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아파트의 봉쇄가 풀릴 기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난민들과 화성고 아이들이 단체로 앓던 병의 진짜 정체가 밝혀진 것이다. 사태를 밝히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미친 돼지들이었다.
생명을 잃은 미친 돼지들의 사체에서 사멸하지 않은 놈펜균이 나온 것이다. 돼지는 학교 급식의 잔반 일부를 먹고 놈펜에 감염됐다. 이 놈펜이란 박테리아는 폐석유로 만든 비료를 뿌린 곡물에서 처음 발견됐다. 놈펜이 함유된 곡물을 사람이 먹으면 설사와 탈수증세를 동반하는 콜레라와 비슷한 증세가 생기고, 동물이 먹으면 미친 듯이 날뛰다가 죽는다.
사람의 몸에서 대사 과정을 거치고 배출된 놈펜은 다행히 사멸해서 전염되지 않지만 동물의 몸에 들어간 놈펜은 죽지 않고 배설물에 남아 전염됐다.
할 수 없이 놈펜이 생긴 곡식과 그것을 먹은 소 닭 돼지 같은 가축들은 일제히 불덩이 속에 던져졌다. 놈펜은 고온에서 죽기 때문에 묻을 수가 없어서였다. 곡물과 고깃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언제나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생각만 하던 지구인들은 본의 아니게 먹을 것을 줄이며 강제 다이어트를 했다. 예상치 못한 전 지구적 다이어트에서 조금 벗어날 만 하자 화석 에너지 대란 사태가 터졌다. 사람들은 에너지 다이어트까지 병행해야 했다.
인간이 단기간에 정복한 것으로 알려진 박테리아 놈펜이 다시 세상에 등장한 것에 화성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화성을 뒤흔든 이번 놈펜은 말살됐던 초기 놈펜과는 조금 달랐다. 식품 속에 잠복해 있을 때는 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숙주 몸으로 들어가서야 본 모습을 드러내며 활성화됐고, 신종 콜레라균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놈펜을 신종 콜레라라고 오해한 것은 다 그 때문이었다.
곡식에 잘 번식하는 놈펜이 든 쌀이 급식에 공급되는 식자재들과 섞이며 학생들이 집단 발명한 것으로 파악이 됐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놈펜이 왜 변종 형태로 다시 나타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세계 기후 난민촌에서 발생하는 테러처럼 인종 혐오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일부러 식품에 주입했다는 추측이 나돌았다. 어쩌면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창궐하고 신종 콜레라 역시 변종 놈펜균일 수도 있다는 설도 제기됐다.
정부는 당장 식품정밀검식단을 화성에 파견했다. 세계적으로 기후비상사태가 잦아지며 동식물이 병들며 그로 인한 식품에 문제가 끊이지 않아 요즘 식품정밀검식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검식단의 정밀 검식 결과 역시나 놈펜은 보급품 중 쌀에 가장 많이 번식해 있었다. 난민 아파트에 보급된 대부분의 쌀은 할 수 없이 소각장으로 직행했다. 난민들에게 개별 보급된 쌀에 있던 신종 놈펜이 다른 음식으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쌀처럼 보급 식량 전체를 소각하는 건 무리였다. 안 그래도 난민 아파트로 보급되는 식량이 부족한데 더 태웠다간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정부는 예전 놈펜이 창궐할 때 나왔던 ‘알듄’이란 약을 화성시에 공급했다. ‘알듄’을 복용하면 놈펜이 번진 음식을 먹어도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알듄이 난민들에게 공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알듄 부작용으로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져 쓰러지는 난민들이 속출했다. 알듄은 놈펜 사태 초기 때 나와 제대로 임상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유통되다 놈펜 사태가 사그라들자 공장에 처박혀 소각되기만 기다리던 약이었다. 이런 약을 난민들이 먹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놈펜은 인간들끼리 전염이 되지 않기에 난민 아파트 봉쇄를 풀 준비를 하던 화성시청에선 면역력이 떨어진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고 화성 시민들과 난민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놈펜이 원인이라는 게 밝혀지기 전 화성 시민들에게 난민들은 위험한 병원균이었지만, 이제 화성 시민들이 면역력이 떨어진 난민들에게 원인 모를 병을 옮길 병원균 처지가 됐다.
자신들이 병원균이 된 걸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화성 시민들은 놈펜균이 들어간 식품을 혹시 먹지는 않을까 벌벌 떨었다. 어떤 이들은 전 지구적 강제 다이어트 때의 기억을 되살려 화성 주변에서만 생산된 검증된 곡물만 사서 조금씩 먹었다.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화성시청에선 식품정밀검식단에게 화성으로 들어오는 일체의 식품을 철저히 검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식품정밀검식단은 난민 아파트로 들어오는 보급품을 비롯해 화성 외부에서 오는 식자재, 가공식품, 화성에서 사육되는 가축들을 대상으로 놈펜 검사를 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난민 아파트에 공급되던 쌀과 같은 트럭에 실려 온 곡식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소와 닭 돼지들이 화형식을 당했다.
대화재를 연상케 하는 연기가 화성에 쫙 깔렸다.
혜성은 억울하게 죽은 생명들의 연기를 어쩔 수 없이 들이마시며 놈펜이 감염된 아이들로 인해 텅 빈 교실과 룬아가 없는 화성산을 돌아다니며 침울해했다. 우주대스타가 다시 열린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인데, 그 소식을 알릴 친구들도, 진정으로 기뻐해 줄 빠순이도 만날 수 없다는 게 마음 아팠다.
라인도 침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사랑하는 대빵이 엄격해진 식품 검수로 학교로 공급이 늦춰져서였다. 대빵을 먹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라인은 혜성의 보드를 빌려서는 대빵을 파는 편의점과 마트를 찾아 화성을 쏘다녔다.
배달만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무리하게 잠을 안 자고 공부하진 않았다. 다만 우주대스타에 나가는 건 아직도 공부 시간이 빼앗길 것 같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혜성은 배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귀가하는 그의 자전거 뒷좌석에 슬쩍 올라타서는 알랑방귀를 뀌었다.
“배달님이 계셔야 우승할 수 있어요! 우주대스타 꼭 같이 나가요!”
배달은 영어 듣기 공부를 하느라 이어폰을 껴서 혜성의 말을 듣지 못했다. 혜성은 계속 혼자 재잘거렸다.
배달의 자전거가 난민 아파트 옆의 도로로 지나쳐 갔다. 경비 로봇개만 사라졌지 높은 울타리는 여전했다. 저 울타리를 너머에 있는 룬아와 난민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자칫 잘못 들어갔다간 면역력이 떨어진 난민들에게 무슨 병을 옮길지 모른다. 혜성은 눈물을 삼키며 쓰레기 언덕을 넘어 개판으로 갔다.
축구장 같은 개집에 있던 개들은 혜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배필은 윙카를 지하 차고에서 꺼내 닦는 중이었다. 버려진 차를 개조해서 만들었다지만 온갖 나비가 그려진 윙카는 정말 멋졌다.
“윙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짜 멋진 예술작품이에요!”
“넌 목소리가 예술작품이잖아. 우주대스타에 나가면 좋은 일 생길 거란 필이 확 와. 달이가 툴툴대긴 해도 막상 출전하면 필이 확 달라질 거야.”
자전거를 세우던 배달이 누나를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3주 뒤 명성에서 우주대스타 한국 예선이 열린다. 탱자 밴드는 개판의 어둠이 떠나갈 정도로 연습했다. 연습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부 시간이 줄어드는 배달은 입이 계속 나왔다. 탱자 밴드의 연습 사이사이마다 난민 아파트의 앰뷸런스 소리가 끼어들었다.
날이 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잦아들더니 몇 명의 난민 아이들이 다시 학교에 왔다. 병을 앓던 재학생들도 돌아왔다. 다시 온 난민 아이들은 애니멀 계급의 아이들처럼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삼엄했던 난민 아파트의 봉쇄가 일부만 풀려서 아직 조심해야 했기에 외출을 하는 난민들을 방호복을 꼭 입어야 했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외부인들 역시 신체검사와 멸균 소독까지 마치고 역시 방호복을 착용해야 했다.
완전히 봉쇄됐던 아파트가 이렇게라도 풀리자 혜성은 왠지 룬아도 돌아올 것 같았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또 화성산으로 올라가 룬아를 목 놓아 불렀다. 그러나 룬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혜성은 다시 개판으로 향했다. 이제 밤에 연습하면 손이 시렸다. 손가락장갑을 끼고 건반을 칠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맨손으로 건반을 쳤다. 악기와 몸이 밀착 소통을 해야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다. 추위에 약한 배달은 목화 점퍼 위에 보온 점퍼까지 껴입고 거문고를 퉁겼다. 혜성처럼 꿋꿋이 맨손으로 라인은 모듬북을 쳤다.
싸늘한 어둠 속에서 <별천지>가 울려 퍼졌다.
천지에 깔린 빛 속의 나
별빛 밖 천지 너머의 너
천지와 별의 떠들썩한 합체
우주가 요동치는 우리의 외침
노래가 끝나자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열렬히 음악에 환호했다. 소란스런 개들이 반응이 잠잠해질 때쯤 어둠을 뚫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스크를 쓴 소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토록 궁금하고 만나고 싶던 최초 빠순이 룬아였다. 역시 룬아는 떠난 게 아니었다. 혜성은 연주를 멈추고 룬아에게 뛰어갔다. 얼굴이 조금 야윈 것 같았지만 룬아의 초록빛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탱자 밴드의 노랜 언제 들어도 우주 최고야!”
신이 난 혜성이 목청 높여 외쳤다.
“빠순이가 제대로 돌아왔네! 우리, 빠순이가 영영 헤어나올 수 없는 멋진 노래 들려주자!”
다시 자리를 잡은 탱자 밴드 멤버들이 <별천지>를 끝까지 연주했다.
오랜만에 자신의 음악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혜성은 흥이 났다.
손가락이 부서져라 건반을 치는데,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묘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연주자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배달과 거의 똑같은 얼굴에 남색 두루마기를 입고 기타 가방을 멘 채 커다란 헤드셋을 쓴 소년이었다. 배달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소년을 보고 기겁하더니 집으로 줄행랑쳤다. 잠시 후 배달이 도망간 집 안에서 지화자와 배필이 넋이 나간 얼굴로 소년에게 다가왔다. 지화자가 배달을 쏙 빼닮은 소년을 껴안으며 흐느꼈다.
“왜 이제 왔어!”
배필도 포옹에 합세했고, 울고 있는 할머니와 엄마를 보던 배낭도 포옹 중인 셋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줄행랑쳤다 다시 나온 배달은 여전히 파랗게 질린 채 셋을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다 다시 집으로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혜성과 라인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배달과 똑같이 생긴 소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룬아는 모든 걸 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배필이 눈물을 추스르더니 이 불가사의한 상황을 설명했다. 피리를 불며 나타난 배달과 거의 똑같이 생긴 소년은 배달의 이란성 쌍둥이 형제 배포로 화성 대화재 때 실종됐다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실종된 아버지 얘기만 알고 있던 혜성은 난데없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지화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배포에게 물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 집이 너무 그리웠어.”
배포의 그윽한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을 듯 빛이 나며 위엄이 있었다. 지화자와 손을 꼭 잡고 있던 그가 아이들을 보며 씩 미소 짓더니 말을 걸었다.
“우리 달이 친구들이구나. 룬아도 오랜만이야.”
목소리까지 좋은 정말 멋진 놈이었다. 저렇게 멋진 놈과 룬아와 이미 친분이 있다는 것에 혜성은 조금 놀랐다. 룬아가 배포를 보고 씩 웃더니 내게 말했다.
“날 구해주고 한국어를 가르쳐 준 게 이 친구야.”
지화자가 룬아의 등을 툭툭 치며 친근감 있게 대했다.
“배포랑 혜성이 친구면 우리 모두의 친구네. 모두 들어가자. 얼씨구 지화자 잔치를 열어야지!”
지화자는 모처럼 솜씨를 발휘해 메밀전병과 칼국수를 뚝딱 만들었다. 정성 가득 만들어진 음식들을 보며 콧구멍이 시큰해진 배포는 커다란 헤드셋을 벗지도 않고 음식을 거의 흡입하듯 먹었다. 룬아는 지켜보기만 할 뿐 먹지 않았다. 아무리 권해도 괜찮다고 했다. 먹으려면 마스크를 벗어야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두고도 편히 먹지도 못하는 룬아를 보니 가슴이 쓰렸다.
배달은 저녁을 먹는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라인이 억지로 방에 들어가 끌고 나왔지만 배가 안 고프다며 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라인이 배포에게 물었다.
“달이랑은 원래 사이가 안 좋아?”
배포가 애써 미소 지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어색한가 봐. 달이가 날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시간이 왜 필요해! 난 쌍둥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꼭 데려올게.”
라인이 다시 배달의 방으로 들어갔다. 룬아와 배포는 서로를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혜성은 그 모습을 괜스레 신경 쓰다 배포의 옆에 있는 피리를 바라보았다. 생긴 것도 특이한데 소리가 정말 좋았다.
“피리 진짜 잘 불더라. 완전 감동했잖아. 이런 피리는 처음 봐.”
배포가 피리를 집어 들었다.
“이건 복사나무로 만든 도피 피리야. 복사나무에 핀 꽃이 도화잖아. 사람을 마음을 끄는 매력인 도화살도 활짝 핀 도화에서 나온 말이야. 그런 매력적인 꽃을 피우는 나무로 피리를 만들었으니 소리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복사나무로도 피리를 만든다는 게 신기했다. 배포가 혜성에게 피리를 건네줬다. 피리 구멍 뒤쪽에는 꼬리 깃이 유난히 화려한 닭을 닮은 새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무슨 새야?”
“황. 들으면 살고 싶은 소리를 내는 악기에 그려진 봉을 찾고 있어.”
“악기도 짝이 있단 말이야?”
“응. 모든 소리는 떨림이야. 그 떨림이 조화를 이루면 화음이 되지. 이 황이 그려져 있는 도피 피리는 봉이 그려진 악기를 만나 세상을 울리는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졌어. 그럼 봉황이 만나게 되는 거야.”
혜성이 룬아와 배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뭐 봉황? 키마를 말하는 거야?”
“응, 맞아.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거든. 꼭 황이 봉을 찾아야 할 텐데. 황이 봉 잡는 날,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야.”
“봉 잡는다는 말이 봉황에서 나온 줄은 몰랐네. 이 악기와 쌍이 되는 악기가 있단 게 정말 신기하다. 그 악긴 무슨 악기야?
배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 언젠가 찾을 수 있겠지. 너희도 음악을 하지? 아까 보니 정말 굉장하더라.”
혜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우린 곧 우주대스타가 될 탱자 밴드야!”
“탱자 밴드, 이름 좋네! 우리 달이도 탱자 밴드의 멤버라 정말 좋다.”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룬아가 입을 뗐다.
“셋은 정말 우주를 진동하게 할 음악을 해.”
배포가 활짝 웃었다.
“귀가 밝은 룬아가 인정할 정도면 진짜 대단하다는 건데.”
혜성이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이제 내 음악이 전 지구에 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있으면 열리는 우주대스타에 출전할 거야.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야!”
배포와 룬아가 동시에 엄지척을 날렸다. 그때 배달의 방에서 라인이 씩씩거리며 나왔다. 배달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 혜성과 라인도 그쯤에서 일어섰다. 같이 갈 줄 알았던 룬아는 배포와 계속 눈빛을 나누더니 남았다. 둘만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혜성은 라인과 함께 개소리 가득한 개판을 빠져나왔다. 널따란 개집 안에 개들을 보던 라인이 불만스레 말했다.
“달이는 진짜 너무 겁쟁이야. 쌍둥이가 무서워서 같이 못 있겠대.”
“쌍둥이도 아빠랑 같이 실종됐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오니 놀랐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적응되겠지.”
쓰레기 언덕 너머로 오니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는 난민 아파트가 보였다. 화성 사람들도 시간이 흘러 난민들에게 적응이 되면 더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어쨌든 완전히 봉쇄가 풀려야 다시 일상이 시작되고, 화성 사람들과 저 사람들의 일상이 공유돼야 낯섦이 주는 두려움이 사라질 텐데.
공유할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화성 사람들과 난민들 사이를 이어주는 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밖에 없다. 꼭 우주대스타에서 우승해서 난민 아파트에서 콘서트를 다시 열거야! 그럼 우주 대스타 우승자를 보려고 화성 시민들은 제 발로 난민 아파트를 찾을 테고, 그때 모두의 마음을 잇는 무대를 만들어야지!
혜성이 라인을 보며 우렁차게 말했다.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우주대스타에서 우승해야 해!”
“노력해볼게. 근데 배포 피리 소리 진짜 좋더라. 꼭 따뜻한 봄볕을 쬐는 기분이었어. 배포도 우리 팀이었으면 좋겠다.”
혜성도 여전히 도피 피리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래! 도피 피리의 따뜻한 소리를 넣어서 탱자 밴드 음악을 더 탱자탱자하게 만드는 거야!”
우주가 우주대스타 우승을 위해 계속 자기를 돕고 있는 것 같아 혜성은 신이 났다.
다음 날, 혜성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윙모드로 날아서 개판으로 향했다. 쓰레기 언덕 쪽으로 가는데 반가운 도피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배포가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코끼리 미끄럼틀의 위에 앉아 도피 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룬아는 버려진 그네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우주의 소리다! 정말 최고야!”
그네에서 내려온 룬아는 버려진 의자 옆에 세워져 있던 가방에서 울림통이 둥그런 현악기를 꺼냈다. 배포가 다시 도피 피리를 연주했고 룬아는 그 악기를 연주했다. 두 악기가 선사하는 웅장한 진동에 혜성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연주에 열중한 둘은 혜성이 지켜보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연주가 끝나자, 혜성은 버려져 있던 오리발을 주워서 격하게 쳤다. 오리발에서 먼지가 일어 기침이 나왔다. 캑캑거리다 겨우 기침을 멈춘 혜성이 둘에게 말을 걸었다.
“우와! 진짜 대단하다! 룬아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줄 몰랐어. 그건 무슨 악기야?”
룬아가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완함이란 아주 오래된 악기야. 랑바린에도 비슷한 악기가 있어 연주하기 쉬웠어.”
호들갑을 떨던 혜성은 완함도 우주 명곡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도피 피리랑 완함 소리를 우주명곡에 넣고 싶어. 그러면 꼭 우주대스타에서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도와줄 수 있어?”
혜성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헤드셋을 써서 잘 듣지 못하는 배포에게 룬아가 속삭였다. 알아들은 배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칭찬 고마워. 근데 곧 떠나야 해서 안 돼.”
룬아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런 실력이 안 돼서 말이야. 그리고 우린 정말 중요한 일을 준비 중이라서.”
혜성이 물었다.
“중요한 일? 무슨 일인데? 나도 도울게.”
룬아가 가방을 완함에 넣으며 대답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음악 잘 하고 있어.”
둘은 악기를 급히 악기를 챙겨 난민 아파트 쪽 도로로 걸어갔다. 당연히 흔쾌히 승낙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거절당하니 너무 허무했다. 곧 떠나는 배포야 그렇다 치고, 자신의 빠순이인 룬아마저 거절한 게 혜성은 조금 충격이었다.
진짜 팬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하는 게 아닌가? 그새 팬심이 식었나?
룬아는 도피 피리 부는 배포를 넋을 잃고 쳐다보며 우주의 소리라고 극찬까지 했다. 설마 배포의 팬으로 갈아탄 건 아니겠지. 도피 피리 소리가 정말 근사하기도 하고 그런 신비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는 배포가 솔직히 멋있기는 해. 그치만 왜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빠순이인 룬아가 배포에게 빠진 거냐고! 예비 우주대스타의 체면을 지키며 팬과 적당히 거리를 뒀어야 했는데, 너무 미주알고주알 모든 걸 다 얘기해 신비감이 사라져서 팬심이 가라앉은 건가?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룬아는 우주대스타가 되는 걸 적극 지지했었다. 배포랑 중요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일일까?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숨기는 걸까?
혜성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개판으로 왔다. 기다리고 있던 배달 라인과 함께 합을 맞췄지만 안 하던 실수가 계속 나왔다. 잠시 쉴 겸 개판으로 들어가 보리차나 한잔 마시고 있는데, 배필과 지화자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배포와 룬아는 화성산에 갔다고 했다. 중요한 일을 화성산에서 하는 건가? 그게 근데 무슨 일이냐고. 룬아가 배포랑 계속있다가 완전히 돌아서는 건 아니겠지.
혜성의 머릿속은 배포에게 빼앗긴 듯한 빠순이 룬아의 생각으로 꽉 찼다.
두 명을 제외한 난민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돌아왔다. 놈펜에 감염됐던 화성고 아이들도 다시 빈자리를 채웠다. 병에 걸린 아이들은 대부분 살이 쏙 빠졌지만 원래 말라 있었던 난민 아이들은 더욱더 수척해져 있었다.
고장 난 지퍼는 혜성을 일일 한국어 보조 강사로 불렀다. 그녀는 수업 시작 전 통역기로 아이들에게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물었다. 그중 나이가 제일 많은 뿌잉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을 대표해 말했다. 버다크어가 통역기를 통해 한국어로 번역됐다.
[아파트 전체가 무덤이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는데, 쓰러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보라색으로 변해서 마치 시체 같았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 슬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학교에 올 수 있어 좋아요.]
뿌잉의 얘기를 듣던 아이들은 훌쩍였다. 아직도 아파트엔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무사히 살아서 학교에 다시 온 게 정말 기쁘다고 했다. 아무리 남의 사생활을 캐기 좋아하는 고장 난 지퍼라지만 상처에서 아직 회복 못 한 아이들에게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혜성은 가라앉은 교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국민가요 ‘꽃땅’을 불렀다.
꽃별이 돋은
붉은 시간의 방에서
사랑의 열쇠를 찾아
꽃땅에 끼워
난민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혜성에게 다시 노래를 부탁했다. 그는 탱자 밴드의 <별천지>와 <오묘>를 불렀다. 아이들이 열렬히 호응해줬다.
빠순이 룬아는 빼앗겼지만 그래도 아직 팬이 남아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뿌잉이 통역기를 통해 다시 고마움을 전했다.
[생생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복이야.]
“내가 우주대스타가 되면 완전 멋진 콘서트를 아파트 안에서 열어 줄게!”
[고마워. 요즘 아파트에서도 작은 공연이 열리고 있어. 피리와 기타 소리가 어우러진 공연인데 그 음악을 들으면 마음과 몸이 치유되는 것 같대. 근데 어디서 열리는지는 몰라서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아.]
둘의 얘기를 듣던 뿌잉의 동생 밍은 그 공연을 얼핏 봤다며, 깃털 귀걸이에 마스크를 안 벗는 언니가 기타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고, 교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오빠가 피리를 불었다고 했다. 혜성은 두 사람이 배포와 룬아임을 확신했다. 악기 세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던 룬아는 배포와 난민 아파트에서 공연까지 열고 있었다.
딱 한 번 봤지만 둘의 연주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혹시 둘이 한다는 중요한 일이 공연인가? 공연이라면 자기도 참여할 수 있는데 왜 둘만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랬던 걸까?
툴툴거리던 혜성의 발걸음이 난민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정문 앞의 낡은 철제 펜스가 싹 치워져 있었다. 혜성은 신체검사를 받고 온몸을 멸균 소독한 뒤에 레벨 A 방호복을 걸친 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호복을 입어서 외부인이라는 게 확연히 티 났다. 팔다리에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힘없이 공용 식수대에서 물을 뜨거나 보급품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혜성은 그 사람들에게 통역기로 룬아와 배포의 연주회에 대해 물었다.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매번 공연 장소가 바뀐다고 했다. 처음에는 공용 화장실 근처에서, 어떤 날은 공용 수도 근처에서, 또 어떤 날은 가장 사람이 아예 살지 않는 101동의 최고층에서 악기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알리지 않지?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악기 연주 연습을 하는 건가?
혜성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다니다 학교에 오는 밍과 함께 있는 어린 여자애를 만났다. 그 애는 113동 뒤쪽의 동산에서 요즘 꽤 자주 피리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혜성은 서둘러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나무 계단 100개 정도를 헉헉대며 올라가니 꽤 큰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다. 그 숲 한가운데 허름한 천막 하나가 보였다. 혜성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 강력한 꽃향기가 코로 훅 들어왔다.
안에서 기다란 흰머리를 늘어뜨린 할머니가 쓰러진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구석엔 얼굴이 쭈글쭈글한 할아버지가 얼굴이 보라색으로 된 야윈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방호복을 입긴 했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인데 가까이 가도 되나 망설여졌다. 멍하니 서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바라복 있는데 억센 손이 혜성을 천막 밖으로 잡아끌었다.
누군가 해서 보니 난민 아파트에 콘서트를 열었을 때 잠깐 만난 적 있는 룬아의 아빠 롯이었다. 그의 목에는 룬아와 똑같은 오색 깃털의 목걸이가 있었다. 롯이 통역기를 통해 말을 했다.
[여길 봤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제발.]
“아픈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치료를 해야 하잖아요. 우리 엄마가 여기서 일하는 의사예요. 알려드릴게요.”
혜성의 말이 통역기로 전달되자마자 롯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 돼. 그 사람들은 현대의학만 믿고 있어서 이런 데를 없애려고 할 거야. 여기서 회복된 사람도 많아. 정말이야.]
롯의 얼굴에 진심이 우러났다. 그가 말을 이었다.
[룬아는 당분간 찾지 마.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누구도 만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근데 배포는 만나지 않나요?”
[그 사람은 룬아랑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혜성은 자신도 룬아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룬아의 마음을 밝혀주는 우주대스타라고 당당하게 말하려다 괜한 불청객의 난동으로 보일 것 같아 관두었다.
룬아와 배포는 지금 어디서 화음을 맞추고 있을까?
난민 아파트를 나와 목 빠질 듯 별을 쳐다보던 혜성은 아무도 자신의 노래에 관심을 두지 않는 행성에 불시착한 것 같았다. 노팬 행성 위를 걷는 혜성의 마음에 적막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