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방 건너편, 사거리 모퉁이의 편의점 불빛이 인적 끊긴 거리를 붙박이가 되어 지키고 있었다. 늘 스쳐 지나던 곳이었지만, 오늘 내 발걸음은 유화를 향했다.
유리창 너머, 그녀가 냉장고 앞에서 음료수를 채우고 있었다. 허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이 어딘가 삐걱거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자동문이 스르르 열리자, 기계음 같은 인사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세요.”
시선을 주지 않던 그녀가 컵라면을 계산대에 올리자, 그제야 나를 봤다.
“작가님! 여기 웬일이세요?”
“라면 먹으러요. 곧 퇴근이죠?"
뜨거운 물을 부어 들고 나온 자리, 초가을 바람이 라면 김을 흩날려 얼굴을 스쳤다. 아침마다 박 사장이 창가에서 손을 흔들던 장면이 떠올라, 그녀를 향해 팔을 들어 보였다. 그녀가 반달눈이 되어 나를 보며 코를 찡끗했다. 평범한 스물일곱 최유화를 처음 만나는 느낌이었다.
밤 여덟 시, 교대 직원이 들어오자 그녀가 조끼를 벗고 나왔다. 맥주 두 캔과 꼬마김치 한 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았다.
“김치도 없이 라면 드시는 거 보니, 편의점 초짜 티 나요.”
“저 이래 봬도 큰 손이에요. 주로 술만 사서 그렇지.”
칙—. 동시에 두 캔이 열렸다. 거품이 튀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캔을 부딪쳤다. 텅 빈 밤거리에 울린 금속성 파열음이, 잠시나마 해방감을 던졌다.
“이십 대 최유화는 어떤 모습일까, 늘 궁금했어요.”
그녀가 캔을 내려놓으며 눈을 반짝였다.
“어때 보여요?”
“이 집 알바, 예쁘다고 소문났겠는데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배시시 웃는 모습이, 투명한 소녀의 얼굴을 닮았다. 어떤 것에도 가려지지 않은 온전한 그녀를 알고 싶어졌다.
“글방 다니면서 제일 좋은 건... 잠을 잔다는 거예요.”
“정말요? 저 상담사 아니랬는데, 효과가 있었나 봐요.”
말하지 않고 들어만 주던 시간들이 길었다. 이곳까지 오게 된 건 걱정 때문이었다. 그녀가 잠을 자게 됐다고 하자, 몸속에 엉켜 있던 긴장이 한 번에 풀렸다.
“병원 일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로웠어요. 그런데 하나씩 털어놓을 때마다 내 안에서 불이 꺼져갔어요. 악몽도... 전보다 줄었고요."
“잘 됐네요! 결국 털어낸 건 유화 씨 본인이에요. 글방 문을 두드린 것도...”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나는 못 본 척 맥주를 삼켰다.
“나는 끝내는 데만 스무 해가 걸렸어요.”
의도하지 않은 말이 불쑥 흘러나왔다.
“그 사이 불의와 타협도 많이 했죠. 대필할 때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냥 써줬어요. 돈이 되니까. 그게 내 자리라 합리화하면서. 그 대가를 누리면서 오랫동안 내가 누구인지 숨겨왔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어요."
술기운도 아닌데, 삼켜둔 말들이 툭 터져 나왔다. 오래 잠겨 있던 문이, 그녀 앞에서 스스로 열렸다.
“근데 유화 씨는 달랐어요. 그게 얼마나 큰 결단인지 모르죠? 그만두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얘길 들으며 깨달았어요. 나는 그 용기가 없었어요.”
그녀의 시선이 한참 동안 내 얼굴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화 씨 잘못이 아니에요. 애초에 잘못일 수 없는 일이에요.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유화의 사연을 옮기는 일은. 내 삶을 다시 비춰보는 과정이 되었다. 내 눈에 그녀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정작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이런 말 해준 사람... 작가님이 처음이에요. 어디서든 루저 취급을 받았거든요.”
유화가 맥주 거품을 훔치며 허공을 응시하더니, 손톱 밑 가시를 뽑 듯 기억을 꺼냈다.
“사직한 날, 이 선생이 문자를 보냈어요. ‘이 바닥 좁은 거 알지? 신중히 생각해.’ 짧은 문장이었는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가족들의 인내심은 일주일 짜리였어요. 사표 내고 사흘을 내리 잠만 잤어요. 나흘째부터는 먹고 자는 것 말곤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말이 열흘도 채 안 돼 돌아왔어요. 결국 이력서를 다시 낼 수밖에 없었죠.”
한 달쯤 지나, 그녀는 이전보다 작은 종합병원과 교대 없는 건강검진센터에 이력서를 냈다. 두 군데 모두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때 이 선생의 문자가 단순한 경고였는지, 아니면 더 깊은 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생각보다 훨씬 가파르다는 사실만은 선명했다. 원래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부모의 등쌀과 남아 있던 미련이 그나마의 끈이었다. 그마저 끊어지자, 발걸음은 완전히 멈춰 섰다.
“두 달쯤 되니까 집안 공기가 엉망이 됐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쉬었던 건데... 아빠가 결국 폭발했죠.”
그녀의 시선이 멀어졌다. 되살아난 기억이 얼굴 근육을 굳혔다.
하루 종일 방 안에 있던 유화가 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며 깊게 한숨을 토했다.
“다들 참고 사는데, 너만 왜 난리야. 견딜 줄도 알아야지.”
익숙한 설교가 다시 시작됐구나 싶어, 유화는 대꾸 없이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문을 나서자마자, 벼락같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사회생활이 원래 다 그래. 꼴랑 그거 하고 그만둘 거였으면 뭐 하러 악착같이 공부했냐!”
그녀의 눈빛에 불꽃이 일었다.
“그렇게 하길 원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공부했냐고 묻는 거예요? 더 버티면 죽을 것 같아서 그만둔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왜 이해를 못 해요?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거예요?”
그날, 유화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섰다. 스물네 해 동안 단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 없던 딸이, 처음으로 껍질을 찢고 나왔다. 아버지는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세우며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그녀 쪽으로 내던졌다.
“그래서 두 달 쉬었잖아. 사람이 넘어지면 일어설 줄도 알아야지. 언제까지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거야!”
그 말은 벽처럼 무정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더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 선 것처럼 숨이 막혔다.
'아빠는 내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게 안 보이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한테, 뭘 자꾸 하라는 거예요.'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은 끝내 소리를 얻지 못했다. 대신 작은 가방에 옷을 몇 벌 넣고 문을 나섰다. 독립이라 부르기엔 초라했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나만을 위한 건 아니었어요. 나를 보고 있으면 부모님도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차라리 떨어져 있는 게 서로를 위해 낫다고 생각했어요.”
무작정 집을 등진 그 밤, 십오 년을 살던 동네가 낯선 골목처럼 어깨를 떠밀었다. 분명히 아는 길인데도 발걸음은 자꾸 멈춰 섰다. 달라진 건 세상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손에 쥔 건 남은 월급의 반 토막뿐.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은 고시원이었다. 합판으로 막힌 방은 몸 하나 눕히기에도 벅찼다. 작은 숨소리조차 갇힌 공기 속에 퍼졌다. 그러나 오롯이 혼자 버텨내야 한다는 현실이 오히려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밥을 거를 수는 있어도, 게으름은 허락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에는 커피 향 속에서, 밤에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하루를 건넜다. 이상하게도 어떤 일도 병동에서의 나날만큼 고통스럽게 다가오진 않았다.
조금씩 모은 돈은 몸을 일으켜 세울 발판이 되었다.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다시 창이 넓은 방으로. 그 작은 진전이 하루를 버티게 했고, 그 성취는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창문을 열 때마다,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공기가 아니라, 다시 살아도 되겠다는 신호로 다가왔다.
그러나 과거는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질타받던 순간이 불쑥 되살아날 때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벗어났다고 믿었던 감정은 다른 얼굴로 다시 들이밀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삼 년이 흘렀다.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 위에는, 여전히 상처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공기가 더 가라앉기 전에, 나는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유화 씨는 진짜 허투루 사는 사람이 아니네요. 방까지 업그레이드라니.”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받아쳤다.
“작가님 좋은 점이 뭔지 아세요? 심각하지 않다는 거예요. 덕분에 많이 웃어요.”
나도 웃으며 캔을 돌렸다
“유쾌한 게 좋긴 하죠. 하지만 아무 일 없는 척일 때가 많아요. 오히려 유화 씨처럼 솔직하게 무게를 드러내는 게 더 대단해 보여요.”
“정말요? 전 많이 어둡죠... 그래도 확실한 건,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낫다는 거예요.”
“그거면 충분하죠. 불태우지 말고, 물처럼 흘러가면 되는 거예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우리가, 한 문장에서 만났다. 늘 불타야만 산다고 믿던 내가, 그녀 앞에서는 흘러가라 말했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통해,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모아 온 그녀의 목소리를 글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메일함을 열었다.
“집에 가서 확인해 봐요. 유화씨 이야기 초안이에요.”
그녀의 큰 눈이 화면에 고정된 채, 짧게 껌뻑였다. 곧 알림 창이 반짝이며 새 메일을 알렸다.
보낸 사람: 김민주.
제목: 첫 문, 나를 열다.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막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