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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이탈

by 송지영

*허구와 사실의 경계에서 쓰였습니다.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창작입니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물 한 모금 넘기는 소리조차 무겁게 울려 퍼진 첫날과 달리, 둘째 날은 뜨거운 김이 식어갈 무렵에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유화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

“출근 전에 잠깐 들렀어요.”
그녀가 종이컵 두 개를 내밀었다. 고소한 커피 향이 퍼졌다. 평소 늘 눌러쓰던 모자가 없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 듯했다. 지쳐 있으면서도, 또래의 맑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유화는 이전보다 깊숙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말할 준비가 된 몸짓이었다. 바람 앞의 작은 불씨 같은 그녀가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녹음기를 눌렀다.

“병원을 그만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종이컵 가장자리에 그녀의 시선이 박혔다.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5개월 차였어요. 그날, 버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잔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그녀의 숨겨둔 말을 데려오는 듯했다.




NICU, 인큐베이터 구역.
삐—삐—삐—.

경보음이 복도를 찢었다.

오정민, 생후 2개월, 체중 3kg. 작은 가슴이 불규칙하게 들썩였다. 모니터에 SpO₂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수액 라인을 점검하던 유화가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1년 차 은정이 트레이를 열었다. 라벨에는 굵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Epinephrine Neb. (에피네프린, 흡입 처방).
“선생님, 이거 네뷸(흡입)이에요!”

은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손끝은 정맥 포트에 닿아 있었다. 프라이밍 끝에 남은 방울이 혈관으로 스며들었다. 유화는 즉시 클램프를 잠갔다.

“조... 조금 들어갔어. 괜찮을 거야...”

은정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유화는 알고 있었다. 흡입해야 할 약이 혈관으로 들어가면, 심장은 곧바로 요동친다는 걸. 예상했던 대로, 모니터 그래프가 솟구쳤다. 심박수 180. 아기의 입술 빛이 빠르게 옅어졌다.

유화가 호출 버튼으로 손을 올리자, 은정이 낮은 목소리로 막았다.

최 선생, 콜 하지 마. 그냥 네뷸로 기록 남겨. 지나가.”

유화는 모니터를 확인했다. 산소 수치가 가파르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선생님, 콜 해야 해요.”

은정은 눈을 바닥에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화가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경보음이 병동으로 퍼지자, 발소리가 몰려왔다. 레지던트와 책임간호사, 그리고 프리셉터 이 선생까지.

“흡입 처방 약이 정맥 포트에 닿았습니다. 프라이밍 소량 유입, 즉시 차단. 현재 SpO₂ 70대입니다.”

은정은 끝내 침묵했고, 유화가 대신 보고했다. 레지던트가 눈을 치켜떴다.

“네뷸을 정맥에? 누가 한 겁니까?”
은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본 이 선생이 곧바로 덧붙였다

“프라이밍 방울 수준입니다. 더 들어간 건 없고...”
주치의가 단칼에 잘랐다.

“방울이어도 약물사고예요! 약제팀 호출하고 새 약으로 네뷸 바로 시작하세요.”

분무가 돌자 모니터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됐다. 삑, 삑— 짧은 경고음이 한 박자씩 늦어지며 이어졌다.

78. 86. 92. 그래프의 톱니가 출렁이다가 차츰 안정의 곡선을 그렸다. 심박이 진정됐다.


데스크 화면에 보고 창이 떴다. 유화는 손끝을 눌러 입력을 시작했다.

프라이밍 소량 유입, 즉시 차단. 발견자: 최유화

하지만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이 선생이 다가와 키보드를 낚아챘다.

“기록은 내가 할게.”

곧 화면 위에는 이 선생의 아이디가 새로 떠올랐다. 유화는 눈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보고를 마친 이 선생의 시선이 유화에게 박혔다.

“뭘 이렇게 일을 키워. 레지던트를 먼저 불러? 보고 순서부터 지켜.”

유화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살리려던 선택이, 순식간에 죄목으로 바뀌는 걸 목격했다.

“급성 저하 상황이었어요. 호출이 우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만.” 이 선생의 목소리가 쇳조각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판단은 위에서 하는 거야. 네가 일을 키운 거라고.”

은정이 옆에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짧은 웃음 하나가 흘렀다.

복도 한쪽에서 지켜보던 간호사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병동을 삼켰다.


점심시간, 유화가 자리에 앉자 동료들이 동시에 일어섰다. 남은 건 수저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웃음뿐이었다.

오후 배정표가 다시 갈렸다. 까다로운 환자들이 모조리 유화 앞으로 몰렸다. 호출음은 끊이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넘길 틈도 없었다. 책임까지 유화에게 쏠렸다. 프라이밍 방울이라는 말로 사고는 축소됐고, 보고 순서 위반으로 그녀의 판단은 잘못이 되었다.

비품실 옆 복도, 화장실 문을 열었다. 마스크를 벗자 볼에 자국이 깊이 파여 있었다. 견디던 무게가 터져 나왔다. 수전을 틀자, 눈물이 물소리에 뒤섞여 흘러내렸다. 자신이 한 일들을 마음속으로 복기했다. 버튼을 눌렀다. 보고를 했다. 기록을 남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절차를 믿은 게 문제였을까. 기록과 팀의 위신을 환자 생명보다 먼저 두었어야 했을까.'

아무리 곱씹어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운 물로 눈가를 훑고 머리를 다시 묶었다.

그 이후에도 병동의 서늘함은 이어졌다. 그녀의 하루는 잔해 위를 걷는 것처럼 흘러갔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매서운 눈빛들을 피해 도망치듯 숨 돌리는 곳은 아기들이 잠든 자리였다. 쌔근쌔근 이어지는 호흡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저 작은 숨결 안에 얼마나 많은 싸움이 숨겨져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화는 수간호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손을 들었다. 노크 소리가 좁은 복도에 메아리쳤다.

“어, 최 선생. 무슨 일이야?”

“병동 이동을 요청드립니다.”

볼펜 끝이 허공에 멈췄다.
“오정민 아기 일로 그러는 거지? 잘 정리됐잖아. 앞으로 불필요한 마찰만 좀 줄이자.”

유화는 황당함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불필요한 마찰이라뇨, 선생님.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화하던 장 선생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보고서 표현만 정리해. ‘정맥 포트 접촉’은 과하다. ‘경로 혼선 의심’으로 바꿔. 발견자는 팀으로 하고.”

“사실을 바꾸라는 말로 들립니다.”

“사실을 정돈하자는 거지. 쓸데없이 일 키우지 말고.”

장 선생의 볼펜이 탁, 책상을 찍었다.

“괜히 일 크게 만들어서 뭐 하게. 간호팀이 흔들리면 환자가 다쳐.”

유화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기는 이미 위험했습니다. 환자 안전보다 우선인 게 있습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장 선생은 시선을 내리깔더니 서랍을 열었다.
<경위서 제출 안내>

“이건 오늘 안에 쓰고. 다음 주 스케줄, 야간 세 개 붙인다. 은정 선생한테는 공식적으로 사과해.”

“제가요?”

“분위기 수습이야. 최 선생도 알잖아, 지금 병동 사정. 그리고...”

볼펜이 다시 용지를 두드렸다.

“병동을 흔들지 마. 순서 지켜.”

눈앞에 놓인 서류의 빈칸, ‘경로 혼선 의심’과 ‘팀’이라는 단어가 유화의 판단을 지워내고 있었다.

“이동 요청은...”

“보류야.”

짧은 답이 돌아왔다. 유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슴속에서 무너져 내린 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끝없는 넌더리였다. 더는 이 질서 안에서 자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복도로 나와, 휴대폰을 켰다. 병원 인트라넷 첫 화면에 인사 서식이 있었다.

파일명: 사직서 양식. hwp
그녀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파일을 저장했다.

‘다 귀찮아.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딴 번거로운 일도 없었을 텐데.’
입술 사이로 고단한 탄식이 흘렀다.


녹음기의 불빛이 다시 깜빡였다. 공기엔 여전히 그날의 잔향이 맴돌았다. 그녀가 떠나는 건 직장이 아니라, 위계와 은폐가 당연시되는 질서였다. 그 결심은 자기다움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가장 깊이 다치는 세상에서.

나는 보고 싶었다. 병원에서 신음하는 유화가 아닌, 제 나이의 시간을 살아내는 그녀를.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별처럼, 언젠가 유화도 자신의 길 위에 다시 설 수 있을까.



※ 글 속에 나온 의료 용어입니다.


- Epinephrine Neb.: 에피네프린 흡입제

- 프라이밍: 수액관 내 공기를 빼내는 과정

- 정맥 포트: 링거줄에 약을 투입하는 부위

- SpO₂: 산소포화도

- 클램프: 수액관을 잠가 흐름을 차단하는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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