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어떻게 다들 지난 시간 잘 보내셨나요?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선택받으신 여러분은 잘 이겨냈을 거라 믿습니다. 저번에 미래를 함께 공유하지 못한 우리 연자 씨, 오늘 가장 먼저 시작하실까요?
이연자는 약간 풀이 죽어있었다.
“박사님, 저는…. 저는 우리 큰애와 서로 마주 보고 왜 시험성적이 안 오르는지 찬찬히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어요. 저도 조용하게 애를 보면서 미소 짓고, 무엇이 힘드냐, 엄마가 어떻게 도와줄까 위로도 하고, 너는 잘하고 있고 잘할 수 있다고 격려도 해주고 싶었어요. 우리 애라서 그런 게 아니고, 머리는 좋거든요. 중학교 때까지는 제법 잘했거든요. 초등학교 때 고등수학도 곧잘 풀던 아이예요, 저희 큰 애는. 그런데…”
이연자는 한번 킁 하고 코를 풀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교수님, 도통 저랑 말을 안 해요. 말은커녕, 눈도 안 마주쳐요. 오면 곧바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려요. 교수님, 이것 보세요! 저 교수님 말씀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진짜 정성스럽게, 정말 미래가 펼쳐진다 생각하면서 썼어요. 그런데 왜 이럴까요?”
결국 이연자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한순간도 간절하게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의심도 없었다고 이연자는 울부짖었다.
김경열 박사는 그런 이연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준엄한 목소리가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연자 씨, 과연 그랬을까요? 당신이 지난 시간, 정말 한 터럭의 의심도 없이 미래를 기억했더라면, 당신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기쁨에 충만한 상태였겠죠. 그런데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세요! 의심과 불안, 회한에 가득 찬 모습이잖아요! 정말, 단,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지금도 당신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했잖습니까! 당신은 한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까?
“아, 아… 저는 정말 믿으려고 했어요, 교수님! 솔직히 가끔 제대로 하는 걸까, 이게 될까 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거 봐요! 매 순간순간이 모여서 당신의 미래가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대체적으로 믿었다고 하지만, 그 의심의 순간이 차곡차곡 쌓였을 것입니다. 당신은 역시 부정의 늪에 빠져버린 거지요. 즉, 당신은 진정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박사님, 저는 정말 진정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어요, 믿어주세요, 진심이에요!”
믿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고 당신입니다, 이연자 씨. 아…. 안타깝군요, 그렇게 믿음이 약했습니까? 왜, 왜 믿지를 못합니까! 당신은 결국 자기 확신이 없었던 거예요. 아니면, 당신은 그만큼 절박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 공부가 한국에서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으면 유학 보낸다는 이런 안이한 생각을 한 것 아닌가요? 정말 안타까워요. 그냥, 딱 뚜껑만 열면 되는데, 그것을 못 참고 딴 곳으로 간단 말이야! 그러면서 또 한탄하고, 푸념하고, 원망하지! 긍정, 이 긍정의 에너지를 찾으란 말이야, 당신 안에 있는!
포효하며 윽박지르는 김박사의 모습에 모두 겁을 먹었다. 그 조용하고 인자한 미소를 짓던 김경열 박사는 어디 간 거지? 정현은 이연자의 등을 쓸어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좀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세요, 괜찮아지실 거예요.
김박사는 자기 모습에 겁을 먹은 세 명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하였다.
아, 여러분,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을 했군요. 여러분에게 시크릿을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앞서서 그만…. 연자 씨, 놀라셨어요? 자, 자, 연자 씨 안에 있는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를 생각해 보세요. 연자 씨가 그 에너지의 주인입니다. 우주보다 더 큰 긍정의 에너지가 연자 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진정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한 발짝씩 가시면 되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자, 그럼, 이제 환기도 할 겸, 우리 정현 씨의 이야기를 공유해 볼까요?
정현은 지난 이 주간의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한 과장과는 이제 둘이 농담도 하고, 같이 커피숍도 가는 사이가 되었다. 정현 스스로도 아, 이게 정말 믿는 대로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것이 긍정의 힘 또는 신념의 힘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가슴이 충만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세상이 자기를 향해 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특히 지난 목요일 저녁은 한 과장으로부터 똑 부러지게 업무를 처리한다는 칭찬도 들어서 더욱 우쭐해진 날이었다. 대만의 해외현지법인과는 이야기가 잘 되어서 기대출해 준 대부금은 반은 지분투자로, 반은 원금에 엎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한 과장과 정현은 관련 계약서를 검토하고 대만 현지법인 사람들과 콘퍼런스 콜도 하면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딱 두 사람이 함께 콤비가 되어 움직였기 때문에 정현은 둘이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체감이 좋았다. 모든 일을 마치고 둘이 같이 마시는 맥주도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지지난 화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혹시 자신들이 놓친 것은 없나 꼼꼼히 회사 내부자료를 검토하던 정현은 오 년 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료에는 전임자가 “외국환은행 앞 해외직접투자 신고 절차 주의! 놓치기 쉬움!”이라는 문구를 크고 붉은색으로 표시한 글귀가 있었다. ‘주의’에는 두 번이나 밑줄도 그어져 있었다.
정현은 지분투자를 신고하는 것은 잘 알고 있고 절차대로 잘했다고 자신했었는데 그럼에도 혹시 또 자신이 놓친 것은 없는지 걱정되었다. 한참 한국은행 사이트 등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정현은 문득 연체이자를 원금에 가산하는 것도 신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정현은 한 과장을 찾아갔다. 혹시 이것도 신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하고 묻는 정현의 말에 한 과장은 자기가 지금까지 해외투자 건을 여러 번 해 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때 T/F 팀장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한 과장은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 팀장님, 우리 정현 대리가 정말 일을 꼼꼼하게 잘해요. 제가 지금까지 여러 번 T/F를 해 보았지만, 저에게 먼저 뭘 놓친 것은 없나, 체크해 보라고 한 사람은 정현 대리가 처음이에요. 물론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요! 재무팀의 인재네요, 인재!”
“아이구, 우리 정현 대리 잘하는 것 이제 알았어? 정현 대리가 곧 정현 과장이 될 거야! 아, 내가 너무 성급했나? 하하하. 그리고 두 사람은 이번 주 주말 껴서 목, 금 2박 3일로 대만 출장 다녀와. 마무리해야지! 내가 양보한다, 두 사람에게. 하하하”
T/F 멤버들 모두가 한 과장과 정현을 둘러싸며 박수를 쳤다. 아니, 둘이서만 가도 되는 거야? 정현 대리, 조심해! 이런, 이런, 정현 대리 얼굴이 확 폈네? 껄껄껄. 정현은 사실 처녀총각인 둘을 엮으려고 하는 T/F 분위기를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고 이것이 싫지 않았다. 한 과장님과 출장이라니! 그리고 정현 과장? 나, 정말 승진하는 건가? 정현은 기쁨이 차올랐다. 같이 들어온 차주현이 과장을 먼저 달아서 속이 한참 상했던 정현이었다. 그런데 김경열 박사의 이 기적의 세션을 듣고 나서 정현의 희망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었다. 정현은 오늘도 가서 양장지에 자신의 바람을 또 한 자 한 자 써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정현이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어느덧 눈물을 그친 이연자는 부러운 듯 정현을 쳐다보았다. 김박사는 그것 보라고, 정현 씨의 안에 있던 긍정에너지가 폭발한 것이라고, 이것은 자신을 만나기 전부터 정현 씨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힘이라고 했다. 자신은 그저 촉매제에 불과했을 뿐이라며 이러한 촉매제의 역할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고 김박사는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서수지를 바라보았다.
서수지는 지난 세션에 이어 자신감이 충만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된다는 강한 믿음, 미래의 기억을 통해 얻은 에르메스 버킨백을 옆에 두고, 서수지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박사님, 저는 이번에는 토익 900점을 제 미래로 기억하기로 했어요. 아 요새 다들 영어를 너무 잘해서 뭐 900은 금방 넘는다던데…. 보세요, 저는 이렇게 또 매일 세 번씩 집중해서 토익 900, 토익 900 이렇게 써 갔다니까요!”
김박사는 꼭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오늘 다들 벅찬 경험을 한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자, 이런 식으로 우리 남은 세션도 잘해 보자는 말로 네 번째 세션이 끝났다. 다들 함께 나오는데 이연자의 얼굴만 유독 어두웠다. 그녀는 또다시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누군가 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현은 한참 타오르는 자신의 긍정에너지가 이 여자로 인해 사그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박사님 말씀대로 이 여자는 부정의 늪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수지는 진작에 저 앞으로 가버린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