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1
비타믹스 (Vitamix) 사의 푸드프린터기에, 얼마 전 발매된 쿠키 카트리지가 설치되었다고 해서 탕비실은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즉석에서 카트리지에서 원료를 뽑아내어 생화학 합성기를 통해 쿠키의 재료를 만들어 내므로 꽤 신선하다. 저장된 단당류 필름들이 다당류인 밀가루와 설탕으로 변환되고, 기본 지방산 분말은 걸쭉한 합성 버터부터 비건들을 위한 식물성 오일까지 폭넓게 재조합된다. 카트리지 속 아미노산 가지들은 계란의 흰자 성분이나 우유의 성분로 합성되어 쿠키에 들어간다. 각자의 기호에 맞게 함량을 조절하면 비스킷 같은 바삭함부터 브라우니 같은 부드러운 식감까지 꽤 다양하게 구현해 낼 수 있다.
프린터기 본체에 달린 노즐에서 사용자가 설정한 조합으로 재료를 쏘아내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 쿠키의 모양을 만들어 내고 나면 복합 열전달 기술로 3분 만에 따끈하고 포송한 쿠키를 구워 낸다.
"아직 식감은 좀 어색하네, 이게 입 안에서 부서지는 게 학실히(확실히) 인공적이야."
동료 스미스는 푸드프린터기에서 방금 구워져 나온 쿠키를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요즘 자꾸 정수리가 비어간다며 볼 멘 소리를 하는 그는 인상이 좋다.
“나 건강 검진받는 동안에 몸만 입원시키고, 나는 로마 갔다 왔잖아. 너도 그렇게 해.”
J가 이번 달 안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투덜대니, 그가 말했다. 스캐너로 한번 훑으면 대충 웬만한 병들은 다 사전에 확인되는데 굳이 아직까지 내시경을 하고 피를 뽑고 하는 식의 20세기 방식에 맞추느라 하루 온종일 병원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던 J는 귀가 솔깃해졌다.
“오 그랬었어? 그런데 해외여행하기엔 시간이 좀 빠듯하지 않은가?”
“예전처럼 비행기 타고 가는 것도 아닌데 뭐. 하루 정도 연차 붙이면 더 좋고."
스미스의 말대로 2040년에는 자기의 몸으로 직접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처럼 한참 전에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귀찮게 짐을 꾸리고 여권을 챙겨, 공항까지 가서 무거운 가방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젠, 간단하게 그 나라로 "영혼"만 보내면 된다.
한 천재적인 과학자가 '자아의 근간', '인간성의 원천'이 뇌에 있지 않고 피부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전까지만 해도 뇌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 같았던, 다만 너무 꼭꼭 숨겨져서 '이 폴더 안에 있어요'라고 아직 말 못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영혼이 신체 외부에 마치 '오오라'처럼 몸을 감싸고 있다는 '독립적인 전기적 데이터'라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어쨌거나, 전기적 데이터다 보니 사람들은 결국 몸에서 영혼을 분리해 내는 기술을 개발했고 2040년엔 드디어 메신저에다가 첨부파일 보내듯이 쉽게 간단하게 영혼을 인터넷으로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외국을 굳이 직접 자신의 몸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영혼을 쏘고, 도착한 곳에서 어디에다 담으면 되는 일이다. 마치 핸드폰의 유심을 갈아 끼우듯이.
마침 J와 스미스, 두 사람 옆으로 이른바 공기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휴머노이드'를 빌려 출근한 인도인 동료, 라지브(Rajiv)가 손을 흔들며 지나간다. 외양이야 누가 봐도 '인조인간'으로 보이지만, 걸음걸이는 상당히 인간미가 넘친다. 자기 자리에 가 털썩 앉는 모습은 영락없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어 진' 직장인이다.
영혼전송기술 덕분에 가정적인 라지브의 몸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인도 콜카타(Kolkata)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새로운 형태의 재택근무라 할 수도 있다. '나는 절대 인도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며 완강했던 그를 영혼만 이쪽으로 와서 일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회사가 겨우겨우 설득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스미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었다면 당장 가족과 헤어질 텐데' 라며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단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음, 해외여행은 생각도 못해봤는데 끌리네.”
몸은 검진을 받아야 하니 병원에 맡겨두고, 분리한 영혼만 여행을 다녀오라는 스미스의 제안에 J는 마음이 동했다. 몸에서 영혼을 떼내어 보내고 다른 곳에다 다시 담는 건 30분이면 충분하다.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그냥 날려버리는 것 같아 억울했던 검진날을 드디어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만으로도 J는 좋았다.
그때 J의 머릿속에 자기도 모르게 얼마 전 봤던 한 영상이 떠올랐다. 홀로 오토바이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억세게 운 좋은) 남자의 유튜브 채널이었는데 최근에 찾아간 곳이 꽤 특이한 곳이었다.
처음은 평범했다. 파란 하늘 아래 쨍한 녹차색 초원,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모습이 나왔다. 이번에도 또 유럽 어디겠거니 짐작하고 '곧 석조 건물들이 나오고 와인을 한잔 마시겠군' 하고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시커먼 분화구에 도착을 하는 게 아닌가.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간 전개에 '혹시 아이슬란드나 그런 곳인가?'가 싶어 화면을 돌려 다시 보니, 사내 주변엔 온통 키 작은 아시아인들 일색이고 일본어가 문득문득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웬걸, 무슨 오토바이는 또 그렇게 많은지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헬멧을 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썩 연관성이 크게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꺼번에 조합된 풍경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곳은 일본 남쪽 규수 섬에 있는 활화산, 아소산이라는 곳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아소산 동영상을 봤는데 신기하더라고. 거기로 가볼까···”
J는 그 억세게 운 좋은 사내처럼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했다. 비록 얼마 타지 못하고 내다 팔았지만 J도 오토바이를 몰아 본 적이 있었다. J는 요즘 와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상하게 오토바이를 한대 장만해서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소산?"
스미스가 J의 입에서 나온 낯선 장소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프린터기에서 만들어진 쿠키가 이빨 사이에 좀 끼이는지 연신 쓰읍-쓰읍- 하면서
"아아, 일본에 후쿠오카 쪽이구나! 그래 거기 나도 들어봤어. 구경할 거 많다고 하더라. 먹을 것도 많고, 쇼핑하기에도 좋다네?"
스미스가 자신의 핸드폰을 J에게 건내 준다. 그의 핸드폰엔 일본산 휴머노이드를 빌려 다녀온 사람의 블로그가 찾아져 있다. 일본산 휴머노이드는 폴리우레탄 재질로 매끈하게 외관을 둘러서 세련된 느낌이다. 이음매도 깔끔하게 숨겨 놓았다. 완전히 사람 같지는 않지만 라지브(Rajiv)가 여기서 빌린 휴머노이드에 비하면 훨씬 친밀한 분위기다. 가부키에 나오는 여성 배우같이 꾸민 얼굴도 꽤 다양한 표정을 자연스럽게 지을 수 있게 되어 있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여행자 뒤로 일본 여행의 전형적인 정경들이 담겨 있다. 아기자기하나 소꿉장난 같이 보이는 요리들, 오래된 목조건물들, 귀엽고 유아적인 일본의 캐릭터들, 하지만 J는 썩 감흥이 일지 않는다. 일본은 전통을 지키는 걸 자랑스러워하지만,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변화가 적다. 여행자도 "아직 환전을 해 가시는 게 좋아요." 라며 조언을 남길 정도다. J는 '후쿠오카나 오사카나 도쿄나 거기서 거기구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을 보다 보니 일본산 휴머노이드도 J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정작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는 가슴엔 커다란 모니터를 달아 놓아서 어색했다. 아마도 휴머노이드를 빌린 사람의 신원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일 것 같은데, 사람을 닮은 기계가 표정을 짓고 있고, 화면에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띄워진 것이 은근히 기괴했다. 징그러웠다. 일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리는 없겠지만 내가 누구요- 하고 표시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도 J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보통, 홀로그램에 나온 사람처럼 휴머노이드, 그러니까 기계에 영혼을 담았다. 기계는 비용이 저렴했고, 공유자전거나 렌터카처럼 어느 곳에서나 쉽게 빌릴 수 있었다.
초기 모델만 해도 '깡통 로봇에 갇힌 것처럼 행동이 굼뜨다'며 불평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젠 일상적인 행동들엔 딱히 불편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계다 보니 화장실을 찾을 필요가 없고, 배앓이를 하거나 몸살이 날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여행에 쓸 옷가지나, 세면도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장점이었다. 도둑이나 강도당할 염려도 없다. 굳이 사진기를 꺼내지 않아도 휴머노이드의 시각센서로 잡힌 풍경들을 저장하거나, 되돌려보기 할 수도 있고 장면을 확대할 수도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음식의 맛은 느낄 수 있되 먹고 소화를 시킬 수는 없어서 뒤처리(!)가 필요했고, 아무리 발전된 감각센서가 있다고는 해도 사람의 몸만큼 자연스럽고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다. 어떤 이들은 결국 기계를 통해 들어오는 감각인데 굳이 현지까지 가서 느낄 필요가 있냐고, 그러니까 메타버스에 구현된 '그 장소'에서 증강현실로 경험해도 충분하지 않으냐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계를 빌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그러니까 현지인의 몸을 빌리는 것을 택했다.
"요즘 휴머노이드가 엄청나게 좋아졌어. 난 로마에서 휴머노이드에 타고 있다는 걸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다니까”
가슴에 자기 얼굴을 띄운 일본 휴머노이드는 마뜩잖아서 타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던 J에게, 스미스가 말했다.
"흠, 그나저나 일본 휴머노이드는 가슴에 모니터가 달렸어."
"그러게, 저기에 우리 얼굴이 뜨면 좀 웃기겠는걸."
사진을 본 스미스가 킥킥댄다.
마침내 포스팅 끝에 아소산 후기가 나왔는데, 식상하던 다른 사진들과 달리 아소산의 풍경은 J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다.
누가 일부러 색깔을 칠한 것 같이 비현실적으로 채도가 높은 녹색의 초원, 그와 대조되는 검은 화산재로 이루어진 시커먼 안디솔(andisol) 토양,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고즈넉한 작은 오솔길,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봉우리들이 슬쩍슬쩍 비치는 풍경, 높게 자란 삼나무 아래에서 산책하는 사진을 보다 보니 비로소 J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진 아래에는 '다음번엔 꼭 직접 운전해서 아소산에 와보고 싶어요!' 란 글이 쓰여 있었는데, J의 눈엔 직접이란 말 앞에 ‘오토바이로’라는 글자가 빠진 것처럼 보였다. J는 갑자기 안달이 날 정도로 당장 저곳으로 찾아가고 싶어졌다.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서 검진 날짜가 잡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휴머노이드를 빌려서는 안 된다.
“음, 난 휴머노이드로 여행해 보니까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부른 게 너무 어색하더라. 걸어도 걸어도 하나도 안 힘든 것도 좀 그렇고···.”
J는 짐짓 휴머노이드는 왠지 끌리지 않는다는 투로 스미스에게 말했다.
“으음? 그건 차라리 장점인 거 같은데···. 하하 뭐 아니면 돈이 좀 들더라도 사람을 빌려야지.”
"그러게, 운전하는 것도 휴머노이드로는 안 되지 아마?"
"오, 직접 운전까지 하려고? 그럼 꼭 사람으로 빌려야 해."
"사실은 얼마 전에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모는 영상을 봤거든. 가슴이 두근두근했어."
J가 속내를 털어놓자, 동료 스미스는 씩 웃으며 사람을 렌털하려면 빨리 예약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푸드 프린터기에서 쿠키 하나를 더 구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