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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상 불가능합니다 VS 내가 하라고 하잖아

4. 규칙 위에 사람이 있는 조직은 발전할 수 없다.

by 이바다



"규정상 저희가 그렇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서는 타 부서의 전산용품을 교체해 주고 신규 도입해 주는 일도 맡고 있었다.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요청에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본체 같은 경우에는 7년 이상 사용하셔야 교체가 가능합니다."

"아니 컴퓨터가 느려서 먹통이라니까?"

"혹시 재부팅은 자주 해주시나요?"

"여기가 24시간 돌아가야 되는데 어떻게 컴퓨터를 꺼!"


놀랍게도 재부팅을 하면서 CPU는 메모리를 재정비한다. 전원이 꺼져야지만 비워지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아직 사용하신 지 3년밖에 안되셔서 교체는 어렵고, 재부팅만 해주셔도 금방 빨라지실 겁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왜 죄송해야 하지

따라오는 약간의 현타가 있었지만, 전화를 끊는 것으로 감수할 수 있었다.




"어 나 아까 00 부서 000인데."


전화를 끊은 부서의 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한테 전화를 걸 레벨이 아닌데 왔다는 것은.


"아까 우리 00가 해달라고 했는데 안된다고 했다며. 그거 남는 거 있을 거 아니야."


결국 같은 말을, 더 강력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아 네, 아까 같은 경우에는 규정상.."

"아니 규정이 아니라, 규정이 그러니까 남는 걸로 바꿔달라는 거잖아. 새 거가 아니라."

"저희도 지금 남는 게 없고.."

"지금 내가 하라고 하잖아."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내 말'이다.

'나'의 말

'너'보다 직급이 높은 '나'의 말







솔직히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은 이렇게 돼서 그쪽 부서장이 우리 부서장보다 직급이 높아서 없는 걸 쪼개서 쪼개서 부탁을 들어준 적도 있고,


거금이 들어가는 추가구매를 요청해서 우리 부서장도 거절을 하여 다시 말단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더니

"그 00님 때문에 우리 부서장님이 화나셨거든요..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말이라도 하시죠.."

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내가 잘못했어?

나는 우리 부서의 상황과 규정을 고려해서 이야기한 건데,


왜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너'의 '부탁'을 들어야 하며 기분까지 고려해줘야 하는 걸까.




비단 이 사례뿐만 아니라 사실 더 많은 사례가 넘쳐난다.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지시를 따르게 되는 많은 일들.


조직의 이익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규칙들이

한 사람의 말로 무너진다.

다년간 쌓아 올린 규칙보다 한 사람의 말이 단단하다니

이런 집단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퇴사를 결심한 첫 번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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