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측에서 채용되어서 들어간 일문학과에서는 과교수들이 나를 향한 시선이 그리 따스하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왜 우리가 한국인을 전임 교수로 채용해야 하냐는 태도였다. 그들과 마주칠 때면 애써 그런 시선과 태도를 피하려려 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내 연구실 공간이라는 도피처도 있고 해서, 동료들의 시선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되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둘 여유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헤쳐나가야 할 숙제들이 산적했기 때문이다.
내가 담당할 과목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 결정되어 내게 주어졌다. 그들한테서 넘겨받은 과목은 문법 관련 강의였다. 내 전공을 고려해서 결정했으리라. 나도 타당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감사히 받았다.
문제는 문법 강의 진행 시에 사용할 언어였다.
간단한 일상 회화라면 어떻게 하겠지만, 문법 설명을 중국어로 진행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도쿄의 일본어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할 때를 더듬으며 대만 학생들에게 직접 교수법으로 전부 일본어를 써서 강의를 진행했고 아주 부분적으로만 중국어를 섞어서 진행했다. 식은땀 흘리며 진행하는 내 강의에 학생들은 벙 쪄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 학생들의 교수 평가에, 내가 하는 일본어도 중국어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가혹하고도 진솔한 의견을 마주해야 했다.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원어민들이 쓰는 직접 교수법이 아니었다. 학생도 나 자신도 나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원어민도 아닌, 대만인도 아닌 나는 어떤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해야 할까?
일본의 일본어학교에서 받았던 강의 방식은 이 학과에서는 여기 학생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선배 동료 교수들의 강의를 참관하기로 했다. 경험이 풍부한 원어민 일본인 강사는 흔쾌히 나의 참관을 받아주었다. 대만에 어언 20년 정도 체류한 분이라서 중국어도 적절히 사용하며, 재미있는 예문들을 골라 학생들의 흥미를 끌게 하는 강의는 강의 중에 몇 번이나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렇구나! 이 분의 강의 방법에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받아들여 나만의 방법으로 해보자. 애써 대만인의 흉내도, 원어민의 흉내도 내려하지 말고 나만의 방법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혼자 붙들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선배 교수들을 찾아갔다. 그 직급이 아래든 위든 상관없이 말이다. 자존심 같은 건 싹 다 버리고, 배움의 자세로 동료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차가운 눈빛을 보였던 동료들도 나의 노력에 마음이 움직였을까, 서서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대만 교수도, 일본 교수도 내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강의 준비는 대만 교수에 비해 2,3배는 더 걸렸다. 강의 내용을 준비한 후에 그 내용을 중국어와 섞어가며 어떻게 전달할지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준비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한, 두 학기 지나면서 조금씩 요령이 생겨났다.
문제는 행정직무였다. 매일 내 앞으로 날아오는 이메일은 100% 중국어였다. 당시의 중국어 실력으로 메일 내용을 전부 이해하려면 이메일만 붙잡고 하루 종일 꼬박 걸릴 분량이었다.
그래서 면접 볼 때 여러 학교에서 그렇게 중국어 실력을 강조한 이유도 뼈저리게 통감했다. 중국어 실력으로 치자면 좀 더 늦게 이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날아오는 이메일 수는 5,60 통이었는데, 그중에는 나와 상관없는 내용이 많았지만 그 판가름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루는 강의와 회의로 빽빽이 짜여 있어서 메일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5,60통의 이메일을 전부 프린트아웃해서 집으로 가져가 남편에게 보였더니, 나와 상관없는 내용까지 전부 갖고 왔냐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메일 내용 파악이 잘 안 되어 중요한 안건들이 처리 마감일 후에 확인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메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가면서, 아침에 컴퓨터를 켜려고 하면 두통이 시작되곤 했다.
교수 회의도 힘들었다. 내가 소속한 학과는 응용외국어학과로서 일본어 전공 외에 영어 전공이 있었다. 당시 학과장은 영어 전공의 교수로서 미국에 매우 오래 체류했던 분이어서 중국어보다 영어가 유창했다. 그래서 회의는 영어와 중국어로 진행되었다. 교수 회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준비된 도시락을 먹는 일 밖에 없었다. 회의 내용을 이해할 수 거의 없었다.
회의 자리에 앉아 동료 교수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지만, 내 안에서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강의, 행정직무를 큰 부담 없이 처리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런 날이 내게 오기라도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