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재라인 파악하기
내가 겪은 현실적인 쪼임은, 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사소하게
말 표현을 정확하게 고르지 못한 것, 구두 질문에 대해서 조금 더 세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 일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윗 분'이 궁금해할 만한 것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한 것
같은 '신경 쓸 수 있었는데 놓친' 포인트에서 일어났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작고 소듕한지, 나의 책임이란 얼마나 쓸모없는 단어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때였다.
내가 만든 문서 하나하나는 모두 부서장의 결재를 거쳐 타 부서로 전해질 수 있었고,
내 밑에서 만든 문서 하나하나 또한 나의 결재를 거쳐 부서장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나는 신입 때부터 전자 결재 체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크게 결재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타 부서와 일에서 문제점이 생겼을 때 거기 찍힌 내 이름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11월 13일에 보내신 문서에 00님 이름이.. 있네요. 두 번째 있으신 거 보니까 검토했는데 왜 이 내용 모르고 계세요?"
전자 결재 체계는 마우스를 달칵 거림으로써 결재 버튼의 무게를 가볍도록 느끼게 했지만
사실, 그렇게 버튼을 눌러 문서 내에 내 이름이 찍힌 다는 것은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문서에 이름이 찍혔으니,
너는 이 일을 알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하고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결재라인은 중요했다.
그렇게 그 중요성을 알았을 때부터
결재라인 맨 위에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라는 게 나를 안심하게 했다.
그 뒤로부터는 드라마에서 "그거 잘못되면 니가 책임질 거야!"라고 소통 치는 상사에게
결언하게 굳은 표정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드라마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드라마적 설정이라며 나도 몰래 헛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니...
공감의 끄덕거림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고개 젓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