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2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J는 조급한 마음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근무 짬짬이 아소산과 오토바이를 타는 것에 대해서 검색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필이면 오늘 유독 일이 많았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데 홈 AI 시스템이 딸칵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 Hello James, what kind of music would you like me to play for you?
- J 님, 음악은 어떤 것으로 틀어드릴까요?'
메시지를 꺼버리면 됐는데, 급한 마음에 그것도 괜히 성가시게 느껴져서 대충 'shuffle'이라고 말했더니 천장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가 슬그머니 시작된다. 오랜만에 듣게 된 곡에 J는 가슴이 덜컥해서 J는 또 아소산 검색에 뜻하지 않게 방해를 받는다.
마음이 어지러워 쉬이 집중할 수가 없다. 자기도 모르게 J는 "아이참, 하필이면"라고 조용히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자체가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이나 된 일이라고 J는 느꼈다) 이 곡은 부인 엘리자베스가 폐암으로 죽기 전에 즐겨 듣던 노래다. 명반에서 굳이 이 곡만 반복해서 듣는 그녀가 J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자신에게 무어를 전하고 싶은 속뜻이 있나 하고 삐뚤게 생각해 짜증을 내기도 했었다. 자신의 남편이 자기가 죽고 난 다음(Rest of your life)에 어떻게 살지 (what are you doing)가 걱정되면 '죽지 않으면 될 거' 아닌가란 고약한 심보를 부렸다. 만약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면 세상에 남을 이에게 그리움이나 아쉬움의 흔적을 남기진 않을 거라는 매몰찬 생각을 했었다.
엘리자베스가 원했던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J는 여전히 홀로 지내고 있었다. 비록 하루하루를 모두 그녀로 채운 나날들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지만 (Let the reasons and the rhymes of your days, All begin and end with me) J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유일한 여자는 엘리자베스뿐이긴 했다. (All I ever will recall of my life Is all my life with you) 갑자기 자신을 홀아비로 지내게 만든 엘리자베스가 괘씸한 마음이 들어서 J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처량하니 좋으냐'라면서
그러고 보니 이젠 엘리자베스가 병상에 누워있던 광경도 제법 희뿌옇게 흐려졌다.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다만 오늘까지도 왠지 그녀의 체취와 표정, 그리고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정은 생생했다.
J는 머리를 흔들어 엘리자베스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노력했으나 곡이 끝나고서야 아소산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었다.
찾아보니 아소산은 지질학적으로 꽤 유명한 곳이었다. 수십만 년 전 최초의 화산활동 규모는 지구적으로 봐도 제법 큰 규모였다고 나와 있었다. 지금 '아소산으로 불리는 산악지형' 밖,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평한 지대와 그 너머의 둘레 산들까지가 그 시절 '아소산의 화산활동'의 영역이라 하길래, 지도에서 선을 그어보니 그 너비가 20~30km에 이른다. 꽤 큰 규모다.
지구 깊은 곳에서 밖으로 나온 마그마가 땅 위에서 식으면서 폭 꺼진 부위를 칼데라라고 부르는데 (J는 빵이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것을 상상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들며 생긴 곳이 지금의 아소시나 미나미아소무라 같은 도시가 되었다 했다. 화산재가 내려앉아 만들어진 비옥한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이 일군 땅이 대충 봐도 그 둘레가 100km는 가뿐히 넘었다. 그 과정을 상상하고는 왠지 신화적인 이미지가 떠올라 J는 자기도 모르게 엄숙한 기분이 되었다.
다만, 어마어마한 규모로 폭발은 했으나, 지구의 중력을 이기기는 힘들었는지 돌출되어 남은 부위는 그리 넓지 않았고 (요즈음 아소산이라고 불리는 곳은 이 지역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라 해 봤자 1,600m 도 채 안 되니 썩 높다고 하기도 뭣했다. 엄연히 활화산이라 불리긴 했지만, 지금까지 활동하는 화구는 나카다케 화구 하나뿐이어서 '겨우?'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아소산의 전성기는 지난 것이다. 그래서 관광지로서도 그렇게까지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여행 일정에 목적지로 당당히 올라 있는 장소라기보다는 기껏해야 경유지 정도 되는 곳이라 봐도 될 것 같았다. 좀 돌아가긴 해도 활화산의 연기도 볼 겸 쿠사센리 휴게소쯤에 잠시 들러 풍경을 구경하고 사진을 남기는 정도로 말이다. 일정이 촉박하면 아쉽지만 '우선적으로' 제외되는 곳이랄까. 외국인 중에서 아소산'만' 보러 가겠다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근처에서 가장 큰 아소시도 인구가 2만 명 남짓 되는 평범한 일본의 소도시로,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곳이 아닌 약간은 쇠락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J는 반드시 현금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탄다고 치면 아소산의 관광지로서의 위상은 달라졌다. 아소산은 일본 라이더들에게는 북해도와 더불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히는 여행지 중 하나라고 소개되고 있었다. 아소산에 대해 찾아본 자료에서 오토바이를 빼 놓은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아소산만 구경하는 관광을 간다고 하면 '굳이?'라는 반응이겠지만 아소산에 오토바이를 타러 간다고 하면 매우 좋은 선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J는 일단은 아소산엔 가보고 싶었다. 본인의 사정에 적당한 여행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딱히 예약을 서둘러야 할 관광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 준비 없이 내일이라도 훌쩍 떠나도 될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스미스가 갔던 로마를 간다 치면 당장 오늘부터 어디를 들릴지, 뭘 먹을지 준비를 해야 안심이 될텐데, 아소산은 그런 것 없이 그냥 훌쩍 떠나도 왠지 자신을 받아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요하고 지루해서 더 자유로울 것 같다는 기대가 들었다.
그리고 오토바이와 긴밀하게 연결된 여행지라니, J는 아무래도 아소산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장소같다며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다른 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오토바이 정도의 일탈은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며 용기를 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렇게 '늙어만'가다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동영상의 그 억세게 운 좋은 사내가 J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J는 '아소산에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타'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사진들에 오토바이가 죄다 20년은 됨직한 구형 모델들뿐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물건을 오래 써서 그런 건지, 빈티지 모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소산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J의 눈에 익숙한, 반가운 그때 그 모델들이다. 거기에 하필이면 홈 AI도 J가 별 조작을 하지 않고 놔뒀더니 주구장창 '그때 그 노래'를 늘어놓고 있었다. 토니 베넷부터 베리 매닐로우, 린다 론스태트로 이어지는 플레이리스트는 가만히 놔두면 셀린 디옹도 아니고 엘라 피츠제랄드나 프랭크 시나트라로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다.
한때는 전 지구적으로 알아주던 화산이었으나 이젠 들러주면 감사한 관광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때 그대로인 보수적인 나라의 발전이 더딘 소도시,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을 오토바이, 거기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라니 이젠 구닥다리로 취급받는 것들의 조합에 자기를 빼놓으면 섭섭해질 것 같았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우연히 알게 된 아소산이, 왠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운명의 장소로까지 여겨졌다. J는 그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타게 됨으로써 자신의 갱년기가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에 빠져들었다. 혼자 있으면 더 처량해지는 기분이 들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신의 음악부터 틀어달라고 부탁하던 날들이 아소산에서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순간 해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따지고 보면 여기서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타봐도 될 일인데도, J는 어느샌가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거창하게도) 자신의 숙명인 양 느끼고 있었다.
"그래, 아소산을 가서 오토바이를 타자."
거창한 숙명의 과업을 해내려면 일단 일본에서 운전할 수 있어야 했다. 최소한의 이성을 가까스로 회복해, 굳이 남의 몸을 빌려서까지 오토바이를 탈 필요는 없다 생각했지만, 렌터카라도 빌려 여유롭게 다니려면 휴머노이드가 아니라 '사람'을 빌려야 했다. 예상한 대로 일본도 휴머노이드는 운전이 금지되어 있었고 아소산은 대중교통으로 편히 다닐만한 곳이 아니었다.
J는 휴머노이드를 빌려서 여행은 몇 번 해봤지만, 자신의 영혼을 남의 몸에 집어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꾼 몸으로 지내다가 전쟁이라도 나면 그 몸으로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기가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몸이 갑자기 죽으면 자신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등등 별별 걱정이 다 들어서 결국 잠까지 설쳤다.
"휴머노이드에 달린 것과 비슷한 영혼 유지장치를 줄 거야 아마. 그것만 항상 잘 가지고 있으면 영혼은 무사해."
다음 날, 동료 스미스는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다가 사고가 나면 영혼이 어떻게 되냐는 J의 질문에 별일 아니란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줬다. J는 괜히 머쓱해졌다
"반대로 자기 몸을 빌려줬다가, 빌린 사람이 자기 몸을 죽여버려서 돌아갈 곳이 없어진 영혼들 처리가 골치 아프다고 하잖아. 자기였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니 이건 뭐 뾰족한 수가 없는 거 같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J가 되물었다.
"아니 왜, 얼마 전에 뉴스로도 나왔잖아. 나이가 많은 백만장자가 젊은 운동선수의 몸을, 큰돈을 들여 빌리고선 신나는 마음에 그 선수도 처음 해보는 스카이다이빙 같은 것까지 해버리다가 그 운동선수의 몸을 죽여 버린 거야. 그때 그 선수가 몸을 보상해 내라고 소송하고 그랬잖아."
J도 언뜻 그 뉴스를 본 것 같았다. 이젠 모니터 안에서 나올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돼버려,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운동선수를 보며 참 안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 선수는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J는 그 뒤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때 나이 많은 부자 쪽 변호사는 ’이건 자연사‘라고 억지를 부려서 엄청 욕 얻어먹었지. 어차피 위험한 운동을 하다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수명이 짧아질 거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폈다가 재판도 말아먹었잖아."
"그래서 그 선수는 어떻게 되었어?"
"그 뒤로 메타버스에서 지내면서 가끔 휴머노이드를 타고 TV 같은데 나오는 것 같던데?"
”그런데 한참 된 일 같은데 그렇게 오랫동안 메타버스에서 지낼 수 있어? “
J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자기가 죽은 게 아니라고 하니까 메타버스에서 내보낼 방법이 없잖아. 원래는 길어야 한 달 이내고 그 뒤엔 일괄적으로 삭제해 버릴걸?“
J는 문득 자기가 빌린 몸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영혼은 블랙박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유지장치에 잘 보관이 될 테지만 몸은 아직 그런 게 없었다. 심지어 지금 자신은 빌린 몸으로 오토바이를 타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갱년기를 타파하든 숙명의 장소든 간에 남에게 해코지할 수는 없다.
J가 걱정하는 걸 눈치챘는지 스미스가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사실 사람을 빌릴 수만 있으면 훨씬 좋기는 해.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그리고 원래 그 몸이 잘하던 건 영혼이 바뀌어도 그대로 그 능력이 유지되기도 하니까 얼마나 좋아. 그 백만장자야 운동선수가 안 해본 일 억지로 하다가 사고가 난 거고."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사람을 빌리면 제일 좋은 건 말이야. 그 몸이 익숙한 일들은 우리도 자연스럽게 해 볼 수 있게 만들어 주거든. 예를 들면 물에 뜨지도 못하던 사람도 수영선수의 몸에 들어가면 '웬만하면' 자기도 모르게 수영을 할 수 있게 돼. 그것 때문에 일부러 딴 사람 몸을 빌리려는 사람들도 많아."
"아 그래?"
"응, 그러니까 너도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사람으로 빌려, 그 사람 몸이 오토바이 타는 데 익숙하면 네가 자신 없어도 알아서 몰게 될 거야. 그러니까 무의식중에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느낌? 그 사람이 타던 오토바이까지 빌릴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여튼 걱정 안 해도 돼."
스미스는 J의 어깨를 툭 치며 걱정하지 말고, 얼른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사람이나 찾아서 빨리 예약해 두라고 조언해 주었다. 다시 한번 '돈이 좀 들 테니 각오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