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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OH Oct 21. 2024

제3세션

여러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여러분은 지금 오늘은 여러분이 그리는 미래에 더욱 한걸음 가깝게 가고 계십니다. 저는 그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자 오늘은 제가 내어드렸던 미션을 얼마나 수행하였는지 한번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김경열 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수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요, 박사님! 진짜 이거 대박이에요, 대박! 와, 저의 미래는 이미 다 실현되었어요~ 짜잔!!!”     


 서수지는 에르메스 버킨백을 모두에게 내보였다. 정말 서수지가 말한 어여쁜 핑크색 버킨백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원피스에 발그레하게 물든 뺨과 들뜬 눈빛으로 버킨백을 들고 있는 서수지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어떻게 이 주 만에 버킨백을 구했지? 이것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다던데, 설마 미리 가지고 있던 걸까? 서수지의 신념은, 그녀의 믿음은 정말 강했었구나! 정말 김 박사의 말대로 기억하는 미래가 펼쳐지는 모습에 모두 말문을 잃었다.      


오, 수지 씨!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 지난 이 주간 수지 씨가 경험한 여정을 우리와 공유해 주시겠습니까?      


 김박사의 말에 서수지는 버킨백을 열더니 빼곡히 무엇인가를 쓴 양장지 뭉치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박사님의 말씀대로 아침 10시, 오후 1시 그리고 저녁 10시마다 명상에 잠기고 버킨백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고 말했다. 지금 입고 있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하나의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하게 미래를 기억하면서 종이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김박사는 기쁨에 겨워 소리를 쳤다.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자, 우리 수지 씨에 이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신 분이 또 누구실까요?     


 모두를 돌아가며 쳐다보는 김박사와 눈이 마주친 정현은 순간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나 멋진 서수지의 모습과 자신이 모습이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자신이 나서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저는 수지 씨만큼 무언가를 이루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저 나름대로 성실하게 하나의 루틴을 만들어서 제 미래를 기억해 보려 했습니다. 그중에는 이루어진 것도 있고 아직 미정인 것도 있습니다만….”     


 지난 이 주 동안 정현은 정말로 마음을 다잡고 양장지를 펼치고 자신의 희망을 써 보려 했다. 해외팀 한 과장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모습, 모두로부터 과장 승진을 축하받으며 자신이 한 턱 쏘는 모습을 그렸다. 한 자 한 자 꾹꾹 한 과장님과 데이트, 과장 승진, 이 두 문구를 종이에 썼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그려보았다.      


 정현의 믿음이 통한 것일까? 두 번째 세션이 끝나고 사흘 정도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정현이 다니는 회사는 반도체 생산과 판매를 하는 해외 현지법인을 몇 개 두고 있다. 이 중 대만에 위치하고 정현이 다니는 회사가 50%, 대만의 회사가 50%씩 투자하여 설립한 합작회사가 작년 초부터 매출이 조금씩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현이 다니는 회사는 미화 일백만 불의 자금을 긴급히 대여했고, 매월 말 이자를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현지법인이 9월분 이자를 연체하기 시작하더니 가까스로 10월 말이 되어서야 갚았다. 그 후에도 조금씩 연체가 계속되고 이를 일부 상환하고 하는 일을 몇 번 반복하더니 급기야는 올해 초 이자를 더 이상 못 내겠으니 지분투자로 전환하든지, 원금에 엎든지 하는 식으로 변경해 달라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재무팀과 해외팀의 T/F가 조직되었고, 정현은 여기에 해외팀 한 과장과 함께 선발된 것이었다. 정현은 그렇게 신나는 야근은 처음이었다. T/F의 막내로서 매일 저녁 메뉴를 고르고 준비하는 일도 재미있었고, 밤늦게까지 회의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방안을 토의하는 것도 신이 났다. 가끔 한 과장과 자신이 눈이 마주칠 때에는 저 사람도 나에게 호감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특히 지난주 금요일에는 한 과장의 제안으로 모두들 회식을 하러 갔다. 디들 고생한다고 T/F 팀을 꾸리는 강 팀장은 저녁을 거하게 쏜 다음 젊은 직원들만의 시간을 가지라며 한 과장에게 법인카드를 맡기고 먼저 퇴근을 하였다. 한 과장을 필두로 해서 정현 등은 모두 호프집에 갔고, 거기서 정현은 한 과장 옆에 앉게 되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정현이 우연을 가장해서 한 과장 자리에 앉은 거긴 하지만…. 정현은 우연히 스치는 한 과장의 손이 참 따뜻하다 생각했고, 옆에서 보니 그의 속눈썹도 참 길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이 사람 옆에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커져만 갔다.      


 정현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자신의 미래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2개월 후면 승진심사가 있는데 이것도 통과해 올해는 꼭 과장이 되고 싶다고, 아니 과장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정현은 종이에 공들여 쓴 ‘나는 승진하고, 한 과장님과 데이트한다’는 문구를 보여 주었다. 매 페이지에 빽빽하게 이 두 문장이 반복되어 쓰여 있었다.      


김박사는 또다시 박수치며 말하였다.     


역시, 여러분은 선택받으신 분들이군요. 이렇게나 곧바로 믿음의 효력, 기억하는 미래가 도래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니, 없을 겁니다. 저는 더욱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네요. 앞으로 여러분을 더욱 열심히 지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김용광 씨?     


 김용광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김용광은 쭈뼛거리며 자신의 종이를 펼쳐 보았다. A4 반장 정도나 될까. 그가 쓴 ‘갤러리아 포레, 신혼집’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김영광은 정말 어떠한 믿음이나 신념만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되물었다.     

 

 김박사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광 씨, 지금 몇 살이지요? 서른하나? 그렇군요…. 어떤 사람이 서른이 넘도록 갖게 된 사고의 틀을 바꾸기는 대단히 힘듭니다. 용광 씨, 실례지만 직업이 뭐죠? 아, 기자요? 그러시구나…. 어느 분야 기자이신가요? 예, 지금은 사회부라고요. 그래서 더 그러시겠네요. 사물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기자가 응당 갖추어야 할 자세일 것이니까요. 


 그러나 안타깝습니다. 지금 용광 씨는 자기만의 미래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어요. 사람이 대단히 합리적인 존재 같지만, 실은 감정적인 동물이지요. 우리의 삶도 매우 합리적으로 굴러갈 것 같지만, 오히려 비합리적인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그런 것입니다. 저를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고깃집에서 알바만 하면서 살았던 청년이 이렇게 번듯하게 의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해냈잖아요.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좀 더 믿으십시오!     


 그러나 김용광의 표정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흠흠 거리며 몇 번 목을 가다듬더니 김박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박사님이라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누구나 같은 의지력을 가진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실 공부도, 공부 머리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박사님의 아이큐가 남보다 더 좋았던 것 아닐까요? 믿으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 저도 그렇지만 이 방에 계신 누구도 백 프로 확신할 수는 없을 겁니다.”     


김박사는 이러한 반응은 다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네,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고 영화로도 나왔지요. 놀랍게도 이 아나스탸샤는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로서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전해지는 아나스타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나스타샤가 진짜로 마지막으로 실존한 황녀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사실 아나스타샤는 나중에 황실의 DNA와 맞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생각했던 이 여인이 정말로 죽을 때까지 공주로서 대우받았다는 것이지요. 이 여인은 자신이 아나스탸샤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매 순간 자신을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라고 생각했고, 이를 주위 사람들도 다 인정하고 그대로 공주로 대해 주었습니다. 믿음에 한 올의 의심도 없었다고 할까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는 미래도 이래야 합니다.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를 아나스타샤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 세상은 여러분을 아나스타샤로 대해 줄 것입니다!    

 

 김박사는 고무된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김용광은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김박사를 쏘아보았다.     


“박사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정신병 아닌가요? 지금 저희보고 망상증에 걸리라 이 말입니까?”  

   

 톡 쏘는 김용광의 말에 김박사보다 이연자가 더 놀란 듯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 지금 누구한테 따지는 거지? 저런 건방진 자세로 감히 박사님을 대하다니!     


“여보세요! 김용광 씨, 너무 무례한 것 아니에요? 정말 당신은 부정의 늪에서 아직 빠져나오질 못했군요! 당신이 그렇게 스스로 믿지 못하니까, 믿음이 약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김박사님은 그 힘든 과정에서도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의사 가운 입고 노력했다잖아요, 그래서 지금 저희 앞에, 이렇게 딱 의사가 되어서 나타나신 거잖아요!”     


 이연자의 허둥대는 말에 잠깐 노기를 비추었던 김박사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는 다시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이며 말하였다.     


아, 괜찮습니다. 김용광 씨 같은 분들이 또, 한번 자각이 되면 무섭거든요. 자, 용광 씨, 왜 그렇게 자신을 믿지 못하지요? 의지가 약할까 봐 두렵습니까? 저도 단 하루도 그런 날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은 저 자신을 믿었습니다. 저도 해냈잖아요. 용광 씨 정도면 분명히 더 잘하실 수 있습니다, 예!     

 그러나 김용광은 도저히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물었다.      


“김박사님의 미래는 자신이 손 닿을 수 있을 정도의 미래 아니었을까요? 박사님은 공부를 잘하셨을 겁니다. 물론 박사님이 손쉽게 지금의 성공을 얻으셨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가진 자원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공부였을 겁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노력하셨겠지요. 


 그러나, 박사님, 만일 박사님이 수험공부가 아닌 가령 수영선수로 금메달을 따려고 했다면요? 아니면 발레리노? 혹은 악기는 어떻습니까? 노래 잘하세요? 성악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처럼 성공하셨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김용광의 말은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모두 김박사의 낯을 살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자신의 의지 부족을 지금 누구 탓으로 돌리는 걸까. 김박사의 얼굴이 잠깐 딱딱해졌다. 


 지금까지 김박사의 성공에, 김박사가 제시하는 성공의 비밀에 이렇게까지 따져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사람은 내가 나의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는데, 이렇게 하면 자기만 손해인 것을 모르나? 지금 남들이 모르는 시.크.릿을 알려주겠다는데, 자기 돈과 시간을 투자해 가면서 무슨 소동이람. 김박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성공을 못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의심을 하고, 탓을 하고, 핑계를 댄다. 늘 무슨 이유가 많다. 오늘은 일이 힘들고 내일은 마음이 힘들다. 강력한 자기 확신으로 멘탈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안 될 것을 먼저 생각한다. 그들은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또 비참한 삶을 살 뿐이다. 이들은 구제해 주려는 손도, 지금의 김용광이 그러하듯이, 내친다. 그리고 또다시 자기는 어쩔 수 없다고, 이 세상이 이런 것을 어떻게 하냐고 남 탓, 세상 탓을 한다.     


 불쌍한 사람, 아니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성공을 두려워하고 있다. 늘 실패만 맛보았기 때문에 미리 실패할 준비를 한다. 항상 여지를 남겨두고 변명거리를 찾는다. 김박사는 독서실에서 만났던 한 고학생을 기억한다. 그는 항상 일찍 독서실에 자리를 맡았지만 와서 책상에 엎드려 자고, 열 한 시경 나와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한 시반 정도 돌아와 삼십 분 책을 보더니 다시 세시까지 책상에 엎드려 잤다. 그리고 다섯 시까지 두어 시간 공부를 하나 싶더니 또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일곱 시 정도 돌아와 한 시간 정도 책을 보다 또 엎드렸다. 그러면서 오늘은 뭘 해서 피곤하니, 내일은 어째서 집중이 안 되니 하는 말들을 주워 삼켰다. 월드컵 때는 월드컵이라, 한일전은 한일전이니 꼭 봐줘야 하니까 등등 그의 핑계는 정말 종류도 다양했고 찬란했다. 그러면서 늘 “내가 정신만 차리면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데”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김박사는 그를 보면서 실패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기는 육십 점짜리이고, 뭘 해도 이 육십 점을 벗어날 수 없는데 어떤 사유로 지금만은 제값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상황이 바뀌면 자신이 백 점짜리임을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고 굳게 착각하는 것이다.     


 김박사는 김용광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이렇게 나에게 쏘아대면서 자신이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정작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인데도. 좀 더 가진 내가 베풀어야지 어떻게 하겠나. 아량을 베풀자!      


용광 씨, 참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용광 씨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거머쥘 성공이 두려운가요? 아니면 당신은 이 갤러리아 포레를 신혼집으로 살고 싶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피상적으로 원하는 거지요. 그렇지요?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라고 했잖아요, 용광 씨.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기억하라고 했잖습니까. 이게 어렵습니까?     


 김용광은 피식 웃어버렸다.      


“박사님, 그게 아니잖아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의지나 노력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 그 말씀입니다. 사람이 각자 가진 것이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달라요. 그런데, 그냥 굳게 믿으면 된다, 진정 원하면 된다, 네가 노력하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의 인생을 전부 그 사람 탓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요? 박사님 말씀처럼 하면 이 세상 노숙자들은 전부다 의지박약아입니까? 모두 성공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냐고요, 아니면 지금의 모습이 그들이 진정 원하는 삶인 건가요?”     


“그만, 그만하세요! 제 이야기도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젊은 총각이 왜 이리 불만이 많아? 당신, 아직 젊잖아! 그러면 좀 나이에 맞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보다 못한 이연자가 끼어들었다. 정현은 갑자기 이 무슨 상황인가 한편으로서는 의아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서는 우습기도 하였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김용광의 말을 듣고 보니, 좀 바보 같아 보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 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똑똑하다는 생각도.     


 그러나 서수지는 좀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서수지는 이연자 옆에 딱 붙어서는 고개를 계속 끄덕이다가 갑자기 으앙 하고 울어버렸다.     


“용광 씨도 할 수 있어요. 박사님 말씀만 믿고 따라와 보세요, 두려워하지 말고요. 저도 사실 긴가민가하는 때도 있었지만 늘 마음을 다잡고 거울 앞에서 연습했거든요? 기자시라면서요, 그럼,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실 거잖아요. 무조건 한번 믿어보세요, 네?!”     


 김용광은 이연자와 서수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고.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저는 오십 프로 환불을 해 달라고 말했다. 계좌번호는 제가 박사님 핸드폰으로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김영광은 나가버렸다.     


 남은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은 묵묵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이연자가 침묵을 깼다.     


“박사님, 제 것도 읽어요?”      


 김경일 박사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니요, 저에게 두고 가십시오. 제가 남아서 찬찬히 보겠습니다. 잘하셨겠지요, 중요한 것은… 잘 아시다시피 이연자 씨 가슴으로 진정 원하고 그 상황을 세밀하게 그려보면서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정현을 비롯한 세 사람은 조용히 짐을 챙겨 김박사의 집을 나왔다. 기분이 착잡했다. 열심히 새로운 모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이게 뭐람. 나는 정말 새로운 인생, 아니 내가 꿈꾸는 인생으로 한 발 짝 더 다가가고 있었는데, 저 사람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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