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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OH Oct 21. 2024

제5세션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느덧 저희 프로그램도 절반을 넘어왔습니다. 조금씩 달라지고 나아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 제가 참 이 길을 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한 분 한 분께 감사합니다. 우리 지금처럼 잘해 나갑시다! 우리 정현 씨부터 시작해 볼까요? 정현 씨의 러브라인 너무 궁금하지요, 여러분?!     


 정현의 머릿속에 지난 이 주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과장과 함께 다녀왔던 대만 출장. 업무는 사실 금요일 오전으로 어느 정도 끝이 나고, 나머지 50%를 투자한 대만 쪽 모회사도 한국 쪽 모회사의 지원을 크게 받아들여 앞으로 수주물량을 두 배 이상 늘려주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뿌듯한 마음으로 팀장님께 업무보고를 마치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 과장은 오늘이 대만에서 마지막 날이니만큼 함께 야시장을 가자고 하였다. 휘황찬란하게 켜진 가로등들. 각종 길거리 음식 매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둘은 코코 음료수라는 곳에서 패션후르츠 버블티를 사고, 띠과쵸우라는 치즈볼처럼 생긴 간식도 먹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한 과장은 우연인 척 정현의 손을 잡았다. 정현은 순간 놀라 한 과장을 쳐다보았으나 한 과장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길거리 가판대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정현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이 기분 좋게 출근한 월요일, 사무실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정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T/F 팀장은 굳은 표정으로 둘을 불렀다.      


“두 사람, 이리 와 보게. 두 사람 출장 간 사이 이런 통지가 왔어!”     


 팀장이 내민 서류에는 ‘과태료 부과 예정 통지’라는 제목과 함께 ‘금번 귀사의 해외현지법인 지분변동 및 기대부 내역 변경에 대한 보고누락 건과 관련됩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순간 한 과장의 얼굴이 파래졌다.      

“아, 아닙니다. 팀장님,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정현 대리, 내가 이거 잘 신경 쓰라고 하지 않았나? 설마 신고 안 한 거야, 지금?!”


 “아니에요, 과장님, 저 시키신 대로 다 했어요! 그리고 저번에 제가 이자가 원금 가산되는 것은 혹시 ….”     


 한 과장은 정현을 쏘아보며 말을 잘랐다.     


“내가 급하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더 챙겼어야 하는데…. 일단 저에게 맡기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일단 한 과장이 책임지고 해결해 봐. 다 잘하고 마지막에 이러면 서로 피곤해지잖아, 알지? 그리고 안대리가 아직 일이 서투르니까 좀 관리 잘하고!”


“예,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훈련 잘 시키겠습니다, 충성!”     


 팀장은 한 과장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정현은 순간 너무 화가 났다. 모든 것이 내 탓인가? 내가 그때 말했잖아? 지금 무슨 상황인 거지? 정현은 너무 억울해서 한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저 잘못한 거 없어요. 지분투자 신고는 제대로 했구요, 그때 제가 대부투자 쪽도 대상이 아닌가 했더니 과장님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자신에게 처음으로 대드는 정현의 모습에 한 과장은 처음에는 놀란 것 같더니, 잠시 후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말하였다.     


“안대리는 그냥 누가 아니라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믿나 보지요? 일을 그런 식으로 해요, 원래?”


“아니, 제가 그런 것이 아니구요, 과장님이 할 필요 없다고, 그때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이…. 본인이 의심스러웠으면 끝까지 파봐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 대도 곧이곧대로 믿을 양반이네, 지금 보니. 나는 말이야, 프로의식 없는 사람이 제일 싫어. 사람이 밥값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정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인가? 주말에 잘 들어갔냐고 상냥하게 안부 문자를 하던 사람이 일이 터지니까 이렇게 되는구나.   

  

“됐고, 이거나 해결합시다! 어디 보자, 과태료 금액이 얼마야? 이백만 원? 별거 아니네, 나 옛날에는 칠백만 원이었는데, 안대리, 복이 많네. 거기다 사수도 나고 말이야. 내가, 어디 보자, 그래, 열심히 하는 안대리 봐서, 오십 낼게! 원래 이거 안대리가 다 내야 하는 것 알지?”


“제, 제가 그럼 배, 백오십만 원을 내라는 말씀이세요? 제가요?”


“아니, 지금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사람이 그렇게 안 봤는데 안대리, 많이 실망인걸? 돈이 그렇게 아까워? 나 때는 내가 다 냈어, 그 어떤 상사도 지금의 나처럼 내가 낸다, 이런 말 하는 사람 없었다. 팀장 그냥 나가는 거 봤으면서도 지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기야?”     


 정현은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아, 한 과장이란 인간은 저런 사람이었구나. 내가 그 인간을 믿지 말아야 했는데. 직접 내 눈으로 확인했어야 하는데. 아니, 이게 진짜 내 잘못인가? 어디서부터 내가 잘못한 걸까?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한 때? 그 사람 말을 믿은 때?     


 정현의 말이 끝나자 이연자와 서수지는 안되었다는 듯이 정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김 박사는 갑자기 짝짝 크게 박수를 치더니 정현을 보고 말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현 씨.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뭐다? 긍정적으로 미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에너지가 여러분을 잠식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정현 씨가 지난 일에서 새겨야 할 미래의 기억은 바로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한 과장과의 여행이 성사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알곡만 남기고 쭉정이는 버린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좋은 미래의 기억으로 무엇을 고를지만 생각하세요!”     


“그런데요~, 박사님, 저는 계속 ‘토익 900’ 공들여 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나는 토익 900점이다’ 이렇게 미래를 기억했는데, 왜 토익 900이 안 돼요? 아, 진짜 개짜증이야!”


 서수지가 토익성적표를 확 던지면서 입을 열었다. 버킨백은 그냥 되었는데, 이것은 이상하다고, 이럴 수는 없다고 서수지는 소리를 질렀다. 서수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정현은 자신의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김박사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하였다.     


수지 씨, 수지 씨의 감정은 이해합니다. 자신의 미래가 기억하는 대로 오지 않으니, 당황하셨지요? 그러나 우리 먼저 생각해 봅시다. 수지 씨는 애초에 왜 토익 900을 받고 싶어 했을까요?      


 서수지는 무슨 이런 황당한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제가 왜 필요하냐고요? 지금 그게 포인트가 아닌데요? 굳이 답하자면 저는 대학원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영어점수가 필요하다고요!”     


 김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그런데 그럼 수지 씨가 바라는 미래는 토익 900이 아니고, 대학원생이 되는 것이네요? 그런데 왜 계속 토익 900을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아니 대학원 가려면 토익 구… 지금 제가 주문을 잘못 걸어서 그렇다는 말씀이에요, 박사님?! 아, 대학원생 서수지 이렇게 썼어야 하는 거구나!”     


 서수지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듯 얼굴이 환해졌다. 지난 시간 나는 뭐 했던 거야! 아, 시간 낭비했잖아! 서수지는 제 머리를 콩콩 때리며 아, 박사님, 괜히 박사님한테 화내서 죄송해요, 제가 주문을 잘못 걸고서는 또 괜히 남 탓했다고 우물거렸다.     


괜찮습니다, 수지 씨. 비단 수지 씨뿐만이 아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하거든요. 그래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자신의 신념이, 자신의 믿음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야 하고 매 순간이 이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를 여러분이 기억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현의 마음속에서는 조심스레 의문이 일었다. 


 토익 900을 바라는 것이 진정 원하는 목표가 아니어서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토익 900을 원하면 토익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무슨 주문을 걸듯 토익 900을 정자체로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니라…. 김용광이 있었다면 날카롭게 지적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를 말로 표현할 용기는 없었다. 


 그때였다. 오랜만에 이연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박사님, 저는 어떻게 된 걸까요? 박사님 말씀 듣고 제가 정말 열심히, 간절히 바라고 했더니, 둘째 아들은 확실히 전보다 저와 더 가까워지고 장래희망 이런 이야기도 같이 해요. 자기도 서울대 가보고 싶다고 노력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저 정말 울 뻔했어요. 그런데 우리 큰 아들은 아직도 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를 않아요. 급한 쪽은 오히려 큰 애인데, 제 마음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아요. 저에게 좀 길을 알려주세요!”     


 김박사는 갑자기 화이트보드에 무엇인가를 크게 썼다. 


“There is a space 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자극과 반응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외부적인 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당신이 그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외부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당신의 판단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말입니다. 연자 씨, 저번에도 제가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외부의 자극, 이 스.티.뮬.러.스가 큰 아들이라면 그 리스판스, 반응은 당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들 탓을 하지 마세요. 당신이 괴로움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럼, 제 탓이에요? 제가 이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에요?”     


 그렇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는 김박사의 눈빛에 이연자는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엄청난 반발심이 생겼다. 왜, 왜 이게 내 탓이야? 그럼, 아들이 속상한 말과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내가 내 반응을 결정한다고? 그럼, 내가 좋은 반응을 선택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해서 이런 좌절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이연자는 갑자기 화가 났다. 누구나 자기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자식이 괴롭게 하는데, 아,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이런 반응을 하란 말인가?      


 정현의 얼굴에, 이연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김경열 박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아나스타샤 공주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굳게 믿으면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굳은 신념의 힘으로 미래를 기억하면 그대로 된다고 했었는데. 또 이제는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닌, 수단에 그치고 마는 것을 원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좌절하는 것은 그렇게 좌절하기로 한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김박사는 계속해서 자기 안의 긍정에너지를 깨워라, 미래는 너의 것이다 등등의 말을 읊조렸지만 이연자나 정현의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오로지 서수지만이 ‘다음에는 대학원생 서수지’로 쓰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정현은 서수지의 그런 단순함이 부러웠다. 저것이 젊음이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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