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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잊기 전에

by 송지영

해수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이 부서질 듯 열어 제치고 들어왔다. 눈매에는 화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옆집 과일가게, 완전 사기꾼이야!”

나는 키보드 위에 걸쳐 있던 손을 멈추고 동생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장난이나 억지가 아님은 분명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사과 네 개 만 원이라더니 세 개만 주고, 내가 잘못 들었다고 덮어씌우는 거 있지.” 해수는 씩씩대며 의자에 털썩 몸을 던졌다.
“설마… 박사장님이 그랬단 말이야?”

“과일까지 상태가 엉망이었어. 싼 맛에 사볼까 했는데 안 산 게 천만다행이지.” 해수는 손을 휘저으며 짜증을 냈다.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그럴 분 아니셔. 너도 안 사면 되는 걸, 그렇게 화낼 일이야?”

“언니는 왜 자꾸 내 말을 안 믿어? 네 개 만 원이라고 분명히 들었다니까!”

나는 대꾸를 삼키며 동생을 달랬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혹여 박사장이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그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과일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오후에도, 그다음 날도 열릴 기미가 없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불 꺼진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내 발걸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닫혀 있던 가게에 불빛이 들어온 건 며칠 뒤 아침이었다.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허허, 별일 아니야. 몸이 좀 안 좋아서 쉬었어.”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얼굴에는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선반 위 바구니에는 사과와 배 몇 알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껍질은 이미 빛을 잃은 채 주름져 있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내가 거듭 묻자 그는 손을 흔들며 “아무 일 없다”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곤 몸을 돌려 매대를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움직임은 느리고 지쳐 보였다.
“이제 슬슬 그만둘 때가 된 거 같아. 안 그래도 김사장한테 가려던 참이었어.”

그 말이 생각보다 크게 들려, 대꾸가 쉽지 않았다. 정리한다는 말이 단순히 가게를 뜻하는지, 더 깊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속에 묵은 슬픔이 배어 있어, 다시 그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럼 일 마치시고 차 마시러 오셔요.”



늦은 오후, 글방 문이 열리며 박사장이 들어섰다.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며, 손에는 사과와 배가 담긴 봉지가 들려 있었다.

“김사장, 이거 얼른 먹어야 해” 그는 봉지를 내밀며 웃음을 지었다.

“안 주셔도 되는데, 뭘 이렇게 많이…”

“다 나눠 줬어. 오늘 가게 정리했거든”

“네? 갑자기 왜요?”

“갑자기는 아니고, 생각하던 거여. 혼자 하려니 힘에 부치더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며칠 전 해수 일이 마음에 걸려 말을 보탰다.

“혹시 그날 일 때문에 마음 상하신 건 아니죠? 제 동생이 괜히 언짢게 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박사장은 기억을 더듬듯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 아가씨가 김사장 동생이었구먼. 허허. 무슨 동생 탓이야. 요즘은 실수도 잦고, 가게 만기도 다돼서 접을까 생각하고 있었네.”

박사장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말끝을 잇지 못하고 끊어내거나, 방금 한 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모습에서 그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고백하기 전, 망설이는 사람처럼 손끝으로 옷자락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긴 한숨과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김사장은 알아야겠지. 내 이야기를 글로 써주니. 요즘 들어 자꾸 깜빡하는 일이 늘었지만… 며칠 전엔 집 비밀번호가 생각나질 않더라고.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보건소에 갔어.”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모서리는 손때에 바래 누렇게 변했고, 종이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다.

“이게 그때 받아온 거야. 숫자랑 뭔 말들이 적혀 있는데… 난 잘 모르겠어. 김사장이 좀 봐줘.”

나는 종이를 펼쳤다. 굵은 글씨로 검사명 〈CIST 인지선별검사〉와 23점이라는 숫자, 그 옆에 ‘정상 24점 이상’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가장 아래 붉은 도장 옆에 쓰인 심장을 때리는 한 구절.


〈인지 저하 의심, 전문 진료 권고〉


얇은 A4 한 장이었지만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눈은 활자를 놓지 못했고, 심장은 쉴 새 없이 고동쳤다. 들키고 싶지 않은 두려움과 연민이 차례로 밀려왔다.

“사장님. 이건 확정이 아니라 확인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정확한 건 진료를 보셔야 알 수 있어요. 병원엔 혹시… 가보셨어요?”

사실 여부를 떠나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혼자 그 결과지를 붙들고 끙끙 앓았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더없이 애처로웠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는 늘 결정을 미루고 결국 가족의 어깨에 짐을 얹곤 했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박사장은 혼자 감당하려 애쓰고 있었다. 두 모습은 달랐지만, 닮은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허허, 가봐야지… 가려고 했어.”

그의 머뭇거리는 눈빛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이 종이는 단순한 검사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럼, 저랑 같이 가세요. 제가 병원 알아보고 예약해 둘게요.” 박사장은 얼굴에 온기가 번졌다.

“그래주겠나. 나 혼자선 영 자신이 없어서…”

“그럼요. 연락드릴게요.”


며칠 뒤, 원고를 정리하고 있을 때 문을 밀고 낯선 여자가 들어섰다. 잔뜩 굳은 표정에 처음엔 의뢰인인가 싶었지만, 이내 얼굴 어딘가에서 아는 눈매가 겹쳐 보였다. 낯섦과 친근함이 뒤엉키는 순간, 여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김사장님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가방 속에서 구겨진 메모 한 장을 꺼냈다. 종이 위에는 서툰 글씨로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면, 출판사 김사장을 찾아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윤정 씨군요.”
“저를… 아시나요?”

“네, 박사장님께 따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찬 해오고 챙기시느라 고생이 많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녀는 한꺼번에 터져 나온 눈물에 당황해 손등으로 급히 훔쳐냈다. 나는 조용히 휴지를 내밀었다.
“가게에도 집에도 안 계셔서요. 현관문은 열려 있고, 전화도 안 받으세요. 서랍에서 저 메모를 발견하고 왔어요. 통장과 비밀번호까지 남겨 두셨더라고요. 어디로 가신 건지…”
나는 생각을 더듬다 답했다.

“어머니 납골당에 가셨을 거예요. 요즘 자주 가신다고 하셨어요.”
“혹시 아빠가…”
눈빛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고,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을 전해야 할지, 모른 척해야 할지 어느 쪽도 쉽게 택할 수 없었다.


“금요일에 저랑 병원에 가시기로 했어요. 보건소 검사에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나왔어요.”

윤정은 어깨를 잔뜩 웅크리며 한기를 느끼는 듯 몸을 떨었다. 몇 번 깊은숨을 고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금요일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아빠가… 먼저 말씀하신 건가요?”

순간, 내가 딸이라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상상해 보았다. 혹시 내가 먼저 알게 된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버님 책을 제가 써드리고 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책이요? 아빠가요?” 윤정의 눈이 커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드님도 멀리 계시고 하니까, 글로라도 자식들에게 마음을 남기고 싶어 하셨어요. 평소에 마음을 잘 나누지 못했다고… 죄송하지만 출간 전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건강 문제만큼은 따님께 알려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린 거예요.”

윤정은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유서처럼… 들리네요.”
나는 차마 그 단어를 따라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할 뿐이었다.
“오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하시죠?”

그때, 내 안에 작은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윤정이라면 그 둘의 이야기를 더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박준서 씨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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