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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Oct 22. 2024

에필로그

이 주제로 처음 썼을 때는 성향이 많이 다른 두 아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 외모가 많이 다른 두 아이의 성장 스토리를 나누고 싶었다. 이런 스토리, 나의 시행착오가 우리 집만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엄마, 아빠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써가는 과정에서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과의 에피소드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 속에는 당시 엄마의 고민과 고통이 뒤엉킨 시간들이 깔려 있을 터인데, 지나고 보니 하나의 추억의 장으로 변해 있다. 게다가 웃고 마는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저 깊은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작은 아들에 대한 감정들이 하나둘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처음 꺼내기가 어려웠지 한 번 마음의 문을 뚫고 나오더니 이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별나고 모나게만 느껴졌던 성격, 그리고 진행 중인 공격적인 말투와 태도들을 들여다보며, 그 배후에 깔려 있는 그의 심정, 그가 놓인 환경을 다시금 재고하게 되었다.




엄마로서의 나는 그에게 어떠한 존재일까?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왔고, 미치고 있을까? 그가 기댈 수 있는 충분한 안식처가 되고 있을까?

이런 생각에 미치니, 인제까지 엄마로서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자신감이 무력할 만치 흔들리는 걸 느꼈다.


두 아들을 키우느라 힘들다고 느꼈던 감정들은 아이들로 인해 자아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들로 인해 자녀에게 집중하지 못해 느꼈던 게 아니었을까?

해외에서의 일과 가정의 병행, 하루하루 현실이라는 거센 파도에 몸을 던져놓고 허우적거린 탓에, 자녀의 성장, 그들의 차별성을 여유롭게 지켜볼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삶과 분투하며 열심히만 사는 엄마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엄마의 지쳐가는 모습에서 그들은 활력을 느끼며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자아 성찰을 하면서 두 아들을 보니, 예전에 느꼈던 "불만" "화"가  "미안함"과 "감사함"으로 탈 바뀜하고 있다. 자아 성찰이 가능하게 된 것은 글쓰기의 힘, 그리고 나의 길을 찾은 데서 찾아든 평온함의 덕분일 것이다. 내 마음이 평온하니 아들이 다르게 보이고 달리 해석된다.



내가 웃으니 아이가 웃는다. 내가 부드럽게 말을 하니 아들의 선인장 같은 가시가 찔리더라도 아프지 않은 부드러운 가시로 변하고 있다. 더 어루만지고 보듬어주면 그 가시가 사라지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해본다. 설령 사라지지 않은들 어쩌랴, 그게 개성이지.



자녀 키우기는 우리의 생애에 매우 중요하고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우리의 인생 전부는 아니다. 내 인생의 주역은 바로 나 자신. 내가 행복해야 한다. 웃고 즐겁게 사는 엄마야말로 우리 아이들이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최고의 안식처가 되지 않을까?


요즘 나는 오래 동안 길들여진 습성으로 인해 여전히 아이의 말, 태도에 반응해 버릴 때가 있다. 꿈틀거리는 화를 포착하면 조용히 내 감정을 들여다보며, 그 화에게 묻는다. "어디에서 온 거니?" 그러면 머지않아 숙쓰러운 듯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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