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서해안 경찰서에서 천일수 살인 사건 용의자로 그의 아들 천지호를 조사하고 있을 때 …….
운명의 여신은 쉬지 않았다. 그녀의 입김이 다른 곳에서도 불고 있었다.
서울 용산구는 한강에 인접한 언덕배기 지역이다. 예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전략적 요충지로 군부대가 많았고 외교의 중심지로 대사관도 많았다.
팟! 하며 한 호화 주택에 불이 켜졌다. 이곳은 용산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언덕이었다. 높은 언덕을 따라서 고급 주택들이 즐비했다.
불이 켜진 주택은 다른 주택보다 더 호화로웠다.
4m 높이 수직 담벼락과 잘 정돈된 넓은 정원, 유럽풍 푸른색 2층 주택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용산은 땅값이 비싼 동네였다. 그런 용산에서 아주 넓은 정원을 차지했다.
딱 보기에도 집주인의 재력이 대단한 걸 알 수 있었다.
불이 켜진 곳은 널찍한 2층 거실이었다. 거실에 네 사람이 있었다. 넷 다 이탈리아제 명품 소파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노인이었다. 나이가 아주 많아 보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30대 여자 한 명과 40대 남자 둘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정장을 입고 격식을 차렸다. 모두 검은색 옷이었다. 아주 점잖아 보였다.
반면 노인은 편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푸른색 옷이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빛이었다. 고급 소재로 만든 듯 아주 가벼워 보였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흐흐흐!”
노인이 빙긋 웃었다. 8자 주름이 위로 올라갔다. 움푹 파인 볼살이 두드러졌고 윗입술이 얇았다. 인중도 꽤 길었다.
무정한 세월 탓에 검은 머리가 다 사라지고 흰머리만 남았다. 그 흰머리도 뒷머리와 정수리 쪽에만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젊은 날의 모습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30대 여자가 입을 열었다. 매우 공손한 목소리였다.
“백회장님, 계약서를 확인해 보세요.”
노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테이블 놓인 계약서를 살폈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듯 왼손을 뻗어 돋보기안경을 찾았다. 안경을 쓰고 계약서 내용을 유심히 살폈다.
계약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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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빛과 수렁 같은 어둠_진실의 기록>
백두성 자서전 대필 계약서
원고 의뢰인
이름 : 백두성
주소 : 서울시 용산구 XXXX길 12
연락처 : 010–XXXX-XXXX
원고 대행사 : 미라클 북스
대표이사 : 고두희
주소 : 서울시 종로구 XXX길 58 303호
연락처 : 02-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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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약>
1. 대필자 이름 전부를 책에 공동 저자로 기입한다.
2. 대필 작가 모두에게 인세를 동등하게 분배한다.
3. 의뢰인 백두성은 인세를 받지 않는다.
※ 비밀 유지 조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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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의뢰인 백두성은 90세였다. 나이에 비해 정정했지만, 인생의 황혼기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과거 유명 영화배우였다. 액션 영화와 로맨스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었다. 수려한 외모와 날렵한 몸동작으로 수많은 팬을 열광시켰다.
그렇게 영화배우로 승승장구하다가 중년에 접어들자,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50대 중반에 연예계를 은퇴하고 사업에 몰두했다.
그가 벌인 사업은 빵집, 연예 기획사, 배달업 등 다양했다. 그중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크게 성공해서 연예 기획사와 드라마 제작사로 우뚝 섰다.
그의 이니셜을 딴 ‘DS 엔터테인먼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였다.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기업으로 나스닥에도 상장했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와 한국 최고의 배우, 연예인 등이 다수 속해 있었다. 그래서 그 위상이 무척 높았다.
아울러 20년 전부터는 IT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소프트웨어 개발 및 AI 개발 전문 회사, 두성 IT 솔루션은 혁신적인 동영상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백두성은 배우, 엔터테인먼트 사업, IT 사업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삼토끼 신화’로 유명했다. 불패 성공의 아이콘으로 만인의 찬사를 받았다. ‘한국이 사랑하는 인물 10인’에 들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했다.
그는 10년 전인 80세 생일날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로 DS 엔터와 두성 IT 솔루션의 명예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명예직이라 회사에 출근하지는 않지만, 대주주로서 영향력은 여전했다.
환한 밝음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그의 인생에도 찬란한 빛만 있었던 건 아니다. 깊은 어둠도 함께 공존했다.
젊은 시절 배우로 활동할 때, 여러 여배우와 구설수가 있었다. 그래서 비난도 많이 받았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도 마찰이 심했다.
사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업 초창기 때 어려움에 직면해 부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때 제발 도와달라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렇게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모욕을 견디며 다시 일어섰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산이 높을수록 드리우는 그늘도 아주 깊기 마련이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백전노장 백두성은 어제,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좌절을 맛봤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였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쓰디쓴 맛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딸과 손주가 모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강에 배를 띄우고 물놀이 하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는 신고가 들어오자, 구조대가 서둘러 출동해 구조 작업을 벌였다. 잠수부가 물에 들어가
수색 작업을 벌였고 30분간의 수색 끝에 셋을 꺼냈다. 셋 다 익사한 채 발견됐다.
단란한 세 식구가 일순간에 그의 곁을 떠났다.
이승을 떠난다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영안실에서 도착한 백두성은 울지 않았다. 울 수조차 없었다. 유일한 혈육을 갑자기 사라지자, 힘겹게 잡고 있던 삶의 의지가 산산 조각났다. 의지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삶의 의지가 사라진 백두성은 마지막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돌아오는 90세 생일을 맞아 자서전 발간을 준비했다.
70세 때 출간한 자서전을 보완하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는 개정판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내용이 계속 추가되면서 분량이 대폭 늘어났다. 그래서 총 3권의 자서전을 출간할 예정이었다.
사실상, 개정판이 아니라 완결판이었다. 성공한 인생 백두성의 모든 걸 담을 결정체였다.
<찬란한 빛과 수렁 같은 어둠_진실의 기록>
백두성 자서전
백두성이 책 제목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드는 듯 슬쩍 미소를 지고 말했다.
“제목이 참 좋군요.”
“감사합니다.”
30대 여자가 공손히 답했다. 그녀는 대필 회사인 미라클 북스의 기획팀장 고혜정이었다. 옆에 있는 남자 둘은 프리랜서 대필 작가, 남태호와 지인태였다.
백두성이 고혜정 팀장에게 말했다.
“방문하신 작가님들은 … 최고의 인재들이죠?”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고령이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목소리만 들으면 50대처럼 느껴졌다. 어제 큰일을 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최고의 인재들로 집필진을 꾸렸습니다. 작업량이 방대해 한 명을 더 섭외하기로 했습니다.
업계 탑 클라스 작가님들이 백회장님 자서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흐흐흐! 아주 좋군요. 그래야죠. 거액을 들여 마지막으로 내는 책인데.”
고혜정 팀장이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직 정정하신데 … 그런 말씀 하기에는 이른 거 같습니다. 100살을 훌쩍 넘기셔도 힘이 넘치실 거 같습니다. 그때 자서전을 또 내셔야죠.”
“100살이요?”
100살이라는 말에 백두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큰 웃음소리였다.
“음!”
웃음을 멈춘 백두성이 한번 헛기침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말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저는 살만큼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한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뜻깊은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고혜정 팀장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자서전 재출간을 결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백회장님의 인생 기록은 수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줄 겁니다. 회장님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분이시니 베스트셀러가 될 게 분명합니다. 100만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대필 작가 둘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번에 둘은 신분을 감추는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라 정식 작가로 참여했다.
백두성은 인세를 받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책값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세를 대필 작가들이 동등하게 나누기로 했다.
거액의 대필비도 매우 탐나는데 책 판매량이 100만 부가 아니라 50만 부만 팔려도 받을 인세가 상당했다.
대필 작가들도 이번 기회에 한몫을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고팀장이 말을 이었다.
“완성된 자서전을 받으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저희가 성심성의껏 책을 준비하겠습니다.”
백두성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래야지요. 20년 전에 자서전을 냈지만, 미진한 게 참 많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서 완벽한 자서전을 내고 싶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흡족하실 작품을 만들겠습니다. 최고의 작가와 편집부가 있습니다. 최고의 디자이너도 섭외했습니다.”
“책이 언제쯤 나올까요?”
“이제 심층 인터뷰만 남았습니다. 초안은 완성된 상태입니다. 계약서에 사인하시면 속전속결로 작업을 할 겁니다.
일 진행이 빠르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설렁설렁은 없습니다. 원래 대가들은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아서 일을 빨리빨리 처리합니다.”
“알겠습니다. 심층 인터뷰에 성심껏 응하겠습니다.”
“인터뷰 때 녹음을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네, 마음껏 녹음하세요. 전 꺼릴 게 없습니다.”
고혜정이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명품 만년필이었다. 만년필을 백두성에게 건네며 정중히 말했다.
“자, 이제 계약서에 사인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백두성이 말을 마치고 만년필을 받았다. 주저하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러자 고혜정도 사인했다.
계약이 끝났다. 백두성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담긴 자서전 세 권이 세상에 나올 일만 남았다.
계약서 사인이 끝나자, 껄껄 웃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축하주를 한잔해야 할 거 같네요.”
“맞습니다.”
사인을 마친 백두성이 두 눈을 들어 샹들리에를 쳐다봤다. 수를 셀 수 없는 크리스탈이 영롱한 빛을 발했다.
인생의 찬란함을 상징하는 거 같았다. 스포트라이트와 찬사 그리고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밖은 꽤 어두웠다. 넓은 정원이 깊은 어둠에 잠겼다. 아름답게 가꾼 정원수도 보이지 않았다. 실루엣조차 어둠에 가렸다.
마치 인생의 그늘을 상징하는 거 같았다. 분노, 슬픔 그리고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좌절감이었다.
백두성 자서전 3권의 출간 계약이 끝났다.
1권당 비용이 2억 원이었고 추가 비용으로 1억 원이 포함된 총 7억 원 계약이었다.
모든 비용을 백두성이 부담했고 인세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