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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잘못되면 니가 책임질 거야?

5. 결재라인 파악하기

by 이바다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쪼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알게 되는 꿀팁! 상사에게 쪼일 때는 딴생각을 해라!


그래서 나는 혼날 때면 땅바닥을 보며 소설 동백꽃의 첫 문장을 떠올리곤 했다. 마치 오늘도, 또, 막, 쪼이고 있는 수탉의 모습이 나와 비슷하지 않나 싶어서.



물론 그렇다고 맨날 거창하게 혼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드라마에서 처럼 "그거 잘못되면 니가 책임질 거야?" 라며 결재판을 집어던지며 혼나는 장면은 만나보기 힘들었다.


내가 겪은 현실적인 쪼임은, 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사소하게

말 표현을 정확하게 고르지 못한 것, 구두 질문에 대해서 조금 더 세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 일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윗 분'이 궁금해할 만한 것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한 것

같은 '신경 쓸 수 있었는데 놓친' 포인트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책임의 무게를 느꼈던 것은, '니가 책임질 거야?'라는 호통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말을 내가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을 때였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작고 소듕한지, 나의 책임이란 얼마나 쓸모없는 단어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때였다.




내가 만든 문서 하나하나는 모두 부서장의 결재를 거쳐 타 부서로 전해질 수 있었고,

내 밑에서 만든 문서 하나하나 또한 나의 결재를 거쳐 부서장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나는 신입 때부터 전자 결재 체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크게 결재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타 부서와 일에서 문제점이 생겼을 때 거기 찍힌 내 이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11월 13일에 보내신 문서에 00님 이름이.. 있네요. 두 번째 있으신 거 보니까 검토했는데 왜 이 내용 모르고 계세요?"


전자 결재 체계는 마우스를 달칵 거림으로써 결재 버튼의 무게를 가볍도록 느끼게 했지만

사실, 그렇게 버튼을 눌러 문서 내에 내 이름이 찍힌 다는 것은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문서에 이름이 찍혔으니,

너는 이 일을 알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하고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결재라인은 중요했다.


그렇게 그 중요성을 알았을 때부터

결재라인 맨 위에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라는 게 나를 안심하게 했다.



그 뒤로부터는 드라마에서 "그거 잘못되면 니가 책임질 거야!"라고 소통 치는 상사에게

결언하게 굳은 표정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드라마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드라마적 설정이라며 나도 몰래 헛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니...

공감의 끄덕거림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고개 젓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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