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기장 한 페이지. 거기엔 등굣길 100미터 전부터 아팠던 한 아이가 있었다. 윤정은 그것이 준서의 청춘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했다.
“오빠 일기장을 본 적 있는데,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학교 앞에 늘어선 자가용 행렬을 지나는 게 제일 싫었다’고 적혀 있었어요. 자기 잘못도 아닌데, 차들 사이를 지날 때마다 작아져야 했으니까요. 차에서 내린 친구가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기라도 하면, 그 순간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자가용이 없던 집이었던걸요.”
윤정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걷던 열여덟 살 박준서를 떠올렸다. 움츠러든 어깨, 말라붙듯 오그라든 주머니 속 손. 세상 앞에서 작아지지 않으려 애쓰던 아이. 자기 능력으로는 결코 질 리가 없다고 믿었던 아이. 그러나 세상은 늘 그보다 한 발 앞에 있었다.
부모는 빠듯한 형편 속에서도, 아이를 명문고에 보냈다. 그곳에서 준서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의 높낮이를 배워버렸다.
“오빠는 의대에 가고 싶어 했어요. 엄마가 억척스러워 보이지만 늘 약을 달고 사셨어요. 그런데 아빠는 단칼에 안 된다고 하셨죠. 우리 집 사정으론 어림도 없다고요. 오빠보다 못했던 친구들이 의대에 지원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던 것 같아요. 아빠에겐 현실이었지만, 오빠에겐 꺾여버린 꿈이었죠.”
저녁 부엌은 김으로 가득했다. 씻어 놓은 그릇이 싱크대 위에 줄지어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국이 끓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맞부딪쳤다.
“준서 의대 내가 보내. 애가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어찌 안 보내. 공부를 못하면 몰라. 내가 밤 새 일해서라도 보낼 거여.”
“누가 안 보내고 싶어서 안 보내냐. 자그마치 6년이여. 그 세월을 어찌 뒷바라지할 건데. 지가 번다 해도, 그 어려운 공부 하면서 장학금 받기도 힘들 텐데…"
끓는 냄비에서 흩어지는 김이 부엌 공기까지 뜨겁게 데웠다.
"준서는 뭘 해도 잘할 놈이여. 걱정 안 해. 공대 나와 일찍 취직해도 누구보다 잘 될 거여. 괜히 저도 나도 힘든 길을 뭐 하러 가냐.”
“내가 보낸다니까! 애 속상한 거 못 봐.”
미숙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 나, 소음성 난청이란다. 트럭을 오래 몰아서 그렇다는데… 언제 일을 못하게 될지 모른다, 이 사람아. 누군들 의사 아들 안 바라겄어. 왜 이런 얘기까지 하게 해서 나쁜 아비를 만들어.”
그 순간, 미숙은 어금니를 세게 물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국물 끓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웠다. 미숙은 잠시 굳어 있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나 안 들리는 거야? 근데 왜 여적 치료도 안 받고 이러고 있어. 당신이 엔간히 안 좋아 이런 말 할 사람이 아니잖여.”
문틈 너머에서 윤정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화살처럼 날아든 말들이 어린 가슴에 깊이 박혔다. 아버지의 고단함과 어머니의 한숨이 뒤엉켜, 어린 소녀의 폐부를 조용히 짓눌렀다. 그날, 한 지붕 아래 흩어진 언어들을 유일하게 이어 붙인 사람은 윤정이었다.
윤정은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오래전 장면이 아직도 목을 막아오는 듯했다.
“오빠는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은 끝내 말씀하지 않으셨거든요. 지금은 치료받고 많이 나아지셨지만. 그땐 아빠가 입술을 보며 들으셔야 했죠. 오빠는 자꾸 눈을 피했고, 아빠한텐 아들의 말이 너무 어려웠을 거예요… 그때 이미 부자사이에 거리가 생겨버린 것 같아요. ”
윤정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버지는 소리를 잃었고, 아들은 길을 잃었다. 그 사이에서 엄마만이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마지막 다리였다.
윤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또 하나의 기억을 길어 올렸다.
“오빠가 4년 전액 장학금 받고 공대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은 기뻐서 우셨어요…”
좁은 거실은 웃음과 환호로 떠들썩했다. 낡은 장판 위에서 부모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그동안의 고생이 끝난 듯 후련해했다. 작은 집은 잠시나마 축제 같았다.
“우리 아들, 효자다 효자.” 미숙은 준서를 끌어안고 덩실덩실 몸을 흔들었다. 그 순간의 환희가 준서에겐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곧 어깨를 빼내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거실의 환호와 방 안의 침묵. 같은 지붕 아래에서 두 언어가 공존했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어린 윤정은 그 거리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버렸다.
“윤정 씨는… 오빠를 이해하는군요.”
“그럴 수밖에요. 오빠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누구도 뭐라 못 해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쉼 없이 달렸는지… 부자들도 버거워하는 미국 유학을, 오빠는 장학금이랑 후원으로 버텨 끝까지 해냈어요. 저는 그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거기다 제 공부까지 시켜주고, 집안도 지탱해 줬어요. 오빠는… 정말 할 만큼 했어요. 저는 그게 고맙고, 또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또렷했다.
“준서 씨가 한국에 안 온 지도 꽤 됐잖아요. 이제는… 아예 안 오시는 건가요?”
윤정이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럴 리가요. 오빠 한국에 들어올 준비하고 있어요. 자리가 딱 맞지 않아서 교환교수라도 들어오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요즘 더 바쁜 거예요.”
박사장은 아들이 자기 때문에 한국을 피한다고 믿고 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윤정의 입에서 흘러왔다. 같은 마음을 품고도, 정작 부자는 서로 가장 먼 자리에 서 있었다.
윤정과 대화를 나눌수록 오래 묵은 그림자가 내 안에서 움직였다. 박사장의 얼굴 위에 내 아버지가 포개졌고, 준서를 떠올리면 어린 내 모습이 따라왔다. 이 가족의 이야기가 내게 다가온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었다.
중학교 3학년때인가 학교 정문 앞에서였다. 양복 차림의 남자가 차 문을 열자, 함께 걷던 수현이는 “얘들아, 울 아빠 왔어. 먼저 갈게!” 하고 달려가 안겼다. 반짝거리는 구두, 매끈한 차, 윤기 나는 얼굴로 웃던 그 아버지. 나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필 그때, 맞은편 차선에 낯익은 트럭이 신호에 걸려 서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내 이름이 울렸다.
“민주야, 김민주!”
곁에 있던 기정이가 내 팔을 잡았다.
“야, 너 부르는 거 아냐?”
“아닌데? 나 모르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친구들 틈에 숨어버렸고, 아버지도 더는 내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았다. 그날 이후였다. 길 위에서 서로를 아는 척하지 않게 된 것이.
나는 늘 집을 떠나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면 알아서 살라는 엄마의 말이 내게는 오래된 주문 같았다. 그 말에 쫓기듯, 집을 벗어나야만 했다. 방법은 서울로 대학을 가는 길뿐이었다. 형편을 생각하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불가능이 오히려 나를 더 세게 밀어붙였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떠날 수 없다는 걸. 그 순간만은, 무모함조차 내 편이었다.
부모님은 대학이 그렇게 돈이 드는 일이라는 걸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장학금과 기숙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대학으로 하향 지원했다. 합격증을 받고 부모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기숙사비만 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서울행 기차는 내 삶의 궤도를 바꾸는 첫 열차였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날수록, 마음속에서는 두려움과 해방이 엇갈렸다.
혼자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누군가는 동아리 방에서 밤을 새우며 시를 쓰고, 누군가는 공모전을 준비했지만, 내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장학금을 놓치면 학기를 이어갈 수 없었고,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아침에는 수업, 저녁에는 서빙, 주말에는 PC방과 편의점에서 종일을 보냈다.
3학년 무렵, 대필을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글 한 편이 며칠 치 노동보다 큰돈이 됐다. 낮에는 수업, 밤에는 글을 썼다. 지친 몸보다 마감이 더 무서웠고, 글은 생계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를 하면 “오늘 또 쓰러질 뻔했다”는 엄마의 말이 반복됐다. 병원에 가려면 일을 해야 했고, 일을 하면 다시 병이 악화되는 악순환 속에 두 사람은 늘 지쳐 있었다. 가난해서 아픈 건지, 아파서 가난한 건지 알 수 없는 병의 굴레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곧 생활비를 집으로 부치기 시작했다. 글로 번 돈이 자유 대신 속박이 될 거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박사장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를 짐스럽게 했던 풍경들이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내가 부끄러워했던 아버지는 고작 내 나이의 청년이었다. 무너지는 몸으로 가족을 지탱하던 사람. 잠시 멈추면 생이 무너질까 봐 일만 하던 사람. 그들의 시간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박사장과 준서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내게 진통이었다. 문장은 흘러가지 못했고, 원고는 내 안에서 오랫동안 표류했다.
낙엽이 거리를 메우던 늦가을, 머릿속엔 온통 박씨네 가족뿐이었다. 나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박영수의 고독과 박준서의 침묵이 화면 속에 멈춰 있었다. 검색창을 열었다.
‘박준서 고온형 고체산화물연료전지 강의’
검색 결과는 곧바로 화면을 채웠다.
'차세대 연료전지 특강 - 미시간대학교 박준서 교수'
일시: 2024년 11월 17일(금) 오후 4시
장소: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금호아트홀.
마침내, 내가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