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운이 없는 거예요
"의뢰서 써 드릴 테니까 큰 병원 가보세요."
별일 아닌 줄 알았다. 그래 병원을 갈 때까지,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좀 이상하고 찜찜한 기분이 계속해서 들었지만 약을 먹고 치료하면 나아지는 정도의 병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동네 동물 병원에서 손쓸 수 있는 정도의 병이 아니라고 했다.
병원을 가는 그날 아침까지도 우리는 같이 산책을 다녀왔고, 밥도 잘 먹었고 그리고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검사를 해보니 간 수치가 정상 범위에서 30배 이상 높게 나타났고, 그 외의 주요 수치들도 좋지 않았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보니 머리 양 옆부분이 약간 패인 것 같은 이상한 형상을 보였고, 마침 며칠 뒤가 한 달에 한 번씩 심장 사상충 약을 받아오는 날이었고, 아이를 데려간 김에 "여기가 이렇게 됐는데 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요?"라고 물어봤고, 이참에 종합 검사를 해보자는 말에 속으로는 '에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싶은 생각도 들었었는데.
많이 아픈 상태라는 말을 그날 아이도 들은 것일까, 바로 다음 날부터 아이의 이상 증상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밥을 먹지도 물을 마시기도 어려울 정도로 턱이 벌어지지 않았고, 앉지도 서지도 못할 만큼 구부정한 자세로 침을 흘렸다. 소파까지 올라오지 못할 만큼 뒷다리에 힘이 빠졌고 구토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한 눈에도 많이 아파 보였다.
대학병원 예약은 바로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의 심각성을 인지한 병원에서 빨리 잡아 준 것이 2주 뒤였다. 무너져가는 아이를 보며 이게 현실이 맞는 건지, 정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맞는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 잘 먹고 뛰어다니는 아이였다. 아니, 바로 며칠 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괜찮은 척 버티고 있던 아이였던 것이다.
장작 6시간의 검사를 마친 대학병원에서 뱉은 첫마디는 아이가 자가면역 질환 중, 희귀 난치병인 루프스 '인 것 같다'였다. 6시간 동안 낯선 곳에 데려가서 각종 검사를 한다고 이곳저곳 아픈 아이를 쑤셔대고는, 초주검이 된 아이를 6시간 후에야 내 품에 돌려주고서는 "확실하진 않지만,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루프스인 것 같네요. 자가면역 질환이라 말 그대로 원인도 딱히 없고, 완치도 없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보통 1년 내 폐사할 확률이 높습니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뻔뻔한 얼굴로 했다.
도대체 왜 우리 아이에게, 뭘 잘못해서 이런 질환이 생긴 거냐고 재차 묻자, "그냥 운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어떡하면 좋냐는 말에, "치료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치료법도 명확하지 않아 어떤 약이 아이한테 맞을지 알아가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비용도 많이 듭니다. 치료는 보호자의 선택사항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보통 병원에 가는 환자들은 "어려운 병이지만, 이러한 치료방법들이 있으니 다시 건강해질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해 봅시다"라는,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뻔한 응원의 말을 기대하는데, 그 말이 이다지도 듣기 어려운 것이었나. 의사의 말과 태도는 마치 나에게 치료를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렸고, 치료 중에 아이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저 '운이 없어서'라고 미리 방어막을 쳐 놓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아이는 고작 8살이었다. 8살 아이에게 조금 어려운 병에 걸렸으니 남은 10여 년의 삶을 미리 포기하라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 아닌가. 아이의 병 앞에서 나는 너무도 무력했다. 그저 병원에서 의사가 하는 말만을 믿고 하라는 대로 따라야 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비극이 이런 거구나. 어느 날 찾아온 비극은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