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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 나를 열다

심연사

by 송지영

유화씨에게.


저는 당신이 심연사라는 집을 찾아가는 길을 그려봤어요.
그곳은 제 이야기가 태어나고, 주인공들이 첫 발을 내딛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늘 주어진 선택 앞에서 마음을 다치고, 후회로 물러서곤 했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안에서 원하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 보아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 자리에서, 오롯이 당신의 목소리로.


멈춰 선 것 같은 시간 너머에도 또 다른 문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화씨는 그 문을 열게 될 거예요.
이 소설이, 하나밖에 없는 당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민주 드림


유화는 민주의 메일을 다 읽고도 파일을 열지 못했다. 클릭을 하는 순간,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갈 것만 같았다. 두려움과 후회, 희망과 기대가 뒤섞인 세계로. 깊게 숨을 고르고, 유화는 오래 기다린 그 세계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버스가 부암동 언덕을 느리게 기어올랐다. 굽이마다 산 그림자가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오늘따라 더 멀고, 더 막막했다. 병원 사물함에 남겨둔 명찰, 인사도 없이 내던진 사직서가 떠올랐다. 해방된 줄 알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불안에 쫓겨 뛰고 있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더 단단히 눌려왔다. 식탁 위에 내려앉은 침묵, 부모님의 무거운 눈길. 그 자리에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아, 창밖 어둠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 작은 불빛이 모여든 집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나를 끌어당기던 기류였다. 몇 번이나 그 앞을 서성였지만, 문턱은 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집이 결국 내 발걸음을 받아줄 곳이라는 걸, 나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곧장 벨을 눌렀다. 어스름한 숲길에 내려서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간판이 드러났다.


심연사.


불빛에 젖은 이층 집이 눈앞에 서 있었다. 낡은 집을 다듬어 세운 목조건물, 전면에는 큰 유리창이 걸려 있었다. 창마다 흘러나오는 빛은 제각각이었다. 잔잔한 등불 같다가도, 무대 위 조명처럼 번쩍였고, 새벽빛처럼 멀리 번져갔다. 그 불규칙한 빛결에 서 있기만 해도, 병동에서 스며든 피로와 냉기가 서서히 풀려나갔다.

창가에 은빛 머리칼의 여자가 서 있었다. 본래 흰빛인지, 불빛에 물든 빛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길이 유리창 너머 내게 닿았다. 문손잡이를 밀자, 은은히 퍼지는 종이와 나무의 냄새가 느껴졌다. 높은 천장 아래 기둥마다 책장이 줄지어 있었고, 긴 테이블 위에는 원고지와 펜, 노트북이 흩어져 있었다. 창가에는 영상 장비와 음향 기기가 놓여 있었다. 여자가 다가와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아세요?” 얼떨떨하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서 서성이는 걸 몇 번 봤어요. 언젠가는 들어오실 거라 생각했죠.” 나긋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저는 이현이예요. 여기, 심연사를 맡고 있어요.”
“최유화예요.” 나는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이 공간에 남겼다.
“반갑습니다, 유화 씨.”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심연사. 마음 심(心), 탐구할 연(硏), 그리고 집 사(舍). 겉보기엔 글방처럼 보이지만, 누구든 자기 마음을 열 수 있는 집이에요. 글을 쓰든, 영상을 찍든, 목소리를 남기든 정해진건 없어요. 열고 싶은 문을 스스로 열면 됩니다.”


그녀는 테이블 위 빈 종이를 가리켰다.
“유화씨는 손으로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움직임이 마음을 정돈해 주거든요. 편히 앉으셔서 쓰고 싶은 만큼 쓰다 가시면 됩니다.”

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쓰다 보면 알게 돼요. 글은 늘, 우리보다 먼저 길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손짓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눈앞의 빈 종이는 심연 같았다. 들어가야 했지만,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손끝이 떨리며 종이를 스치자, 잉크가 점 하나로 번졌다. 그 작은 흔적이, 오래 가라앉아 있던 내 안에서 미세한 파문을 일으켰다.

내가 쓰고 싶었던 건, 끝내하지 못한 말이었다. 전하지 못한 뜻, 막혀 있던 목소리. 글이 이끌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이 이끌었을까. 종이 위로 소환된 장면은 고3 진학상담실이었다.




책상 위에는 대학 모집요강과 지원 학과 목록이 널려 있었다. 얇은 종이들이 바람결에 부딪히며 바스락거렸고, 그 위로 형광펜 자국이 요란하게 번쩍였다.

옆자리에는 엄마가 앉아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은 채, 기대와 불안을 한데 눌러놓은 얼굴. 맞은편에는 담임 선생님이 있었다. 안경테 너머로 흘러내린 시선이 책자를 짚었고, 말끝마다 ‘안정’과 ‘안심’이라는 단어가 단단한 담처럼 쌓여갔다.

“유화는 성적이 안정적이니까 간호학과 쓰면 괜찮을 거야.”
담임은 책상 위에 펼쳐둔 모집요강 책자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면허가 있는 직업이니 취업 걱정 없지. 어머님도 그게 더 안심되지 않으세요?”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엄마가 격하게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자 직업으로 그만한 게 없지요. 유화야, 간호학과 쓰자.”

나는 바싹 긴장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겹쳐 보였다. 엄마의 눈동자에 박힌 안도의 빛, 선생님의 흡족한 웃음, 기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게가 내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


펜 끝이 다시 움직였다. 떨리는 손끝이 마침내 오래 눌러온 목소리를 끌어냈다.

“저는… 간호학과 생각 없어요. 사람을 돌보는 일보다, 실험하고 관찰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 문장이 종이에 새겨지는 순간, 둑이 무너졌다. 오래도록 타협하고 침묵했던 감정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교실의 공기, 책상 위의 빛, 엄마의 표정이 갈라져 흩어졌다. 열아홉의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스물일곱의 나는 글 속에서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말했다.
“화학과 쓰겠습니다.”

그 한 줄은 칼날이자 바늘이었다. 내 안을 찢으면서 동시에 꿰매주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던 나에게 비로소 돌아왔다.


흐려진 종이 위에 처음으로 나를 적었다. 한 줄마다 새로운 시작을 새기고 싶었다. 눈물에 번진 글씨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현이 김이 나는 찻잔을 건넸다. 조용히 내려놓은 그 작은 동작이 등을 쓸어주는 손길처럼 다가왔다. 어떤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기운이 옆에 머물렀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다시 한 줄을 이어갔다.
“나는 이제 내가 되고 싶다.”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 위에는 서툴고 덜컹거리지만 또렷한 내 목소리가 남았다. 모든 기운을 다 쏟아낸 자리, 적막 속에서 안도가 피어났다. 나는 이현에게 다시 오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심연사를 나섰다. 문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포근하게 감싸왔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2주 동안 유화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메일을 봤을 텐데도 답이 없자, 불안이 쌓여갔다. 내 글이 그녀에게 닿지 못한 걸까, 아니면 도리어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낸 걸까.

휴대폰을 들었다 놓고, 메시지를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끝내는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곤 했다.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낯익은 기척이 문을 흔들었다. 풍경이 울리며 문 안으로 들어온 건 유화였다. 밝게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굳게 조였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뭐예요, 이렇게 오랜만에 나타나고.. 글 보고 잠수 타면, 괜히 쫄리잖아요.”

내 투정에 유화가 생긋 웃었다. 예전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
“좀 바빴어요. 이리저리 알아보고 준비하느라.”
“준비요? 무슨…?”

궁금해서 조급해진 내 마음도 모르고, 그녀는 또 뜸을 들였다.
“저… CRC라는 임상시험 코디네이터 해보려고요. 간호사 면허로 시작할 수 있다길래… 그 과정에 등록했어요.”

나는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진짜요? 그래서 연락 없었던 거예요?”

“네.” 내 반응이 즐거운 듯, 그녀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작가님 글을… 몇 번이고 읽었어요. 열아홉에 내가 한 선택이, 그 뒤 어른이 된 제 삶으로 이어지는 게 좋았어요. 물론 시련도 나왔지만, 글 속의 저는… 나다워 보였거든요.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생각... 글이 처음으로 제게 허락해 줬어요.”

늘 물먹은 솜처럼 무겁던 그녀의 말투가 한결 가벼워졌다.

“과정을 이수하면 바로 CRC가 되는 건가요?”

“네. 우선 취업할까 해요. 관련 공부를 더할지, 그쪽으로 커리어를 이어갈지는 나중에 결정하려고요. 이제는 불태우듯 다 쏟아내지 않고, 지금 내 앞의 일부터 해보기로 했어요.”

한 인간이 자기 안에서 답을 찾아 일어서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내 앞의 유화와, 글 속의 소녀가 겹쳐 보였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그녀라는 사실이었다.


“바쁘다고 발길 끊으면 안 돼요. 가끔 놀러 와요.”
“네. 작가님 농담이 그리울 때 올게요.”

그녀가 떠난 뒤, 나는 유화의 원고를 다시 펼쳤다. 여전히 미완의 문장들 사이에서, 이제 막 태어난 목소리가 조금씩 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던 날과 같은 붉은빛이, 노트북 위의 글자들을 스치며 흘러내렸다. 글과 삶이 한 장면 속에서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삼키며 기지개를 켰다. 유화가 남긴 잔상들을 되새기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김 사장, 바쁘신가…”

과일가게 박사장이 서 있었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눈빛이 나를 찾고 있었다. 호탕한 기운은 사라지고, 초조한 눈빛과 구겨진 주름만이 석양 속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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