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체육부장의 힘 있는 응원에 학생들은 다들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우승을 향한 열망이 간절해서였을까. 피구 게임 우승, 줄다리기 준우승으로 우리 반은 아슬아슬한 몇 점 차이를 앞에 두고 종합 우승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학년별 달리기 뿐이다.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잔뜩 흥분 한 우리 반 학생들이 저마다 신나게 체육대회를 즐기고 있었다.
특히 교생 선생님은 우리 반의 시끄러운 녀석들 무리에 둘러싸여 많은 응원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우리 반의 피구 에이스이자, 언제나 시끌벅적한 그녀가 장염으로 인해 출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우승을 장담할 수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승리를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잔뜩 사기가 오른 우리 반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도 않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걱정하는 내게, 아까 피구 게임에 대신 출전했던 그녀가 살며시 다가왔다.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저랑 같이 뛰실래요?"
의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녀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저 달리기는 잘 못하지만, 그래도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평소에 늘 얌전하고 다소 의욕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한 번 해보고 싶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자원해 줄 줄이야. 나는 이 동화 같은 실화에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공, 실패, 우승, 준우승 이런 것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자가 즐기며 하는 것, 하나 되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체육대회 본부로 가서 선수 명단을 교체했다. 그리곤 아쉬워하던 또 다른 그녀에게 들러 바통 터치에 대한 비법도 전수받았다.
" 어제 교생선생님이랑 나랑, 담임선생님이랑 진짜 연습 많이 했거든? 그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저렇게 했더니 진짜 초고속으로 할 수 있었어. 내 몫까지 잘 부탁해."
장염으로 아픈 배를 부여잡은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설명에 열심이었다. 그 얘기를 경청하는 또 다른 그녀는 두눈을 반짝이며 한마디 한 마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수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고마워. 나 대신 피구랑 계주랑 자원해 줘서. 내일 나 아픈 거 나으면 떡볶이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그렇게 또 하나의 우정이 생겨나는 것을 목도하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어수선하고 다소 들뜨는 이때, 아직 대화를 잘 나눠 보지 않은 그들이 이렇게 하나로 움직이며 마음을 모으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정들과 대화들이 솟아나는 것이야 말로 이 체육 대회가 갖는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나와 그녀, 교생선생님은 출발 라인에 섰다. 앞에 몇 명의 2학년 대표 주자들이 뛴 후 우리 셋 중에 첫 주자는 그녀였다. 곧 그녀의 차례였다. 우리 반 친구들은 한 마음으로 소리 질렀다. 앞의 주자가 거의 20미터 정도 되는 간격으로 뒤쳐져 들어오고 있었다. 곧이어 바통을 받은 그녀는 전력을 다 해 질주했다.
"와아!!!!!!!!!!!!!"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그녀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바통을 이어받을 준비를 했다.
"아 어떻게 해!!"
바통을 넘겨받는 연습을 하지 못해서일까. 내 손으로 넘어오던 바통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앞의 주자는 저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서둘러 바통을 주워 받고 다시 힘차게 내달렸다. 서툰 내 발걸음을 응원하듯 학생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며 힘을 불어넣어 줬다. 멀어진 간격을 좁히진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체육 전공의 교생선생님이 마지막 주자로 대기하는 모습이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였다.
"꺄아아아!!!"
이번엔 정확했다. 나와 페이스를 맞춰 바통을 이어받은 교생선생님은 정확한 자세로 빠르게 내달렸다. 흡사 전광석화 같았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1미터..! 그녀는 빛의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선생님!!!! 힘내세요!!!!"
결승선 앞에 다 닿았을 때까지 그녀는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발자국 차이로 선두 주자의 다음으로 들어왔다.
"와!!!! 준우승이다!!!"
우리는 그렇게 빛나는 준우승을 거 뭐질 수 있었다. 기뻐하는 학생들과 우승을 코앞에서 놓쳐 아쉬워하는 학생들을 다독이며 상장과 상품을 수여받고 교실로 들어왔다.
"얘들아~! 오늘 수고 많았어!"
나의 격려에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다들 즐거워 보였으나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준우승을 하고도 뭔가 흥이 나지 않아 하는 반 친구들을 앉혀놓고 잠시만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피곤하지? 딱, 세 문장만 말하고 종례 할게."
"네..."
" 우리 오늘 우승이 목표였잖아? 그럼 우리 오늘 성공했는 거야? 실패했는 거야?"
뜻밖의 내 질문에 아이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런 가운데 군데군데에서 대답이 나왔다. 실패요, 우승 실패했잖아요. 그래도 준우승이 어디예요. 아냐 목표 달성은 못했잖아. 실패는 실패지. 군데군데에서 볼멘소리도 흘러나왔다.
나는 칠판에 커다랗게 성공 VS 실패라고 썼다. 뭐야? 뭐 쓰는 거야 담임선생님 또?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성'자를 잠시 노려보고 그 옆의 글자들을 다 지워버렸다. 대신 옆에 크게 '장'이라고 썼다.
성장.
"인생이 성공과 실패만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 오늘 많이 성장했습니다. 고생했어요, 푹 쉬세요!"
와 성장이래, 그래 성장, 아이들은 그제야 맘 편히 웃어 보였다. 승부에 승패만 있거나 세상에 성공과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이 도전하며 더 크게 성장할 것이다. 칠판의 두 글자를 바라보며, 나와 교생선생님은 함께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