. 유화가 보고했다.

“조연우, 필터 에어. 라인 다시 프라이밍(수액관 공기 빼는 과정) 합니다.”

반대편의 이 선생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응” 하고 짧게 받았다.


유화가 연결부를 조이던 순간, 모니터가 울렸다.

삐—삐—삐—.

SpO₂(혈중 산소포화도) 70%. 인큐베이터 안, 아기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외운 대로, 순서대로. 틀리면 안 돼.’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유화는 응급벨을 눌렀다.

“조연우 SpO₂ 70대! 레지샘 콜 해주세요!”

산소 농도를 올리고, 아기의 머리 위치와 라인을 재확인했다. 작은 발을 두드렸다. 미약한 호흡이 겨우 반응했다.

옆 인큐베이터에서도 울음이 터졌다. 유화는 두 아기 사이를 오가며 손을 바꿔 썼다. 순서가 흐트러지고, 장갑 안의 손가락은 땀에 미끄러졌다. 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선생님, 여기 좀...”
유화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흡인기를 준비를 하던 이 선생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무심한 옆얼굴 하나가 나머지 손들까지 묶어버렸다.기침 소리, 모니터 경고음, 울음이 한꺼번에 겹쳤다. 조연우의 수치가 겨우 안정세를 보였다. 울음과 경고음은 여전히 병동을 메웠고, 그제야 레지던트가 뛰어왔다. 환아들은 안정됐지만, 유화의 가슴은 가라앉지 않았다. 머릿속은 되감기 버튼이 눌러져 방금의 순서를 끝없이 더듬었다.


저녁 면회 시간, 조연우 아기 보호자의 목소리가 병동 공기를 찢었다.
“애 발이 멍투성이예요. 도대체 몇 번이나 찌른 겁니까?”

물품을 들고 복도를 지나던 유화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보호자의 눈길은 이 선생을 향했지만, 말끝은 유화의 심장에 박혔다.
‘나는 정맥을 찌른 적이 없는데... 그냥 백이랑 필터만 교체했을 뿐인데...’
이 선생이 차트에서 눈을 떼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기들 혈관이 워낙 얇아 멍이 잘 듭니다, 보호자분. 치료엔 문제없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듣는 앞에서 유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 선생, 이런 건 보호자분께 정확히 설명드리세요. 걱정하지 않으시게."

유화의 몸이 얼어붙었다. 모든 시선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분명 설명했는데,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았다. 말은 흩어지고, 남은 건 멍과 불신뿐이었다.

보호자가 돌아서자마자, 이 선생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설명을 똑바로 했어야지. 또 와서 문제 삼게 만들어?”

유화는 항변하고 싶었다. 문제 있는 수액을 찾아내 교체했고, 남은 백도 점검했다. 아기 발에 생긴 멍은 자신과 무관했음에도, 사실은 지워지고 책임만 남았다.

이 선생도 유화가 라인을 새로 잡을 수 없다는 걸―아기의 가느다란 정맥을 다시 찌를 권한이 없다는 걸―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모의 화와 선배의 방어는 끝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일 못하는 신규, 그 자리가 가장 무난한 합의였다.

“죄송합니다.”

그 말은 하루를 끝내는 비밀번호였다. ‘죄송합니다’로 닫히고, 다시 ‘죄송합니다’로 열리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한테 죄송해서 뭐 하게. 피해 보는 건 환자인데. 적성이 안 맞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비아냥 섞인 말이 병동 공기를 긁고 지나갔다. 복도를 돌던 수간호사 장 선생이 다가왔다. 주변 공기가 일제히 멎었다.

“아까 조연우 SpO₂떨어졌지? 급강 땐 책임부터 불렀어야지. 레지 불렀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보고 순서 지켜."

유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까지 신규 핑계 댈 거야. 실수 좀 그만하자.”

장 선생은 차트를 끼고 다른 병실로 사라졌다. 데스크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틈을 뚫고 이 선생의 웃음이 흘렀다.
“아직 보고 순서도 몰라요. 기본이 안 돼 있다니까.”
짧은 웃음이 여기저기서 번졌다. 교육기간만 버티자고 스스로 달래 왔다. 하지만 매일의 시험에서 그녀는 늘 탈락자였다. 물품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그녀의 사물함이 열렸다. 누군가의 실수도 곧바로 그녀의 몫이 됐다. 등을 스칠 때 ‘미안’ 대신 ‘조심 좀 해’가 먼저 나왔다. 집단이 보낸 건 말에 이은 냉소였다.




유화가 일을 그만둔 지 삼 년이 지났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도 병동에 서 있는 것처럼 숨이 가쁘고 얼굴엔 열기가 솟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들려줘서 고마워요.”

나는 녹음기를 바라보다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지친 듯, 체념한 듯, 유화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하루도... 대충 산 적이 없었는데... 세상이 거친 건지, 내가 나약한 건지...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어요. 그땐... 몰랐죠. 버티는 게 더는 살아남는 길이 아니라는 걸.”

괴로움과 결연함이 한 얼굴에 겹쳐졌다. 녹음기의 불빛이 잠시 흔들리다 멎었다. 나는 저장 버튼을 눌렀다.

진짜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록은 닫혔지만, 더 깊은 질문이 남았다.


※ 글 속에 나온 의료 용어입니다.


-SpO₂: 혈중 산소포화도

-프라이밍 :수액관 공기 빼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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