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제 손톱 밑에 가시가 제일 아픈 법
큰 아픔을 겪은 사람은 보통 두 가지의 행동 패턴으로 나뉘는 것 같다.
그 아픔과 슬픔에 잠식되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과
그 아픔을 조금은 희석시키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
나는 후자로 살기로 했다.
처음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를 덮쳐오는 슬픔에 그대로 깔려있었다.
그때의 내 솔직한 마음은 그걸 원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그 슬픔 속에 빠져있고 싶었다.
며칠은 그렇게 지옥 속에서 보낸 것 같다.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쇳덩이에 깔린 듯 심장이 조여왔고, 하루에 몇 번씩은 호흡이 어려웠으며, 수면제를 먹어도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 어떤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 생각될 수 있겠지만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누구나 제 손톱 밑에 가시가 제일 아픈 법이니
그때의 나는 아프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그날도 잠들지 못한 새벽에 아이를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새벽 감성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깜깜하고 고요해서, 이 세상 전체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아 감정이 쉽게 고조된다.
그래서 새벽은, 아이에 대한 생각이 가장 격해지는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울던 나는 어느 순간 내 손으로 나를 마구 때리고 있었고,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베란다 난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대로 뛰어내리는 게 오히려 행복할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술을 마셨다.
'술은 어른들의 진통제'라는 핑계를 대며, 정신을 잃기 위한 도구로 술을 사용했다.
알코올이 어느 정도 몸속에 채워졌을 때 온몸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은,
뇌가 단순해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좋았다.
나는 멍청해지기 위해 술을 마셨다.
깊게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종종 블랙아웃이 왔고 다음날 몸은 더욱 괴로웠으며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나의 슬픔에 잠식되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나마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릴 수 없게끔, 내 정신을 붙잡아 줄 무언가가 절실했다.
나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정신없이 바빠졌어야 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어떻게 상실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내가 잘 해내서, 나처럼 해보시라고 조언하는 게 아니다.
상실과 이별을 겪은 분들께, 그래서 무너지고 있는 분들께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용기가 생기니까.
"상실을 겪은 당신의 날들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나요
당신과 비슷한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방식으로 사십시오.
그렇게, 살아 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