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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OH Oct 21. 2024

1980년 4월

후드득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한 방울 한 방울 가랑비 내리듯이 내리던 비는 갑자기 콰광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로 바뀌었다. 아직 사월 초인데도 내리는 모양새로는 숫제 여름 장마 같았다. 허순여는 재빨리 널려있던 빨래를 걷기 시작했다.     


“아이구 이게 뭔 일 이래.. 봄비가 아니구서. 곧 마르려던 것 다 젖게 생겼네.”     


 허순여가 어젯밤 삶고 치댄 빨래였다. 남편은 옷에 얼룩이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허순여도 통돌이 세탁기보다 제 손을 더 믿었다. 팍팍 치대야 때가 쭉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허순여가 빨래를 거두어들이고 있는데 남편 김영욱이 들어왔다.     


“경일 아버지, 일찍 오셨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것 얼른 치우고 식사 차려 드릴게요!”     


 결혼한 지도 벌써 7년이고,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들어선 아이 경일이도 벌써 여덟 살이었다. 서로 이물 없을 때도 될 만하였것만 허순여는 도통 남편 김영욱에게 가까워지질 못하였다. 양반상놈의 계급이 이미 없어진 지도 오래였으나 마을의 터줏대감이자 어른이었던 김학봉의 위세는 그가 세상을 떠났어도 여전한 것 같았다. 김영욱이 김학봉을 그대로 닮아서일까, 허순여는 김영욱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쭈뼛쭈뼛해지는 것이었다.      

 김영욱은 허순여가 차린 밥상을 물리고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순여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 짐을 싸야겠어. 서울로 이사 갑시다.”

“예. 예...?!”     


 허순여는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서울이라니? 이 양반은 여기 학동면에서 면서기를 하고 있는데?     


“경일 아버지, 저기, 서울요? 발령 나셨어요?”

“일단 내 말대로 해요. 차차 말해줄 테니.”     


 그러고는 영욱은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순간만큼 빨리 세상을 뜬 시부모님이 생각난 적은 없었다. 영욱은 어려서부터 도련님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타협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허순여였지만 남편이 너무 뻣뻣하다는 소리를 간간이 듣고는 했다. 


 얼마 전 있었던 면사무소 회식자리에서 면장이 농담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다들 세상에 이렇게나 재미있는 농담을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박장대소하는데, 오직 김영욱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나.     

 면장이 “여기서 한 명만 웃으면 되는구만 그래.”라고 하자 다들 김영욱을 쳐다보았단다. 김영욱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셨다고. 옆에 있던 박 씨가 슬쩍 김영욱을 치면서 눈치를 주었음에도 김영욱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허순여는 그 말을 박 씨의 처에게 들었다. “경일네가 좀 잘해봐~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 들어봤지?” 하면서 박 씨의 처는 이것저것 허순여에게 소위 비법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그렇지, 서울이라니. 이날 이때까지 허순여가 가장 많이 가본 곳이 천안삼거리였다. 그런데 거기보다 더 먼 서울이라니. 허순여는 어떻게 짐을 꾸려야 할까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 켠이 답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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