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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OH Oct 21. 2024

1982년 9월

허순여는 하늘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하늘은 학동면에서 바라보던 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김영욱이 이끄는 대로 온 서울 생활도 벌써 삼 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서울은 자신이 생각하고 그렸던 모습이 아니었다. 남편 김영욱을 따라 시내에 가 보았을 때에는 겁이 덜컥 나서 우세스러운 줄도 모르고 남편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서울에선 눈 뜨고 코 베인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자신들이 자리 잡은 대흥동은 달랐다. 거미굴처럼 이어지는 골목, 하늘과 곧 맞닿을 것 같은 등성에 자리 잡은 동네였다. 수도도 들어오지 않고 우물물을 길어야 했다. 집들은 번듯한 벽돌집이 아니고 시멘트 블록을 얼기설기해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지붕은 슬래브 판이었고 여기저기 깨진 유리창은 천으로 대충 막아놓은 집들이었다. 


 허순여는 그래도 나름 번듯했던 학동 집이 그리웠다. 면서기였던 남편은 서울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김학봉을 닮아 허우대가 크고 풍채가 좋았던 남편은 이제는 꼬챙이처럼 말라버렸다.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 허순여에게 남편은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들 경일이가 동네 아이들과 쉽사리 친해진 것이었다. 아이는 금세 친구를 사귀고 아침부터 밤까지 쏘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밥상을 다 물린 김영욱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요, 아, 숭늉을 안 올렸구나! 제가 지금 바로 갖고 올게요.”     


 허순여는 제 머리를 콩콩 때리며 부엌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때였다.     


“허 주인님, 내가 지금까지 당신을 너무 소홀하게 대했지. 이제부터 주인님으로 부를게요.”     


 허순여는 망치에 맞은 듯 멍하니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늘해졌는데. 이 양반이 더위를 먹었나? 머리에 탈이 났나? 이를 어째….     


“겨, 경일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얼른 냉수 한 사발 떠올게요!”     


“아니야, 허 주인님. 이제 당신도 어엿한 자신의 주인이오! 누가 누구에게 그렇게 할 거 없어. 나도 주인이고, 당신도 주인이야!”     


 허순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신이 더 남편을 모시고 살뜰히 챙겼어야 하는데, 이 험한 서울살이에 저렇게 귀하게 자란 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으흐흑. 허순여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 탓이야, 내 탓. 지아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내 탓이야.     


 김영욱은 그런 허순여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남편은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허순여는 겁이 덜컥 났다. 시부모님이 생각났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저 사람이 저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어떻게 하지?!     


“경일 아버지, 으흐흑. 제가 못나서 죄송해요. 우리, 우리 다시 갑시다, 학동면으로 예?! 꼭 서울 살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진즉부터 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김영욱은 허순여의 손을 맞잡으며 말하였다. 아니오, 우리는 따로 갈 데가 있소. 옷을 차려입고 나오시오. 당신에게도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내가 보여 주고 싶어. 허순여는 남편의 재촉에 시골에서 올라올 때 고이 개켜두었던 한복을 꺼내 입었다. 귀한 본견 원단으로 만든 것이라 혹시 팔면 돈이라도 될 것 같아 가지고 온 옷이었다.

      

 김영욱은 곱게 차려입은 허순여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가 들어선 곳은 대흥동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였다. 그렇다고 대웅전이니 뭐니 하는 절이 갖추어야 할 것은 없었고 가운데에 큰 기와지붕이 있는 것이 아무래도 법당 역할을 하는 것 같았고, 이 법당 주변을 수 채의 작은 별채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김영욱이 흠흠 거리면서 법당(으로 생각되는 방)에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반갑게 김영욱을 맞이하였다.     


“아, 어서 오십시오, 김 주인님! 아, 이분이 김 주인님의 처이시군요!”     


 허순여는 남자들이 그렇게 많은 방에 혼자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조용히 남편에게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속삭였으나 영욱은 순여의 손을 이끌고 방 한가운데 앉아있는 분에게 절을 하였다. “큰 주인님, 제 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큰 주인님이라고 불린 자는 흰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고 눈은 자애로워 보였다. 그는 맞절을 하며 허순여를 맞이하였다. 큰 주인님 뒤로는 젊은 여인 두 명과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 한 명이 있었고, 그들은 큰 주인님의 절을 받는 허순여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잘 오셨습니다. 성함이 허순여라고 했던가요? 그럼, 허 주인님이 되시겠군요. 처음이라 좀 당황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저 인생의 진리를 찾기 위한 조그마한 공동체이니 내 집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허순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설마 여기서 지내라는 말은 아니겠지 하는 의문이 들어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편은 그저 큰 주인님이라는 남자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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