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들에게 화성 사나이, 마스 가이로 불리는 혜성의 우주 최대 라이벌 사이언이 지구로 보낸 영상이 아침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영상 속 사이언은 화성의 흙에 미생물을 배양해 기른 자기 코보다 조금 큰 딸기를 먹으며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었다. 요란한 웃음소리 뒤엔 갓필드에서 나온 가정용 미생물 광고가 떴다. 기후비상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오염된 농산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기에, 가정용 농업 산업이 붐이었는데 온갖 사업에 발을 담근 갓필드도 관련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광고 말미엔 딸기가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손을 흔드는 사이언이 또 등장했다.
혜성은 같잖아서 말이 안 나왔다.
매번 화성 체류 영상을 보여준 다음 이런 식으로 자기 회사 물건을 광고나 해대는 저 인간을 우주대스타라고 할 수 있나? 우주대스타가 아니라 우주대장사꾼 아닌가? 어서 저 가짜 우주대스타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진짜 우주대스타가 돼야 하는데……
혜성은 씁쓸하게 여전히 돔이 덥힌 꿈의 고향 옥상을 바라보다 150년이나 된 구관의 교실로 들어섰다. 교실에선 귀청이 나갈듯한 아이들의 단체 3단 고음이 터져 나왔다.
합창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이렇게 고음을 지르는 건 교탁 한가운데에 붙어있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에 기다란 촉수를 가진 꼽등이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석에 밀려 구관으로 쫓겨난 난 후부터 아이들은 거의 날마다 이렇게 깜짝 등장한 벌레들을 보고 의도치 않게 목을 풀고 있었다.
재단인 갓필드에선 몇 번이나 퍼펙트 클린 로봇을 보내 구관을 청소하고 벌레 퇴치 초음파벨까지 설치했지만, 구관의 오래된 주민인 바퀴벌레, 쥐며느리, 돈벌레와 가을 들어 자주 나타나는 꼽등이는 어딘가에 몰래 숨어 있다 수시로 나타나서는 아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학교 갔다 오면 벌레 얘기만 하는 자식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학부모들은 새열의 핸드폰이 털릴 때 퍼진 교무부장과 쌍화점 스캔들의 주인공인 학부모회장을 학교에 출두시켰다. 이사장실에서 교장과 교무부장을 대동한 채 함께 오라지에게 자녀들의 고충을 전달한 그는 딸인 전교 회장에게 자신과 교무부장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학교를 떠냈다.
전교 회장은 전자 졸업 앨범을 통해 학부모회장과 교무부장이 화성고 동창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새열과 알아들은 학부모회장과 교무부장이 화성산 올라가는 벤치에 앉아 쌍화차를 마치는 것을 보고 쌍화점 같은 스캔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새열과 알아들은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장수의 기틀을 공고히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학부모회장이 다녀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벌레 퇴치 로봇 5대와 각 교실에 명성의 유명 사립대학의 강의실이나 대기업에서나 쓰는 최고급 인체 맞춤 가구인 나노클래이 책걸상이 보급됐다.
금 간 창문, 잘 닫히지도 않는 뻣뻣한 문, 여전히 먼지 냄새 가득한 데다 곳곳에 벌레가 잠복하고 있는 낡은 교실에 최첨단 가구라니…… 꼭 지푸라기로 만든 움막 안에 최신 안마 의자를 들여놓은 것만 같았다.
경찰이 있다고 범죄자가 모두 사라지는 게 아니듯 벌레 퇴치 로봇을 들여놨지만 벌레들의 출현은 여전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불만은 잦아들었다. 사이언이 화성에서 광고한 신기방기한 나노클래이 책걸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만으로 구관으로 쫓겨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였다. 나노클래이 책걸상은 또한 그들에게 명성의 명문대 학생이 된 것만 같은 환상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진짜 나노클래이 책걸상이 편하긴 했다. 퍼질러 잘 때도 딱 잠자기 좋은 자세로 책걸상이 변형됐다. 혜성은 그 편한 책걸상에 앉아 우주대스타가 되는 상상에 사로잡혀 있다 곧잘 잠이 들었다가 몇 초도 안 돼 깨어났다. 요즘 들어 운석 박물관에 자주 출몰하는 멸망 인간들로 신경이 과민해진 아이들이 쏟아낸 짜증과 욕설 때문이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난민 아이들은 거의 자기들 교실에서 감금당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지만, 운석을 보러 온 난민들은 박물관 출입구 표지판에 적힌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중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무작정 운동장을 배회하거나 때론 불쑥 본관으로 들어와 복도를 헤매고 다니며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운석 박물관 개관 초기부터 있던 경호 로봇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민들을 관리하는데 역부족이었다.
벌레가 나올 때처럼 몇몇 아이들은 난민들을 관람객으로 받지 말라며 갓필드에 항의했다. 난민 아이들을 화성고 학생으로 받아들이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오라지 이사장은 운석 박물관은 인류의 평화와 희망을 증진한다는 취지로 만들었다며 이들의 의견을 모두 묵살했다.
벌레 사태처럼 학부모 회장을 동원해도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자 아이들은 멸망인간들을 직접 물리치기로 마음먹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중 멸망 인간 퇴치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건 ‘새열과 알아들’이었다. 조작된 쌍화점 스캔들 때문에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쥐 죽은 듯 있던 새열은 다시 기가 살아났다. 다 화성고에 새롭게 형성된 보호복 계급 덕분이었다.
보호복 계급은 크게 4계급으로 나뉘는데, 새열같이 사이언이 광고를 때린 진품 지구용 우주복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은 최상류 계급인 ‘스타’, 깐 계란과 안 깐 메추리알처럼 짝퉁 국내산 지구용 우주복을 입은 중간 계급은 ‘호모’, 방호복을 입은 다수의 아이들은 하층인 ‘애니멀’, 그리고 탱자 밴드 멤버들처럼 아무런 보호복도 입지 않고 한복 교복을 입고 다니는 극소수의 아이들은 바닥에 깔린 계급이라 해서 ‘더스트’라 불렸다.
늘 성적과 품행으로 바닥을 기던 새열은 자신이 고귀한 최상류 스타 계급이란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최상류 계급의 위상을 드러내고 싶은지 운석 박물관에 온 난민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우주복과 방호복으로 얼굴과 몸을 가려 평소에 없던 두둑한 배짱이 생긴 아이들도 갖고 다니던 호신용 봉이나 총으로 난민들을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처음 며칠은 진짜 자신들의 구역을 지키기 위해 이 일에 가담하던 아이들은 점차 재미있는 서바이벌 게임에 하듯 난민들을 쫓아내는 걸 즐겼다.
주로 물총에 콜라나 간장을 넣어 난민들을 내쫓고 그것을 무용담처럼 자랑스레 떠벌리던 새열은 학교에 있는 난민 아이들의 부모가 단체로 운석 박물관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그는 대대적인 퇴치 작전을 펼칠 준비를 하며 스타, 호모, 애니멀로 이루어진 멸망 인간 퇴치단을 조직하더니, 스타 계급인 반장 예리에게 ‘땡벌’까지 빌렸다. 벌집 모양인 땡벌은 침을 쏘는 로봇 벌떼가 나오는 고가의 호신용품이었다.
거사 날이 오자 일찌감치 점심을 먹은 화성고 멸망 인간 퇴치단은 운석 박물관 입구인 정문과 근처의 화단에 숨어서 기회를 노렸다. 학교로 접근하는 난민들을 본 멸망인간퇴치단은 작전을 계시했다. 먼저 애니멀 계급이 들고 있던 간장이 든 물총을 난민들에게 쐈다. 간장을 맞아 옷과 얼굴에 검은 물을 줄줄 흘리던 난민들은 겁을 잔뜩 먹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화단에 숨어 있던 호모 계급이 뿌연 가스 풍선을 터뜨렸다. 그 매캐한 냄새를 가까스로 뚫고 난민들은 학교까지 들어섰다. 작전을 총지휘하던 새열은 이때다 싶어 땡벌조준기를 과감히 눌렀다. 근데 방향 조준을 잘못해 로봇 땡벌들은 새열을 비롯한 스타 계급 아이들에게 달려들며 흩어지더니, 점심을 먹고 나오던 교장의 엉덩이와 핵버섯의 왼쪽 눈언저리를 쏜 후 벌집 모양의 조준기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엉덩이에 불주사를 맞은 것 같은 뜨끔한 고통을 느낀 교장의 눈에 땡벌 조준기를 든 새열과 아이들이 들어왔다. 성난 황소가 된 그는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콩 꺾기, 팔 잡아 돌리기, 앞다리 들기, 배지기, 들배지기, 들안아놓기 같은 전직 씨름 선수의 녹슬지 않는 기술을 구사하며 아이들을 제압했다.
로봇 땡벌에게 쏘여 왼쪽 눈이 퉁퉁 부은 핵버섯은 교장의 현란한 씨름 기술로 운동장에 자빠져 있던 아이들이 교내에 소문이 돌던 멸망인간퇴치단임을 눈치채고 교장에게 즉시 보고했다.
오랜만에 천하 장수처럼 힘을 써서 땀을 뻘뻘 흘리던 교장은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역정을 내더니 긴급 전체 조회를 열었다.
멸망인간퇴치단으로 활동하던 아이들과 언제나 재학생들의 눈치를 보던 난민 아이들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교장이 전교생들을 보며 말했다. 그의 말은 난민 아이들을 위해 자동 통역기를 통해 튼크어, 사비어, 롬어로 번역이 됐다.
“난민들은 삶을 터전을 잃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습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을 앗아간 기후 비상사태는 왜 일어난 거죠?”
키가 작아 제일 앞줄에 서 있던 안 깐 메추리알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다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 때문이에요!”
교장이 안 깐 메추리알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기후비상사태가 일어난 건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으로 자연이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됐기 때문입니다. 여기 난민 친구 중 뿌잉이라고 있죠. 손 한 번 들어 줄래요?”
통역기에 귀를 쫑긋거리던 아이 중 스포츠머리를 한 뿌잉이란 여자애가 수줍게 손을 들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그애에게 집중됐다. 교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뿌잉은 튼크에서 왔습니다. 대화재 이후 사람들이 손으로 거두어들였던 화성 쓰레기 산의 쓰레기 대부분이 남반구의 저개발국들로 수출됐어요. 지금도 북반구 나라의 쓰레기가 남반구로 마구 모여들고 있습니다. 튼크는 그중 가장 많은 한반도의 쓰레기를 수입한 나라입니다. 화성이 한반도의 쓰레기통이었던 것처럼 튼크는 아시아의 쓰레기통이 돼 버렸죠. 다들 TV로 봐서 잘 알겠지만 그 감당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쓰레기 때문에 또 화성처럼 불이 났어요. 뿌잉의 머리가 저렇게 짧은 건 화재 때 머리카락이 거의 다 타버려서예요.”
튼크 대화재가 벌어진 건 1년 전. 아이들은 그새 모든 걸 잊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멸망 인간이라 불리는 기후난민들을 불러들인 건 문명의 최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근데 그거 알고 있나요? 그토록 무서워하는 난민의 피가 여러분들의 몸속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정착 생활을 하던 신석기 농경 시대 이전까지 인간은 사실 다 유랑민이었죠. 역사 시대로 접어들어서도 멀게는 고조선 시대부터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민족도 맥수지탄(麥秀之嘆)에 빠져 살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난민이었어요.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수난사는 다들 배워서 알고 있겠죠? 동양의 낯선 나라에서 온 우리 민족을 수많은 사람들이 멸시했답니다. 하지만 따뜻하게 품어준 사람들도 있었죠. 그들 덕분에 우린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우리 문화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자연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하는 지구가 건강한 것처럼 다양한 문화가 꽃필 수 있는 문화 다양성이 살아있는 지구촌이 건전한 사회입니다. 인간도 다양한 문화,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여야 성장할 수 있어요. 온 세상 사람들은 사해형제(四海兄弟)입니다. 제발 마음속의 두려움을 내려놓으세요. 대신 우리가 저 아이들이 훗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본래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합시다. 도와주는 게 아니지. 그냥 받아들입시다. 어쩌면 저기 난민 아이들에게 우리가 뭔가 더 배울 수도 있어요. 동족 교배 퇴화의 원칙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다른 것과 교류하며 우린 더 빛나는 시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갈 미래를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넓은 가슴이 필요합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가슴을 활짝 열도록 합시다!”
아이들은 입이 굳어버렸다. 자신들에게도 멸망 인간의 DNA가 있다는 것에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늘 지겹기만 하던 교장의 말이 혜성은 오늘따라 확 와닿았다. 같은 것들끼리 교류하면 발전이 없다는 동족 교배 퇴화의 원칙은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완전 딴 세상에서 살다 온 룬아에게 인간이 우주란 사실과 키마의 전설, 랑바린 섬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상상력과 시각을 키울 수 있었다.
교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있던 아이들에게 다시 말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부로 지구용 우주복과 방호복 착용을 금지합니다. 등 하교할 때 말고는 학교 안에선 절대 착용해선 안 됩니다. 이번 달 내로 기초 한국어와 문화교육이 끝나니 난민 친구들은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될 겁니다. 따뜻하게 이 친구들을 맞아주세요.”
드디어 멸망 인간들과 같은 교실에서 숨을 쉬어야 할 때가 다가왔는데 보호복을 착용하지 말라니. 좀 전까지 조용하던 아이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교장은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아이들은 우주복과 방호복을 벗고 한복 교복을 입었다. 보호복 계급은 사라지며, 운석 박물관에 오는 난민들에 대한 공격은 멈췄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엔 난민들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남아있었다.
재학생들의 차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난민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배정된 교실에서 화장실에 갈 때 말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학생들과 화장실 갈 때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 굳이 수업 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게 취미인 혜성은 그런 난민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핵버섯의 수업 시간을 탈출해 화장실에 가던 혜성은 뿌잉과 눈이 딱 마주쳤다. 동공지진이 일어난 그 애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태, 탱, 자.”
뿌잉도 탱자 밴드의 난민 아파트 공연을 본 것 같았다. 화성고 아이들의 탱자 밴드에 관심도는 제로에 가까웠다. 정식 데뷔를 한 것도 아니고, 피아노, 거문고, 모듬북으로 이루어진 밴드 구성이 낯설어서였다. 교복을 한복으로 바꿀 만큼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은 교장만 전통 악기로 밴드를 구성한 것에 흥미를 보였고, 간혹 콩나무 음악 선생이 격려를 해주는 정도였다.
난민 아파트 근처와 운석 박물관에 오는 난민들 중 아는 척을 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은 있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아는 척을 해주니 혜성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뿌잉에게 하이파이브를 날린 뒤 건 점심시간에 난민 아이들 반에서 건반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혜성의 노래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난민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국어 선생 ‘고장 난 지퍼’는 혜성을 칭찬까지 했다.
애들은 이런 혜성을 곱게 보지 않았다. 특히 여전히 스타 계급의식이 남아있는 새열은 ‘더스트가 더스트 했다’며 혜성과 난민 아이들의 만남을 더러운 먼지들의 결합으로 취급했다.
열이 뻗친 혜성은 라인을 데리고 가서는 새열과 알아들에게 한 판 뜨자고 했다. 맛있게 대빵을 뜯던 라인을 슬쩍 보던 새열은 자기는 여자와 붙지 않는다며 하얗게 질려서는 매점 쪽으로 달아났다. 새열과 알아들은 사실 작년에 배달에게 대빵 셔틀을 시키다 라인에게 작살이 났다. 그날부터 배달은 라인에게 학교를 마칠 때까지 대빵을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오늘도 배달이 사준 대빵을 금세 먹어 치운 라인은 점심시간 때 난민 아이 반에서 같이 공연을 하자고 했다. 모듬북은 들고 다니기가 용이하지 않아 늘 개판에 있었다. 라인은 아쉬운 대로 먼지떨이와 빗자루, 주전자, 양동이를 챙겼다. 아무리 봐도 어디 청소하러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인과 함께 막 난민 아이들 교실 앞까지 왔는데 양호 선생과 고장 난 지퍼가 부산스럽게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늘 조용하던 난민 아이들 교실은 초토화돼 있었다. 오전에 아이 둘이 쓰러졌는데, 다른 몇몇 아이들도 고열 증세를 보이며 책상에 힘없이 엎어져 있었다. 고장 난 지퍼가 교실로 들어가지 말라고 제지하는 바람에 혜성과 라인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튿날, 난민 아이들은 단체로 학교에 오지 않았다. 재학생들은 드디어 멸망 인간들이 괴상한 병원균을 퍼뜨렸다며 불안해하더니 보호복을 입게 해달라고 교장실 앞에서 성화를 부렸다. 교장은 할 수 없이 아이들의 보호복 착용을 허락했다. 학교엔 전처럼 진품 지구용 우주복과, 국산 짝퉁 지구용 우주복, 방호복을 입은 아이들이 넘쳐났다. 사라진 줄 알았던 보호복 계급제는 부활했다.
다시 최상류 계급인 스타 계층에 등극한 새열은 의기양양하게 호모 계층인 두 알아들을 끼고 복도를 걷다, 라인에게 줄 대빵을 사 들고 오던 더스트 계급의 배달을 목격했다. 새열은 배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간만에 시비를 걸었다.
“아, 참 배달, 너도 멸망 인간들이랑 가까운 데 살지?”
아이스크림을 빨던 깐 계란이 끼어들었다.
“얘 개판이 집이잖아!””
안 깐 메추리알이 신이 난 듯 말했다.
“더러운 온갖 똥개들이랑도 같이 살고.”
새열이 배를 잡고 웃다 불결하다는 듯 배달의 어깨에서 얼른 손을 뗐다.
“뭐 똥개들이랑 개판에 산다고? 완전 개새끼네! 얘도 혹시 멸망 인간들이랑 같은 병 걸린 거 아냐?”
무슨 말을 할 땐 항상 상황 맥락 즉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이 어디인지 정확 파악해야 한다. 새열의 입에서 나온 ‘개새끼’란 세 음절은 교실에서 막 나와 배달이 사 온 대빵을 향해 질주하던 라인의 귀에 꽂혔다.
라인은 배달의 손에 있던 대빵을 낚아채서 새열의 얼굴로 강속구를 던졌다. 새열은 볼링핀처럼 쓰러졌다. 라인은 복도에 있던 밀대를 집어 새열을 복날에 개 잡듯이 두들겨 팼다. 다행히단단한 지구용 우주복 때문에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래도 아빠처럼 모시는 새열이 당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 깐 계란과 안 깐 메추리알이 말렸다. 라인을 밀대로 두 알아들을 당구공처럼 처서 굴러버렸다.
절대 라인 앞에서 ‘개새끼’란 말 꺼내지 않기. 화성고 아이들이 반드시 지키는 금기 사항이었다. ‘개새끼’란 말을 들으면 라인이 헐크로 돌변해서였다.
이 애가 이렇게 된 건 5년 전 화성 대화재 때부터이다. 화훼단지를 운영하던 아빠는 집과 농장을 모두 잃고 완전 딴사람이 됐다. 늘 술을 먹고 엄마와 라인을 개새끼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던 아빠는 라인이 키우던 강아지를 괴롭히다 결국 죽게 만들었다. 라인에게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안겨준 아빠는 술을 먹고 화성의 빈 아파트에서 자다 동사했다. 그 후 라인은 아빠처럼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을 보거나 아빠가 자주 쓰던 ‘개새끼’란 말에 극도로 분노하며 어마무시한 괴력을 분출했다.
우주복 덕분에 라인에게 타작당하는 것을 피한 새열과 알아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그들을 놓친 라인은 여전히 끓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들고 있던 빗자루로 죄 없는 창문과 교실 문을 사정없이 팼다.
혜성과 배달은 도저히 라인을 말릴 수 없어 배필에게 영상전화를 걸었다. 배필은 라인이 개밥여신으로 숭상하는 그녀의 우상이었다. 개판에서 개를 훈련시키고 있던 배필은 영상전화로 미친개처럼 날뛰는 라인을 겨우 진정시켰다. 피가 흐르는 주먹을 덜덜 떨며 라인은 한참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더니 그대로 학교를 뛰쳐나갔다.
학교, 집, 개판 아니면 갈 데 없는 라인은 종적을 감춰버렸다. 혜성은 배달과 함께 사흘 동안 화성 시내를 샅샅이 뒤졌다. 라인을 찾은 것은 둘이 아니라 담임인 핵버섯이었다. 라인이 있던 곳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유니버스 프라임 109동 최고층이었다. 유니버스 프라임의 고층은 다 천장 누수로 비워놨다. 라인은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깡통, 화분, 패트병 같은 온갖 쓰레기들을 엎어놓고 쇠젓가락으로 정신없이 치고 있었다. 핵버섯이 아무리 내려가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혜성과 배달을 불렀다.
콘서트 이후 간만에 난민 아파트에 발을 들인 혜성은 109동으로 가던 도중 언제나 다른 사람들 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는 듯 훌쩍 키가 큰 콩나무 음악 선생을 봤다. 그녀의 손엔 무슨 일인지 핸드폰이 있었다. 룬아 같은 자연에서 살다 온 애가 핸드폰이 없는 건 이해가 되지만, 문명의 편의를 누리는 사회에서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콩나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진정한 문명인이 되려고 핸드폰을 장만한 건가. 콩나무에게 웬 핸드폰이냐고 묻기 위해 다가가던 도중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해 선생님’이었다. 학교에 해 선생님은 본명이 ‘해보석’인 핵버섯 밖에 없다. 그녀는 111동 앞에서 기다린다고 하더니 전화를 끊고 혜성의 시야에게 후다닥 사라져 버렸다.
이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1학년 담임인 콩나무가 2학년 담임인 핵버섯과 함께 라인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오길 꺼리는 난민 아파트에 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골을 열심히 굴리다 보니 번개가 팍 스쳤다.
설마 ‘핵버섯의 유혹’ 스캔들은 사실? 카사노바 핵버섯이 드디어 콩나무를 사랑의 세레나데로 유혹하는 데 성공한 건가? 그래서 둘은 지금 비밀 연애 중이고, 연애를 하면 계속 연락하고 싶으니까 콩나무가 핸드폰까지 장만한 거고! 맞아! 둘이 사귀니까 같이 라인을 찾으러 여기 온 거야!
두 선생의 열애를 확신하며 옆에 있던 배달에게 얼른 이 사실을 전했다. 여기서도 영어 듣기 공부 중이던 배달은 아예 관심이 없었다. 정말 의대 가는 데 목숨을 건 무서운 놈이었다.
둘은 곧 라인이 있다는 109동 앞에 다다랐다. 전력 부족으로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아 헉헉 대며 계단을 오르다 가을을 맞아 활짝 핀 버섯처럼 더 머리가 풍성해진 핵버섯과 마주쳤다. 혜성이 음흉한 얼굴로 슬쩍 말을 걸었다.
“선생님, 오다가 음악 선생님 봤는데, 혹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불탄 핵버섯이 된 그가 소리쳤다.
“괜히 이상한 소문냈다간 네 핸드폰이 털리는 수가 있어! 가서 라인이나 데려와!”
혜성은 찍소리도 못하고 배달과 함께 라인이 있는 고층으로 올라갔다. 쓰레기 난타를 하던 라인은 배달이 건넨 팔뚝만 한 대빵 5개를 허겁지겁 먹다가 목이 막혀 캑캑거렸다. 그렇게 똥고집을 부리던 라인은 물을 마시러 개판에 가야겠다는 핑계로 내려왔다.
올 때와 달리 서둘러 개판으로 가기 위해 유니버스 프라임의 정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임시 의료용 천막이 쳐진 그곳엔 얼굴이 보라색이 된 채 누워있는 사람이 족히 100명도 넘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난민 아파트에 파견된 의사인 엄마가 보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너무 바빠 그럴 틈이 없었다.
정문 바로 앞 공용 수도로 오니 물을 뜨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사람과 물을 떠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졌다. 겁먹은 라인과 배달은 어서 그곳을 탈출하자고 재촉했다. 멸망 인간이라 불리는 난민들이 진짜 멸망해 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자 소름이 끼쳤다.
혜성은 그 오싹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막힌 목을 축이며 숨을 돌리던 라인과 어서 공부해야 한다는 배달을 억지로 꼬셔 탱자 밴드 노래 중 가장 신나는 ‘개판 세상’을 합주했다. 그러나 쉽게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찜찜한 기분을 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핵버섯에게 전화가 왔다. 난민 아파트에 괴상한 병이 돌고 있으니 그 사람들과 밀접 접촉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수 검사를 실시한다고 했다.
놀란 혜성은 보건소로 직행했다. 간호 로봇이 피를 채취했고 검사 결과는 즉시 나왔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학교에도 혹시 감염자가 있는지 몰라 전수 검사가 이루어졌고, 난민 아이들이 있던 교실은 완전 폐쇄됐다. 늘 시끄럽게 떠들며 잡소리를 내던 아이들은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다.
고요함 속에 깃든 아이들의 불안이 고스란히 혜성의 피부에 와닿았다.
이제 보호복을 입어야 할 때가 왔나.
언제나 씩씩하던 혜성의 가슴에 어둠이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