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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라임 Nov 22. 2024

가을은 내 주머니 속에 있었다.

alive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하루였다.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났고, 회사에 가서는 졸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그럭저럭 일을 했다. 해가 어둑해졌을 때쯤 나는 회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한쪽에는 파란 하늘이, 한쪽에는 노을 진 노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떨어지는 가을 낙엽들 사이로 길을 걷다 보니 금방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제는 눈 감고도 누를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링 소리를 내며 잠금이 해제되었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다르게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를 까먹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놀라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우리 집 안이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바닥을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있었다. 아기 손바닥처럼 생긴 자그마한 빨간색 단풍잎이었다. 그것을 집어 들어 구겨지지 않도록 주머니 속에 조심히 넣었다.  


 방 안에 들어가서 그 나뭇잎을 책상에 올려놓고 조심히 관찰해 보았다. 딱히 이상할 거라곤 없는 나뭇잎이었다. 그냥 올 때 내 모자 같은 데에 떨어졌다가 문을 열 때 바람에 휘날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버리려고 했지만 너무 예뻐서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나중에 마르면 책갈피로 만들 생각이었다.    



 겨울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흔하고 걸리적거리던 낙엽들이 이제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나무들의 가지는 휑했고, 사람들은 옷으로 꽁꽁 무장을 하고 다녔다. 가을에 있었던 외로움과 쓸쓸함마저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그때는 그 외로움과 쓸쓸한 느낌이 그리고 싫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마저 그립다. 난 자리는 몰라도 든 자리는 안다는 말이 온몸에 시립도록 와닿는다.  


 마치 가을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벌써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린다. 내 주변에 가을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저 나만이 기억하는 꿈인 걸까? 가을 코트 판매가 한창이던 옷가게들은 반짝이는 조명과 두꺼운 패딩을 내놓았다. 길거리에 수북했던 나뭇잎들마저 누가 쓸어갔는지, 아니면 휩쓸려갔는지는 모르지만 다 어딘가로 없어졌다.  


 매서운 추위는 계속 몰아쳤고 사람들은 점점 더 옷을 두껍게 입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점점 옷을 두껍게 입기 시작했다. 사는 게 바빠서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랬더니 어느새 겨울이 왔고,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고 아이들의 떠들썩함과 그 손을 잡고 함께 걷는 부모들이 보였다. 또, 어느새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낙엽 대신 눈이 소복이 쌓였다. 나무들에게도 잎 대신 눈꽃이 피었다.  


 겨울은 너무 길고 너무나 추웠다. 눈은 보송보송한 듯 보였지만 손이 아리도록 시리게 만들었고, 자동차 운전을 할 때는 나를 여러 번 미끄러질 뻔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겨울에 많이 한다던 눈사람도 만들어 보고, 스케이트도 타러 가 봤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가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터무니없었긴 했지만 그렇게 믿어 보기로 했다.  


 나는 가을을 찾아 나섰다. 철 지난 옷들을 파는 옷가게들과 낭만적인 시적 문구들을. 가을 느낌 나는 갈색 다이어리와 그 안에 들어갈 알록달록한 사진들을. 추위를 참고 가을 코트를 입었고, 언제나 손에는 다이어리가, 그리고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시적 문구를 달달달 외우고 다녔다. 그랬는데도 뭔가 없는 느낌이었다. 사실 오히려 더 어색한 느낌이었다.  


 주변에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도 나에게 춥다고, 이제 겨울이라고 그랬다. 그러면서 그들은 따뜻한 커피 한잔이나 조그만 핫팩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붕어빵을 사 먹고 집에 돌아왔다. 입고 있던 코트나 철 지난가을 옷들을 벗어던지고 겨울옷들을 꺼냈다. 가을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는 건 뭔가 아니었다. 두꺼운 패딩과 털옷들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나서 가을 옷들을 하나하나씩 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코트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만져졌다. 말린 낙엽을 코팅해 둔 거였다.   


 한 한 달쯤 전에 예쁜 단풍잎을 책에 끼워서 말리고 코팅해 둔 기억이 떠올랐다. 허탈했다. 결국 가을은 내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찾아다녔었다니. 이제는 겨울을 만끽해보려고 한다. 어차피 가을은 언젠가 또 올 테니 그동안 겨울을 신나게 즐길 것이다. 가을은 잠시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둔 채로 말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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