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아와의 갑작스런 이별이 주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혜성은 걸핏하면 학교를 땡땡이치고 화성산을 돌아다니다 점심 무렵이 돼서야 내려왔다.
학교는 요 며칠 새열이 난민 아파트 뒷산에서 발견한 괴상한 창고 얘기로 시끄러웠다. 그 창고엔 한반도에서 볼 수 없는 각종 열대 식물과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놈펜으로 앓던 사람 중 일부가 거기서 자란 정체불명의 식물을 먹고 병이 호전됐다고 했다. 새열은 아이들에게 계속 그곳이 멸망 인간의 소굴이라 떠벌렸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뭘 보고 이 난리인가 싶어 혜성은 핸드폰으로 그 괴상한 창고의 사진을 찾아보다 흠칫 놀랐다. 그곳은 룬아와 배포를 찾으러 갔다 롯에게 끌려 나온 그 창고였다.
설마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새열이 말하던 멸망 인간? 그럼 그곳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룬아의 아빠는 뭐지? 설마 룬아 아빠도 멸망 인간인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지.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거긴 놈펜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불법 민간 의료 시술을 하는 곳이라 말하지 말라고 했던 거야. 야매로 시술받은 게 걸리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니까 숨기는 거겠지.
룬아 아빠를 떠올리던 혜성은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룬아가 남긴 꽃돌이 만져졌다. 배필의 말대로 지구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세계 지도만 쳐다보다 보니 어느덧 수업이 끝났다. 새열은 누구도 믿어주지 않은 멸망 인간 목격담을 두 알에게 떠들어댔다.
“개새를 찾으러 경찰과 의료진의 눈을 피해 난민 아파트 103동으로 올라갔는데 말이야. 낡아서 비워둔 동인데도 이상하게 사람 소리가 들렸어. 날개 부러진 개새를 줍다 뭔가 싶어 슬쩍 열린 문틈으로 훔쳐봤는데, 글쎄 병든 사람들이 누워있고, 멸망 인간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보라색 얼굴을 한 채 죽은 사람을 몸을 주무르는 거야. 그 죽은 듯 보이는 사람을 만질수록 멸망 인간 여자애가 점점 늙지 뭐야! 근데 내가 발견한 그 창고에서도 꼭 그 여자애가 늙은 것처럼 보이는 긴 머리의 할머니가 있었어. CCTV에 찍힌 운석 도둑이랑 좀 비슷해 보였어. 멸망 인간들은 렌즈를 끼지 않아도 눈에 불이 나온다잖아. 운석 도둑은 멸망 인간들이 확실해.”
아무리 새열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며 쌍화점 스캔들까지 합작해 낸 두 알들이지만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새열은 자기 말에 동조하지 않는 두 알을 집어 찼다. 보드 위에 막 오르던 혜성은 내리막길을 구르는 알을 보며 새열에게 한소리했다.
“아빠로서 애들을 잘 보살펴야지. 그럼 쓰냐! 뻥만 안 치면 널 잘 따를 거야.”
열이 뻗친 새열이 소리쳤다.
“뻥 아니라고! 곧 내 말이 진짜란 게 밝혀질 테니까. 두고 봐!”
제 성질을 못 이긴 새열이 혜성을 집어 차려 했다. 보드를 탄 혜성은 날렵하게 그를 피하더니 알들이 굴러간 내리막길을 쌩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혜성은 화성 알뜰시장까지 쭉 달렸다.
복작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보드 타기가 무리인 것 같아, 혜성은 시장 구경도 할 겸 보드에서 내려 걸었다. 시장엔 머리를 빡빡 민 아저씨들이 가득해 눈이 부셨다.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에너지가 개발되면 저 아저씨들도 다시 머리를 기르게 될까?
이 시대가 유행시킨 빛나는 머리를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중고 장난감 가게 앞에서 유독 머리가 큰 머리를 빡빡 민 아저씨가 브로콜리 머리를 한 아줌마와 함께 개새를 사이에 두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줌마는 개새를 차지하기 위해 박치기왕처럼 헤딩을 시도했다. 보호해줄 머리가 없는 아저씨는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개새는 브로콜리 머리 아줌마의 차지가 됐다. 당당히 개새를 들고나오던 아줌마는 주머니를 뒤져 충전지를 찾다 뒤쪽에서 조금 떨어져 걷고 있는 레벨 A 방호복을 입은 난민 모자를 노려보았다.
난민 아이의 손에는 푸른색 전지가 있었다. 아줌마가 험악한 얼굴로 아이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재빨리 엄마 뒤에 숨었다. 아줌마는 볼이 쏙 들어간 검은 피부의 아이 엄마를 보더니 삿대질을 하며 전지를 돌려달라 했다. 난민 엄마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더더욱 열 받은 아줌마는 들고 있던 백에서 특수 손목 보호 장갑을 꺼내 끼더니 엄마의 뒤에 숨어있는 아이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난민 아이가 울며 발버둥 쳤다. 그 애의 엄마가 말렸지만 아줌마는 기어이 아이에게서 전지를 빼앗아 손에 넣었다. 아줌마가 막 개새에다 전지를 넣으려고 할 때 중고 장난감 가게 주인이 달려와서는 아줌마가 잃어버린 충전지를 건넸다. 아저씨와 몸싸움 중 흘린 것이었다. 아줌마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장갑 낀 손에 있던 충전지가 불결하다는 듯 땅에 던지고 가버렸다. 아이는 땅에 떨어진 전지를 주웠다.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가 그런 아이를 꼭 안아주며 달랬다.
놈펜 사태가 조금 잦아들었지만 운석 도난 사건이 벌어지며 화성 시민들은 이방인인 난민들을 여전히 멸망 인간 취급하며 더욱 경계했다. 눈물을 쏟고 있는 난민 모자를 보니 룬아를 떠나보낸 마음이 더 휑해졌다.
혜성은 알뜰 시장을 나와 다시 보드를 타고 난민 아파트 쪽으로 갔다. 또 아파트를 주위를 뺑뺑 돌다 보니 운동 에너지 전지가 어느새 빵빵하게 충전됐다.
혜성은 보드에서 내려 도로 밑 땅으로 내려가 쓰레기 언덕을 넘었다. 온갖 잡초와 화훼단지의 하우스 뼈대만 흉물스럽게 서 있던 벌판엔 다양한 크기의 태양광 충전 패널이 쫙 깔려 있었다. 배필이 화성 시내에 돌아다니는 낡은 태양광 충전 패널이란 패널은 다 쓸어 온 듯했다. 무작위로 설치한 다양한 크기의 패널이 깔린 이곳은 꼭 미로 같았다. 어째 올 때마다 미로가 커지고 복잡해졌다. 저렇게 많은 에너지를 모으는 걸 보니, 배필이 얼마나 윙카를 타고 화성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실감이 됐다.
혜성도 룬아를 찾아 떠나고 싶지만 우주대스타가 출전 때문에 맘을 접었다. 우주대스타에 나가서 룬아를 찾을까? 근데 그걸 룬아가 볼까? 훌쩍 말도 없이 떠났으니 어쩜 그걸 보고도 연락을 안 할 수도 있겠지……
착잡한 맘으로 혜성은 미로 같은 태양광 패널들로 가득 찬 길을 겨우 빠져나왔다. 개밥 여신답게 영양이 가득한 개밥을 준비하던 배필이 혜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혜성이 충전지를 전달하자 배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이제 태양광 패널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더 안 와도 돼.”
꽤 에너지를 모은 듯했다. 혜성이 슬며시 물었다.
“누나, 어디로 떠날 거예요?”
“깨끗하고 맑고 푸른 필이 충만한 세상으로 갈 거야.”
기후비상사태로 엉망인 된 지구에 맑고 청정한 지역이 과연 남아있기나 할까?
“언제 가는데요? 배웅하러 올게요.”
“아니, 그냥 조용히 떠날 거야.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워. 내가 떠나면 개판에서 연습해도 돼.”
여행 준비 때문인지 배필은 매우 지쳐 보였다. 배포도 떠나고 룬아도 떠나고 배필마저 떠난다면 진짜 허전할 것 같았다. 라인은 벌써부터 자신의 우상 배필이 떠난다는 것에 우울해했다. 개밥 여신이 만든 정성스런 개밥을 먹고 좋아서 팔짝 뛰는 개들의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배필이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믿기에 온 힘을 다해 제일 열성적으로 충전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 애도 정말 대단한 배필의 빠순이였다.
혜성은 자신의 빠순이 룬아를 떠올리며 꽃돌을 꺼내 바라보았다. 준비 안 된 이별에 진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별로 정말 팬과 스타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이 돼 버린 듯했다. 혜성은 꼭 은퇴한 스타를 그리워하는 팬이 된 것 같았다.
꽃돌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혜성은 거대한 개집을 지나쳐 다양한 크기의 태양광 패널이 깔린 벌판으로 걸어 나왔다. 이 복잡한 태양광 미로를 또 빠져나가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겨우 기억을 살려 빠져나가다 보니 길이 막혔다. 한숨을 쉬며 다시 왔던 자리로 돌아와 처음 출발했던 개집으로 왔다.
어느새 해가 다 떨어져 어둑했다.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댔다. 문 닫은 개판에 누가 왔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거의 일주일째 영업을 중지한 개판은 어두웠다. 개들이 유난히 모여서 짓고 있는 곳은 억새밭이었다. 개가 똥 눌 때나 가는 억새 사이로 냉장고인지 에어컨인지 구분 안가는 커다란 뭔가가 엎어져 있었다. 어떤 수캐는 뒷다리를 들고 거기에다 오줌을 갈겼는데 그 폐기물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뭐지 싶어 자세히 보니 그건 지구용 우주복을 입은 채 엎드려 잠복하고 있는 새열이었다. 폐기물보다 이 장소에 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을 축출하기 위해 혜성은 새열에게 다가갔다.
“멸망 인간 소굴 조사한다더니 여긴 왜 왔어?”
혜성의 기척을 느낀 새열이 꽉 닫혀 있던 지구용 우주복의 헬멧을 열었다.
“여기가 왠지 수상해. 저 미로같은 태양광 패널도 그렇고.”
혜성의 미간을 구겼다.
“네가 더 수상하거든! 당장 꺼져! 안 그럼 라인 부른다.”
애써 덤덤하게 새열이 말했다.
“아 부르던지…….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저기 뭔가 있어.”
새열이 굵다란 회화나무 옆에 엎어진 커다란 검정 고무 물통을 가리켰다.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너 계속 그런 자세로 있다 보면 개가 똥까지 쌀 거야…… 막 개가 오줌도 갈겼어.”
“뭐! 아이 씨!”
질겁하던 새열이 벌떡 일어나더니 얼른 우주복에 묻은 개 오줌을 닦고 싶은지 헐레벌떡 달려다가 패트병 울타리를 못 보고 넘어졌다. 그 바람에 그의 왼쪽 옆구리에 있는 붉은색 점프 버튼이 눌리며 그의 육중한 몸이 붕 뜨더니 개집 패트병 울타리 너머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 쪽으로 날아갔다. 태양광 패널이 부서진 건지 우주복이 부서진 건지 엄청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란 혜성이 가보니 새열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119에 신고했다. 난민 아파트로 출동한 대원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 했다. 녀석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119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니 지겨웠다. 혜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새열이 지켜보던 회화나무 옆에 있던 고무 물통을 바라보았다. 저건 개판에서 연습할 때 보이던 고무 물통이었다. 화훼 단지의 잔재물 중 하나였다.
이 주위엔 저런 게 원체 많은데 위치가 좀 바뀐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리송했다. 뚫어지게 그 물통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주 순간적으로 물통이 슬쩍 들리더니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며 다시 원상태로 내려앉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말 빛이 보였다.
저게 뭘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지라 그쪽으로 막 발을 떼려고 하는데 119에게서 연락이 왔다. 태양광 패널이 미로처럼 돼 있어 못 찾겠다는 것이다.
혜성은 할 수 없이 원래 무거운 데다 우주복 무게까지 합쳐진 새열을 억지로 업고 태양광 패널로 꽉 찬 미로를 억지로 빠져나왔다. 응급실에 오니 새열이 눈을 떴다. 쇼크로 기절한 것일 뿐 별 이상은 없었다. 쇳덩이 같은 새열을 업느라 진이 다 빠진 혜성은 겨우 병원을 나왔다. 머릿속엔 아직도 통 밑에서 번쩍이던 빛이 아른거렸다.
다음 날, 혜성은 빛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기어이 개판을 또 찾았다. 겨우 미로 같은 태양광 패널이 설치된 벌판을 빠져나오니 돼지 멱 따는 비명이 들려왔다. 겁에 질린 우주복 입은 새열이 뒤뚱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의 새하얀 우주복엔 누런 덩어리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건 영락없는 똥이었다. 혜성이 새파래진 그를 보며 손뼉을 쳤다.
“축하해! 드디어 똥 세례까지 받았네!”
새열이 헬멧을 열며 소리쳤다.
“그 고무 물통을 열어젖혔더니 똥을 쐈어. 내가 이상하다 그랬잖아. 빨리 닦아야지. 이게 얼마짜리 우주복인데…….”
달아나는 새열의 우주복의 등에 묻은 커다란 누런색 덩어리가 뚝 떨어졌다. 고무통이 똥을 쐈다고? 고무통이 똥을 쌌다는 건 아닐 테고, 그 안에 있는 뭔가가 똥을 쏜 게 분명했다.
왜 고무통에서 똥이 나온 걸까? 한 번 가볼까?
망설이던 혜성은 괜히 똥 세례를 받기 싫어 발길이 돌리다 혜성은 간신히 빠져나왔던 태양광 패널 미로를 빠져나가 쓰레기 언덕으로 왔다. 무장을 좀 하기 위해서였다. 쓰레기를 뒤지던 혜성은 금이 간 투명한 플라스틱 믹싱볼과 찢어진 비닐우산이 발견했다.
이 정도면 똥폭탄을 막을 수 있겠지.
다시 복잡한 태양광 패널 미로를 빠져나온 혜성은 들고 있던 플라스틱 믹싱볼을 머리에 쓴 다음, 찢어진 비닐우산을 펼친 후 고무 물통이 서 있는 회화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침을 꼴깍 삼키며 한 박자 쉰 후 고무 물통을 확 열어젖혔다.
안에는 기왓장을 얹고 기둥과 벽은 폐합판으로 만든 한옥형 개집이 있었다. 일반 개집보다 층고가 높은 개집엔 대궐의 성문과 비슷한 문도 달려 있었다. 개의 왕이 살 것 같은 대궐 같은 이 개집은 딱 봐도 배필의 작품이었다. 아직 똥 폭탄이 나오지 않은 걸로 봐선 성문 같은 개집의 문을 열어야 그 끔찍한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혜성은 비닐우산으로 몸을 가리고 개 대궐의 성문을 활짝 열었다. 뿌지직 소리와 함께 누런 덩어리들이 날아왔다. 너무나 생생한 소리였다. 찢어진 우산 사이로 누런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팔이 누런 덩어리에 맞고 말았다.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던 혜성이 멈칫했다. 똥에선 특유의 구린 냄새 대신 좀 다른 냄새가 났다. 그리고 으깨진 콩들이 뭉쳐 있었다. 이건 똥이 아니라 된장이었다. 된장 냄새도 꽤 지독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혜성은 날아오는 된장을 그대로 맞으면서 몸을 숙여 대궐 같은 개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커다란 하나의 된장 덩어리가 되자 된장 폭탄 세례가 멈췄다. 된장은 구석에 설치된 고무 펌프에서 나오는 거였다. 펌프의 맞은편엔 둥그런 고무 뚜껑이 있었다. 그걸 여니 아래와 연결된 줄이 보였다. 손에 묻은 된장을 개집 바닥에 쓱 문지른 다음 혜성은 줄을 잡고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온몸을 점령한 된장 향기를 날려 버릴듯한 향긋한 꽃향기가 점점 진해지더니 드디어 발이 바닥에 닿았다.
봄볕 같은 은은한 조명이 보이는 그곳은 낯선 꽃 천지였다. 무궁화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기다란 꽃술을 가진 붉고 노랗고 파란 꽃이 가득했다. 그 신비로운 정원의 중앙에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꽃이 삼태극 모양으로 심겨 있었다. 그리고 그 삼태극의 가장자리에 흰색 한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머리가 기다란 중년 여자가 누워있었다. 남자는 귓바퀴가 반쯤은 없었다. 근데 귀가에서 푸른색 연기가 나왔다. 여자는 입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는데 역시 입에서 푸른 연기 같은 게 새어 나왔다. 시체 같기도 한 둘의 모습에 혜성은 굳어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서는데 쿵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배필이 있었다. 그녀가 혜성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엄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여긴 아버지가 예전에 치유실로 쓰던 곳이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라 여기서 치료 중이야.”
“병원도 아닌데 치료를 한다고요?”
“사람을 병원에서만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치료할 수도 있어. 일단 나가자.”
배필은 혜성을 데리고 나와 배달의 옷을 빌려준 다음 문 닫은 개판 안에서 갈아입게 했다. 그녀는 여전히 머리와 얼굴에 된장이 잔뜩 묻어있는 혜성을 데리고 미로처럼 돼 있는 태양광 패널로 들어갔다. 혜성은 몇 번 와도 헷갈리는 그곳을 배필은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설마 일부러 이렇게 복잡한 태양광 미로를 만든 걸까? 특이한 걸 만들기 좋아하는 배필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배필이 쓰레기 언덕 쪽을 바라보다 혜성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정말 별일 아니니까 오늘 본 건 싹 잊어. 그리고 내가 떠날 때까지 개판엔 절대 오지 마. 온갖 필이 들어 힘들겠지만 그런 거 절대 아냐. 제발 날 믿어줘.”
멍하게 있던 혜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쓰레기 언덕을 넘어갔다.
무슨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몸에 남아있는 된장과 그 특유의 냄새가 괴이한 개집과 그 집 밑의 이상한 화원을 계속 상기시켰다.
화원에 누워있던 그 중년 남자와 머리 긴 여자는 누굴까? 귀와 입술에 난 상처 때문에 거기 있는 건가? 근데 어째 둘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던 혜성은 그 사람들이 CCTV에 찍혔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설마 그 아저씨 아줌마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변장하고 운석을 훔친 범인? 아니면……새열이 말했던 대로 늙었다 젊었다 하는 멸망 인간? 설마……그냥 정말 몸이 아픈 사람들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배필이 대궐 같은 개집 밑에 된장 폭탄 기계까지 설치하고 그들을 숨기고 있는 게 이상했다.
배필 누나의 부탁대로 그냥 별일 없었던 것처럼 잊어야 하나, 아니면 밝혀내야 하나.
쉽게 답이 안 나오는 일에 빠져버린 혜성은 된장처럼 발효시킬 고민이 생겨 미칠 것 같았다.
“개판에서 개 보고 싶다. 오늘 개 보러 가면 안 돼?”
배달이 건네준 대빵이 든 에코백을 건네받으며 라인이 물었다. 배달이 당황한 얼굴로 평상시보다 말을 더 더듬었다.
“아, 아, 안 돼. 오, 오늘은 저, 저, 절, 절대……”
“그럼 언제부터 개 볼 수 있어?”
“아, 내일, 아, 아니, 모레부터……”
배달이 얼른 교실을 나갔다. 혜성은 된장 세례를 받은 날의 일이 떠올렸다. 배달도 어쩜 배필이 벌이는 일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심각한 얼굴을 한 혜성의 입에 라인이 대빵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꿀꿀 할 땐 대빵이지. 필이 언니는 언제 갈까? 아, 진짜 개 보고 싶어 미치겠어! 오늘 그냥 슬쩍 가서 보고 올까?”
혜성이 대궐 같은 개집 밑에 숨겨진 정원을 떠올리며 말했다.
“누나가 오지 말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가지 말자. 배달도 오늘은 절대 오지 말라고 했잖아.”
라인이 대빵을 뜯으며 불만을 터뜨렸다.
“왜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인지 모레부터 된다는 거야! 개 보고 싶어! 그냥 오늘 보러 걸 거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배달은 오늘은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분명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틀림없었다.
배필은 자기가 떠나면 개판에서 연습을 해도 된다고 했었다. 어쩌면 오늘이 떠나는 날인지도 몰랐다. 배필이 떠나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려나.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로 생긴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라인이 개판의 개들과 놀았던 감정에 빠져서 계속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학교를 마친 혜성은 라인과 함께 개판으로 갔다. 쓰레기 언덕을 넘어서자 복잡한 태양광 패널 미로가 보였다. 라인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골 아파! 보드 좀 빌려줘. 저 복잡한 미로 위를 날아서 가면 개집으로 빨리 갈 수 있잖아.”
“아하! 그렇게 가는 방법도 있었네.”
혜성이 라인의 발상을 놀라워하며 보드를 건넸다. 그런데 보드는 제 자리에서 붕 뜨다 떨어졌다. 충전지가 부족했다. 속히 사랑하는 개들을 보러 갈 수 없게 되자 라인이 얼굴이 또 붉으락푸르락거렸다. 혜성은 간신히 라인의 화를 가라앉힌 후 태양광 패널 미로를 헤매다 겨우 개집 울타리 근처로 빠져나왔다.
신경 쓰이는 회화나무 옆 고무 물통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또 억새 사이에 냉장고처럼 움직이는 하얀 물체가 보였다. 새열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잠복하고 있었다. 고무통 밑의 비밀을 녀석과는 절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혜성은 아무런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새열에게 소리쳤다.
“야, 거기서 뭐 하냐? 똥 세례까지 받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엎드려 있던 새열이 돌아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시끄러. 저기 뭔가 있어. 이제 저 근처만 가도 뭔가 눈앞에 귀신같은 게 아른아른거리며 식은땀이 나. 아마 근처에 초저주파 발생기를 설치해놓은 것 같아.”
새열이 개판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라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혜성이 말릴 새도 없이 라인이 엎드려 있는 새열에게 달려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당장 꺼져! 우리 개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화들짝 놀란 새열이 얼른 일어났다. 라인의 주먹이 새열의 강철 우주복을 때렸다. 주먹이 또 까졌다. 혜성이 라인을 떼어내서는 개판의 개들에게 향하도록 했다. 개를 보면 화가 풀릴 것 같아서였다. 개 쪽으로 몸을 돌린 라인의 화는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자유롭게 개판을 활보하던 개들이 오늘따라 패트병 울타리 쪽에 박힌 말뚝에 일제히 묶여 있었다. 라인은 묶여 있는 개들을 보며 달아오르더니 또다시 새열을 때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새열이 우주복에 흠집이 나는 게 싫어 라인을 피하며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진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고무통이 오늘 몇 번이나 들썩였는지 몰라.”
새열이 말이라면 듣기도 싫은 라인이 우주복을 향해 돌과 흙을 뿌렸다. 헬멧까지 쓰고 있어 안에 돌이 날아들진 않았지만 새열은 더는 우주복이 더러워지는 걸 참을 수 없어 붉은색 점프 버튼을 눌러 태양광 패널이 없는 공터로 붕 날아가더니 몸을 수그렸다. 새열이 눈앞에서 멀어진 후 라인은 말뚝에 묶여 있는 개를 풀어주었다. 제일 먼저 해방된 개가 라인을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촐랑대는 개를 보니 활기가 느껴져 좋긴 한데 혜성은 배필의 말처럼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개를 끌어안고 있던 라인의 손을 잡아끌고는 태양광 패널 미로로 들어가다. 왔던 길이지만 헷갈려서 계속 헤맸다. 라인은 개를 보러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더니 돌아갔다. 혜성이 다시 라인을 데려오기 위해 따라가는데 축구장 같은 개집의 땅이 울렸다. 지진이라도 났나 싶어 몸을 웅크렸다. 공터에서 수그리고 있던 새열이 소리를 질렀다.
“거봐! 내가 무슨 일 터질 거랬지!”
웅크리고 있던 혜성과 라인은 어느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축구장 같은 개집의 중앙이 떡 갈라지더니 윙카가 나왔다. 운전석에는 배필 뒤에는 떠난 줄 알았던 배포와 룬아가 보였다. 윙카가 술 취한 벌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회화나무 쪽으로 돌진했다. 처박는가 싶었는데 하늘 높이 날아갔다. 혜성은 어이없이 날아가는 윙카를 쳐다봤다.
배포와 룬아는 왜 떠난다고 거짓말을 한 채 개판 밑에 있었던 거지? 배필 누나는 정말 여행을 가는 걸까? 저런 차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당황스럽게도 떠난 셋의 소식은 다음 날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명성의 청명산 상공을 날다 추락한 윙카 안에서 도난당한 운석이 발견됐다는 충격적 뉴스가 한반도 전역에 퍼졌다. 경찰은 당초 알려진 운석 강탈범은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 발표하며, CCTV에 찍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범인이 변장인 것으로 추정했다. 운석강탈범이 룬아, 배포, 그리고 배필이었다니…….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소행성에 살고 있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이 혜성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