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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바다 Oct 15. 2024

김선배의 기일

그 남자의 여자


이승에서 한 생애를 가난하게 살더니 가엾은 그대의 넋은 오늘도 구천에서 끼니를 구걸하겠지.


오후 2시.

금빛 모래알 이어진 강변에 순백의 국화 한 송이 내려놓고 술잔 없이 술을 마셨다. 짧았던 그대의 이 분말되어 뿌려지던 그날처럼 강변의 억새풀 언덕에는 오늘도 텅 빈 바람뿐이더라.


세상이 아무리 좆같아도 디스 담배와 진로 소주만 있으면 하루 사는 건 일도 아니라던 김선배.

뼛속까지 유화물감이 스며들어 내쉬는 한숨에서도 정물화가 그려진다던가.

가난을 신분증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김선배가 그림 때려치우고 빚내서 고깃집을 했는데 그것도 망하고, 마누라마저 주방장 놈과 눈이 맞아 단풍 구경 갔던 날, 신호등이 점멸하는 새벽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로 비명횡사를 했다지.


상복을 입고 김선배의 목숨값을 흥정하 그녀에게 쌍년이라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예술가는 결혼하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김선배가 선택한 마지막 여자였으니까.

그 마지막 여자는 김선배가 목숨처럼 아꼈던 어린 딸을 시댁에 던져놓고, 일 년도 되지 않아 주방장 놈과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바람이 전해준 풍문으로 그 여자는 지금 말기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있다던가.

머지않아 김선배와 조우하게 되면 바보 같은 김선배는 또 한 번 용서하고, 또 한 번의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의 외동딸을 낳을 것이다.


오후 4시.

반짝이는 강물 위로 우리 젊었던 날의 예술과 낭만이 떠내려간다. 나는 그 자리에 가문비나무 잘라서 비목 하나를 세워주었다.

첼로의 청승맞은 추모곡이 산그늘 타고 내려와 수묵화의 여백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문득 하늘을 맴돌던 물잠자리 비목에 앉더니 투명한 날개를 접고는 깊은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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