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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 선화 Oct 10. 2024

거룩한 축복, 랑바린

‘거룩한 축복’이란 뜻을 지닌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원시림이 보존된 랑바린은 천혜의 자연을 품은 섬이다. 랑바린인들은 자연의 주는 풍요를 모두 키마의 은덕으로 여기며 별 어려움 없이 삼모작으로 벼농사를 짓고, 숲에서 나는 각종 열매를 먹으며 평화롭게 살았다. 

키마가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 오동나무 숲 ‘텐키마’는 모계 사회인 랑바린의 지도자 ‘드바’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키마는 랑바린인들에게 풍요를 선물하고 마음에 평화를 주는 수호신이었다. 랑바린들은 일출과 일몰 때 랑바린어로 ‘와징카웃’이라 불리는 마을 입구의 맹그로브 숲의 가장 오래된 나무 위에 지어진 집 안에서 울리는 와징 소리를 들으며 텐키마가 있는 동쪽을 향해 기도했다. 

<라수리 시알 시알 라수리>

‘우주자연은 우리고, 우리는 우주자연이다’라는 이 말을 깊이 새기며 랑바린인들은 키마가 내려준 이 섬의 모든 걸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약초와 열매를 채집하기 전에는 꼭 기도한 후 허락을 구했고, 물고기도 아주 적은 수만 정해진 계절에 잡았다. 산에 사는 짐승도 ‘칸바랑’이란 랑바린의 첫 번째 벼 수확을 기리는 날만 사냥했다. 사냥 후에는 반드시 위령제를 지내며 소중한 생명을 내준 동물의 넋을 위로했다. 

특별한 법이 없는 랑바린 섬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화를 내는 건 랑바린에서 제일 수치스러운 일 중 하나였다. 랑바린 사람들은 풍요로운 자연이 깃든 우주를 품은 맑은 마음을 가장 거룩한 축복이라 여겼다. 맑고 평안한 마음을 지키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일출과 일몰 때면 울리는 와징 소리를 들으며 맑은 마음을 지켜달라고 우주에 기도했다.

아침저녁으로 와징을 울리는 일은 랑바린인들이 하루씩 돌아가면서 맡았다. 랑바린인 모두 첫 번째 이름이 얻은 후부터 와징 지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첫 이름은 우주와 자연의 신비를 처음으로 깨달으면 붙여졌다. 사시사철 푸른 랑바린에서 정확한 자신의 생체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이 이름이 바뀐 횟수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있었지만 누가 이름이 몇 번 바뀌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에게 꽃 잔치 ‘해뷴’을 열어주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성장을 축하할 뿐이었다. 

태어나서 아무 이름 없이 섬을 누비던 초록 눈의 소녀는 죽어가는 롤루꽃을 보살피다 꽃과 얘기를 나누는 꿈을 꾸고 난 뒤 ‘꽃의 이야기’라는 뜻의 ‘햇싱’이란 첫 이름을 얻었다. 

꽃잔치 ‘해뷴’이 열린 뒤 햇싱에겐 오동잎으로 만든 관이 씌워졌다.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는 와징지기를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오동잎 관을 쓴 채 햇싱은 첫 와징지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을 입구 맹그로브 숲의 가장 오래된 나무 위에 지어진 와징카웃으로 들어갔다. 나무집 안에는 키마의 그림, 코코넛 열매와 동물의 뼈를 이용해 만든 전통 악기, 목판, 암석, 식물에서 채집한 천연물감이 있었다. 와징 지기를 맡은 사람은 전통 악기들을 연주하거나, 이전 와징지기가 그린 그림을 구경하거나, 직접 목판에 그림을 그리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다리다 와징을 울렸다. 

처음 와징지기를 맡아 긴장한 햇싱은 내내 서쪽 바다만 바라보았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자 날개를 편 키와 마가 양쪽에서 종을 물고 있는 형상을 한 와징을 오동나무로 세게 쳤다. 온 세상을 깨우는 와징의 울림이 와장카웃에서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햇싱의 가슴에도 맑은 와징의 울림이 가득 찼다. 

별과 함께 밤을 지새운 햇싱은 뜨는 해를 보며 와징을 울린 뒤, 다음 와징지기에게 일을 넘기고 와징카웃을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햇싱을 꽃가마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훌륭하게 처음으로 와징지기 일을 마친 사람에게 행하는 꽃잔치 ‘해뷴’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와징의 소리가 우주와 자연과 랑바린인들을 연결해준다고 믿었기에 와징을 울리는 것은 랑바린에서 가장 숭고한 의례였다.

아침저녁으로 랑바린들의 심장을 울리는 와징은 간혹 랑바린에 외부인이 찾아올 때도 울렸다. 그러나 랑바린이 워낙 외따로 떨어진 섬이고, 섬 주위에 암초가 많아 외부인들은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랑바린을 찾는 사람은 1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랑바린 섬을 관할하는 국가의 관리와 극소수의 오지 여행객이 전부였다. 관리들은 세금으로 쌀과 랑바린 섬에서만 나는 사탕수수와 비슷한 사카와 야자의 일종인 천연 자연 강장제 요마 열매를 가져갔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랑바린까지 찾아오는 여행객은 몇십 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였다. 

아침저녁 이외의 시간에 와징이 울리는 날은 외부인이 찾아와 주민들에게 세상 밖의 얘기를 들려주는 날이기도 했다. 랑바린인들은 섬 바깥세상 얘기에 귀 기울이며 자연이 준 축복인 각종 열매와 곡식으로 만든 음식들로 외부인을 극진히 대접했다. 

햇싱이 두 번째 와징지기를 맡을 때는 요마가 달콤하게 익어가던 계절이었다. 두 번째로 와징카웃 안에 들어온 햇싱은 지난번 긴장해서 잘 보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이 그린 키마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림 속 키마는 조금씩 다른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영롱했다. 저 맑은 눈동자를 가진 키마가 영원히 사라진 세상에 사는 게 못내 슬펐다.

두 번째 와징지기 일을 마치고 잠을 자던 햇싱은 키마의 꿈을 꾸었다. 텐키마의 가장 오래된 오동나무 위에서 키마는 날개를 다친 채 울고 있었다. 깨어난 뒤에도 가슴이 아려 견딜 수 없었다. 햇싱은 드바에게 찾아가 꿈 얘기를 전했다. 차분하게 꿈 얘기를 듣던 드바는 마을 여자들도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단 사실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꿈을 말하지 말고 맹그로브 숲에 가서 춤을 추며 꿈을 날려버리라고 했다. 

햇싱은 키마의 눈물 대신 힘찬 날개짓을 떠올리며 맹그로브 숲에서 춤을 췄다. 눈물을 흘리는키마는 더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섬에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배에선 랑바린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닐과 플라스틱이 잔뜩 실려 왔다. 뭍과 꽤 멀리 떨어진 랑바린까지 밀려온 쓰레기에 의아해하던 랑바린인들은 고래가 죽은 채로 해변가로 떠밀려 오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키마의 축복으로 태어난 랑바린에 보이지 않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둠을 쫓아내기 위해 마을에선 누군가가 성장해서 새 이름을 얻을 때만 벌이던 꽃잔치 ‘해뷴’을 자주 벌였다. 싱그러운 꽃의 기운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 믿어서였다. 그러나 고래에 이어 거북이, 해달, 떼를 지어 죽은 물고기들이 자꾸만 발견되었다. 그물에 걸린 쓰레기는 날이 갈수록 그 종류와 수가 늘어갔다. 쓰레기들 대부분은 태우면 유독한 가스가 나왔고 타지 않는 것도 있었다. 

축복으로 가득한 땅속에 그것을 묻을 수는 없었기에 랑바린인들은 쓰레기를 나눠 집으로 가져갔다. 플라스틱이나 캔 같은 건 잘 씻어서 다시 쓰긴 했는데 그것도 점점 한계가 왔다. 재활용도 불가한 쓰레기는 집안에 점점 쌓였다.

랑바린들이 모두 모여 불어나는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던 대낮에 느닷없이 와징이 울렸다. 랑바린엔 몇십 년에 한 명 올까말까했던 관광객들이 떼지어 왔다. 그들은 랑바린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다양한 피부와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랑바린인들을 문명의 혜택을 못 받은 비위생적인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무 데나 텐트를 치고, 해변에서는 물고기를 숲에서는 동물들을 마구잡이로 잡았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며 랑바린인들은 만류했지만 관광객들은 이미 충분한 돈을 내고 왔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바닷가엔 반도 먹지 않고 버린 물고기들이 굴러다녔고, 숲에는 뿔이 잘린 사슴과 쓸개가 빠져나간 곰의 사체가 나뒹굴었다. 랑바린인들은 슬픔에 찬 가슴으로 갑자기 죽은 동물들의 장례를 연달아 치렀다. 

랑바린을 한바탕 휘젓고 간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출 일몰 시간이 아닌 시간에 또 와징이 울리며 또 다른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어김없이 살아있는 것들을 함부로 대하며 쓰레기만 잔뜩 남기고 떠났다. 

더는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는 지도자 드바는 태어나서 한 번도 나가지 않던 섬을 떠나 뭍에 있는 수도로 갔다. 어렵게 담당 관리를 만난 드바는 랑바린이 특별 관광구역으로 정해졌다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듣는다. 랑바린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관할 국가는 랑바린을 멋대로 관광지화해버린 것이다. 드바는 이를 철회해달라 간청했지만 뭍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적 자원으로 전혀 등록돼 있지 않은 랑바린인들은 동물 취급하며 철저히 무시했다. 

랑바린으로 밀려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와징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시계가 있는 관광객들에게 문명과 거리가 먼 와징의 소리는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이었다. 그들은 드바를 찾아가 와징을 멈추라 항의했다. 드바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랑바린을 그저 심심풀이 놀이터로 취급하는 관광객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화가 치민 관광객 중 하나는 미개인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와징지기가 잠시 와징카웃을 비운 틈을 타 와징을 떼서는 요트에 싣고 가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

오랜 세월 랑바린인들의 마음을 지켜주던 와징이 사라져 버린 날, 사람들은 모든 일손을 놓은 채 전설 속의 키마가 날아왔다는 동쪽 하늘만 쳐다보았다. 몇몇은 한 번도 내 본 적 없던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드바는 키마를 슬프게 하는 화를 잠재우라며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관광객들은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온 랑바린에서 뭐 하나라도 더 즐기기 위해 섬 안의 계곡과 과일나무 숲은 물론 주민들이 농사짓는 계단식 논과 밭까지 휘젓고 다니다, 랑바린인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성역인 키마의 오동나무 숲 ‘텐키마’까지 들어갔다. 

자신들의 성역을 침범한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해 랑바린인들은 할 수 없이 텐키마로 발을 들였다. 텐키마에 들어간 관광객은 모두 세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만 질겁한 채 뛰쳐나왔다. 가장 오래된 오동나무 근처의 바위굴로 들어갔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라진 사람을 찾기 위해 텐키마를 샅샅이 뒤졌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랑바린인들은 사라진 사람이 신성한 키마의 숲에 함부로 들어갔기에 봉변을 당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사라진 사람에게서 페르시아만 근처의 해변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갑자기 랑바린과 완전히 동떨어진 페르시아만으로 가게 된 건 텐키마의 바위 동굴 속에 있던 흑과 백이 반반 섞인 흑백석이란 돌 안의 신비한 물질 때문이었다. 그 돌 안의 회색 물질과 사라진 사람이 걸고 있던 페르시안 산 진주와 땀방울이 섞이면서 순식간에 페르시아만으로 이동해버렸다.

흑백석 안에 있던 이 놀라운 물질이 발견된 후 랑바린에는 관광객들의 탐방이 중지됐다. 대신 시찰단이 왔다. 그들은 랑바린인들이 온몸을 써서 막는데도 불구하고 텐키마로 쳐들어갔다. 시찰단은 가장 오래된 오동나무 옆에 있는 바위 동굴에 가득한 흑백석 안에 있는 이 물질의 이름을 마음대로 ‘모베오’라 이름 붙이고는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했다. 

함부로 땅을 파헤치는 그들의 행태에 랑바린인들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울렁거렸다. 관광객들이 찾아올 때부터 꾹 누르고 있던 화가 드디어 치밀고 올라온 것이다. 화를 내는 건 가장 치욕스런 일이었기에 쏟아지는 눈물로 화를 다스리고는 텐키마를 지키기 위해 농기구를 무기 대신 들고 채굴단에게 필사적으로 맞섰다. 채굴단을 지휘하던 감독은 자연은 인간의 풍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총으로 랑바린인들을 위협했다. 

신성한 텐키마의 나무와 꽃들은 모조리 뽑히고 잘리고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파헤쳐졌다. 드바는 다시 수도로 향했다. 관할 국가는 이미 엄청난 돈을 받고 채굴권을 다국적 기업에게 팔아넘긴 후라 이 모든 일을 수수방관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드바는 뒤늦게 랑바린을 자치령으로 운영되는 땅으로 인정해달라 소송을 걸었지만 허탈하게 졌다.

랑바린은 채굴권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완전한 식민지가 됐다. 섬에 온 채굴업자는 랑바린인들을 모베오 채굴에 동원했다. 식수를 마시던 샘도 농작물을 키우던 땅의 경작권도 주민들이 모르는 사이 채굴 기업에게 넘어갔기에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모베오를 캐야 했다. 이미 엉망이 된 텐키마에 이어 모베오를 찾기 위해 랑바린의 온 숲이 파헤쳐졌다. 

모베오가 들어있는 흑백석이 있는 갱도는 특히 좁았는데,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동원됐다.

콩고에서 전기 자동차와 스마트폰 원료인 코발트 채굴에 동원된 아동

지하 10~20m에 있는 암석들은 부서지기 쉽고, 낙석도 빈번해 안에 들어갔던 아이들은 산 채로 매장되거나 질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뿐만 아니라 모베오가 들어있는 흑백석은 중독 위험이 있는 광물이었다. 채굴에 동원된 사람들은 모두 평상시 복장에 맨손으로 채굴을 했다. 흑백석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혈관이 막히거나 썩어서 손발을 잘라내야 했고, 심하면 급성 심장 마비로 목숨을 잃었다. 흑백석은 사람뿐만 아니라 숲의 토양과 물마저 오염시켰다. 랑바린 섬엔 기형아가 계속 태어났다. 

절대 햇싱을 모베오 채굴장에 내보내지 않던 햇싱의 엄마는 흑백석 중독으로 인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햇싱은 엄마의 유품인 마지막 마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깃털 귀걸이를 쥔 채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빠 롯도 흑백석 중독으로 앓아누웠다. 햇싱도 이제 모베오 채굴을 해야 했다. 좁은 갱도 안에 들어갔던 햇싱은 무거운 돌에 입이 짓눌려 기절했다. 다행히 구조는 됐지만 입술과 인중 사이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아무리 치료해도 상처는 낫지 않았다. 롯은 자신과 햇싱을 치료하기 위해 랑바린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조그마한 은 키마상을 챙겼다. 

그 무렵 마을에선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불이 타는 듯, 비가 내리는 듯, 바람이 부는 듯, 땅이 울리는 소리가 섞인 소리였다. 랑바린의 변화를 감지한 랑바린인들은 채굴단에게 작업을 중지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랑바린인들이 일하기 싫어 꾀를 쓰는 거라 여긴 채굴단은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가한 모베오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마을 길과 사람들이 사는 마당까지 파헤쳤다. 마을의 길과 마당 곳곳엔 땅굴이 생겼다. 

수십 미터까지 이어지는 이 땅굴로 인해 숱한 사고가 일어났는데, 드바의 세 살짜리 손자는 집 앞마당에 뚫린 땅굴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시름시름 앓던 드바도 손자의 뒤를 따라갔다. 랑바린을 이끌 다음 드바는 나오지 않았다. 드바 선출은 마을 사람들의 전원회의로 이루어지는데 마을 사람들 전원이 모일 수 있는 날이 없고, 일부는 흑백석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어서였다. 

망가진 랑바린 섬과 병든 사람들이 떠올라 머뭇거리던 롯과 햇싱은 숨겨 놓은 배를 타고 섬을 도망치듯 나왔다. 그게 랑바린에 남긴 마지막 발자국이었다. 

뭍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저 화산이 폭발하며 화산체 위에 있던 랑바린 섬은 10%만 남고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던 모베오 역시 화산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화산 폭발로 모베오를 채굴하던 많은 랑바린인들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랑바린인들은 키마의 성스런 땅을 잘못 건드려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통탄했다. 

햇싱도 랑바린 섬이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모베오 채굴 때부터 낫지 않던 햇싱의 입술의 상처는 계속 덧났다. 낫지 않는 상처보다 랑바린 섬에 다시 갈 수 없다는 게 햇싱을 더 아프게 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와징카웃과 랑바린을 지키고 있는 나무와 꽃 그 속에서 사는 동물들이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햇싱은 이 얘기를 롯에게 전해주었다. 아빠 롯은 자연과의 소통이 더 긴밀해진 햇싱을 이때부터 랑바린어로 ‘속삭이는 바람’이란 뜻의 룬아라 불렀다. 

두 번째 이름을 얻은 룬아는 귓가에 맴도는 생명들의 소리가 신경 쓰여 잠이 오지 않았다. 룬아는 사라졌다는 랑바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살아남은 랑바린 친구 몇몇과 작은 뗏목을 만들어 랑바린 섬으로 향했다. 꼭 다시 랑바린 섬에 갈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성난 바다는 그들을 낯선 땅에 데려 놓았다. 거기서 만난 무서운 어른들은 룬아와 친구들을 어두운 지하 창고에 가두었다. 사람이 사람을 물건처럼 돈을 주고 파는 일이 그곳에선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막 팔려 갈 위기에 처해있던 룬아는 떠돌이 한국인 여행자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다. 모든 게 너무 다른 룬아와 그 한국인은 절친이 됐다. 한국어는 그때부터 익혔다. 그 한국인 친구와 헤어진 룬아는 아빠 롯을 찾아, 그리고 자연이 살아있는 곳을 찾아 세계 곳곳을 떠돌다 화성까지 오게 됐다. 



다신 갈 수 없는 랑바린 섬에 대한 체념 때문인지, 얘기를 마친 룬아의 얼굴은 마치 남의 얘기를 한 듯 덤덤했다. 

혜성은 룬아가 겪은 엄청난 일들이 믿기지 않아 한참 충격에 빠져 있다 겨우 입을 뗐다. 

“꼭 다른 행성에서 일어난 얘기 같아. 근데 랑바린의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들렸다는 소리 말이야. 꼭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 같은데…….”

“맞아. 그 소리. 좀 더 귀 기울여 듣고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그땐 아직 햇싱으로 살고 있을 때라 모든 게 낯설어서 용기가 부족했어.”

“누구도 그런 재난을 막을 수는 없어. 그때부터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가 들렸다니…… 이제야 알게 된 건 너 같은 랑바린 사람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서겠지.”

모베오 채굴만 아니었다면 랑바린인들은 대피를 했을 테고 그럼 살았을 것이다. 

랑바린의 비극을 불러온 모베오는 참 신기한 물질이긴 했다. 모베오에 다른 광물과 물을 섞으면 고에너지 빔 상태가 돼 극성이 반대로 바뀌어 순간적으로 물질의 상태가 반질량 상태가 된다. 그럼 중력과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은 채 광속으로 순간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공간은 모베오와 섞인 광물의 원산지이다. 모베오에 뉴욕의 흙을 섞으면 순식간에 뉴욕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너도나도 모베오를 이용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모베오 채굴을 독점한 기업은 혜성의 우주 최대 라이벌인 사이언이 이끄는 갓필드였다. 텐키마에 무작정 들어갔다 모베오를 처음 발견하고 페르시아만으로 순간 이동한 사람이 바로 오라지다. 오라지가 모베오를 처음 발견한 스토리는 그녀의 영상 자서전 ‘어메이징 오라지’에 업로드돼 있는데 모베오 발견 영상만 1억뷰를 돌파했다. 혜성도 물론 그 영상을 봤다. 

안 그래도 세계의 돈이란 돈은 갈퀴로 긁어모으던 갓필드는 모베오로 주가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모베오가 발견되던 당시는 화석 에너지 대란으로 막 수출입품 품목이 제한되던 때였다. 그런데 기적처럼 놀라운 에너지원이 발견되어 순간 이동 배송의 시대가 열렸다. 허공에서 물건이 뿅 나타나고, 사람이 빛처럼 이동하는 마법 같은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신기한 마법의 물질 모베오는 범죄에 이용될 소지도 다분했다. 폭탄이나 무기가 눈 깜짝 사이에 이동할 수도 있고,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이나 나사 같은 주요 시설로 침입하게 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었다. 모베오를 통한 순간 이동이나 배송은 엄격한 관련 규정을 준수해야 했다. 규정도 까다로웠지만 워낙 비싼 희귀물질이라 돈이 좀 많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세계 거점 도시의 부촌에만 모베오를 통한 순간 이동 서비스점이 있었다. 명성의 최고 부촌인 광남구 광기동에도 갓필드에서 운영하는 모베오 순간 이동 전문점이 있었다. 1층이었지만 5층 높이로 층고가 높게 지어진 서비스점 안엔 시도 때도 없이 흙덩이와 돌이 떨어지며 물건과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모베오 순간이동 서비스점 주변엔 서비스를 이용하러 오는 사람보다 모베오 서비스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구경꾼들은 너도나도 어서 저 귀한 물질에 몸을 실어 순간 이동할 날만을 꿈꿨지만 랑바린이 해저 화산 폭발로 사라져 버리자 모두 물거품이 됐다.

모베오의 인기에 묻혀있던 생산지 랑바린은 그때 잠시 주목받았다. 채굴단을 이끌던 갓필드의 간부들의 사망 소식과 지상 유일의 모베오 생산지가 사라졌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언론보도가 나갔다. 뉴스를 본 사람들은 간부들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지만 꿈의 물질 모베오가 사라진 것을 더 아쉬워했다. 그 어떤 언론도 대다수 채굴 노동자로 일했던 죽은 랑바린인들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다. 랑바린이 사라지며 그 땅을 원래 지키던 극소수의 사람들도 사라졌기에 그 속에서 벌어진 일도 묻혀버린 것이다. 

언제나 지구를 위한 일이라며 설쳐대던 갓필드가 이런 만행을 벌이다니…… 사람들이 모베오가 생산되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토록 열광할 수 있었을까? 

사라져서 돌아가지 못할 곳을 고향으로 둔데다 모베오 채굴 때 생긴 입술 흉터로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룬아를 보니 가슴이 찡했다. 마스크로 가려진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 건, 낫지 않는 상처가 꼭 사라진 랑바린 섬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혜성이 마스크로 가려진 룬아의 입술을 보며 무겁게 입을 뗐다.

“미안해. 난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모베오를 즐길 생각만 했었어.”

“괜찮아. 이미 지난 일이고 난 살아서 화성에서 아빠를 만났고, 지금 너랑 얘기하고 있잖아.”

“지난 일이라니! 화산 폭발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쳐. 모베오 채굴 때문에 너네 엄마가 돌아가셨잖아! 채굴단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엄마랑 함께 있었을 거 아냐!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랑바린 사람들을 전 세계 각지로 뿔뿔히 흩어졌잖아. 어떻게 화가 안 날 수가 있어?”

“화내지 마. 랑바린에선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아.”

“여긴 랑바린이 아니잖아. 화가 나서 미치겠다고!”

룬아가 조용히 말했다. 

“화를 내는 건 자신의 우주를 파괴하는 일이야. 랑바린인들은 오래되고 성숙한 우주를 가진 사람일수록 투명해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 미성숙한 우주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우주를 제한된 색으로만 바라본다고 여겨. 미성숙한 사람은 무수한 색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가 선택한 몇몇 색에만 의지에서 삶을 살게 돼. 모베오를 캐러 온 사람들 중에선 투명한 우주를 지닌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어. 모두 온갖 색에 물들여진 사람들 뿐이었어. 랑바린 사람에겐 그 사람들이 무서운 무기를 들고 자꾸 뭔가를 요구하는 어린아이로 보였어. 무기를 놓을 줄 모르고 자연에 품에 안길 줄 모르는 아이들 말이야. 그런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뿐이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들 같은 그들의 마음에 사랑과 자유 평화가 있다는 건 일깨워 주는 일이었는데, 랑바린 섬이 그렇게 사라질 줄은 몰랐어.”

이젠 지구를 넘어 화성까지 진출해서 온갖 쇼를 벌이는 돈 괴물 사이언이 떠올라 혜성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랑바린에서 모베오를 빼돌린 사람들은 어린애가 아니라 엄청난 돈을 먹고 크는 괴물이야. 그 사람들은 지금 너보다 아니, 이 지구에서 가장 잘 먹고 잘살고 있어! 그런데도 화가 안 나?”

“응. 안 나. 내 속엔 내가 없거든. 내가 자꾸 생기려고 하면 없애버려.”

“자기 마음속에 자기가 없으면 누가 있단 말이야? 혹시 너 AI냐?”

룬아는 어이가 없는지 한참 빙그레 웃다 말했다. 

“안타깝게도 피와 살이 뜨거운 인간이야. AI처럼 온갖 정보를 다 흡수할 순 없지만 마음으로 모든 게 될 수 있어. 난 우주의 모든 것이 되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야. 그게 내 꿈이야.”

“모든 것이 되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 무한 변신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그건 인간으로선 불가능이잖아. 로봇이나 외계인이라면 모를까…….”

“인간도 가능해. 너도 우주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혜성이 기겁해서는 외쳤다. 

“아니! 난 그런 말고 꼭 우주대스타가 될 거야!”

“알겠어. 좋은 음악엔 모두를 위한 마음이 들어가 있어. 그래서 울림이 크지. 네 음악도 모두를 위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 울림이 큰 노래야. 그런 노래를 만들고 노래하는 너니까 우주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자격이 충분한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우주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뭔 소린지 모르겠네. 말은 참 무슨 뜻인지 해석을 해야 해서 골치가 아파. 우린 그냥 음악으로 소통하는 게 제일 빠른 거 같아. 내가 우주와 소통하는 노래를 들려주지!”

혜성은 <뜬금>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찼다 뻥! 떴다 붕! 터졌다 빵!

뻥붕빵 들어볼래?

빵붕뻥 먹어볼래?

뜬금 없는

지금 없는     


룬아의 초록 눈동자가 혜성의 당찬 목소리로 넘실거렸다. 인간이란 두 우주가 통하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혜성은 어서 우주명곡을 완성해서 자신의 우주로 통하는 멋진 초대장 같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진짜 한 달 이내로 멋지게 완성해서 들려줄게.”

“한 달? 꽃들이 모두 우주로 돌아갈 때쯤?”

“으응? 겨울이 시작될 때를 말하는 거야?”

“아, 겨울이었어. 랑바린엔 겨울이 없어서 겨울이란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

“겨울을 그렇게 말하니 딴 계절 같네. 꽃들이 우주로 돌아갈 때 우주에서 제일 빛나는 노래를 들고 올게. 기대할 준비해!”

겨울을 모르는 사철나무같이 룬아의 초록 눈이 어둠 속에서 유독 빛났다. 어둠이 빛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것처럼 룬아가 겪은 아픔이 눈동자를 별처럼 빛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밤이면 별빛뿐인 랑바린 섬의 어둠에 익숙한 룬아는 맨발로 다시 화성산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비롭기까지 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궁금했다.

랑바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우주라는 걸 자각했다고 룬아가 그랬다. 룬아도 랑바린에 살았으니 이미 우주라는 걸 자각했을까? 자각했으니 그렇게 상세히 알려줄 수 있었던 거겠지……. 

세상엔 예쁘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돈 많은 인간보다 우주 같은 마음을 지닌 인간이 더 드물다. 그러니 룬아는 자신의 우주같은 마음을 자랑스레 여기며 당당하게 마스크를 벗고 다녀도 될 텐데. 

흉한 상처도 그 드넓은 마음으로 다 커버가 되지 않을까? 아니다. 세상엔 우주 같은 사람보다 좀생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룬아의 진짜 얼굴을 보고 손가락질부터 할 거다. 그럼 룬아는 상처를 받겠지. 크든 작든 상처는 쑤실수록 아프다. 지속적인 아픔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얼굴을 가리는 건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룬아의 안전 조치다. 

룬아의 얼굴을 보려면 사람들이 모두 우주같은 마음을 가지거나, 룬아가 강철 멘탈에서 다이아몬트 멘탈로 바뀌는 수밖에 없다. 모두의 맘이 바뀌는 것보다 룬아 하나가 바뀌는 게 더 쉽긴 하지. 근데 얼마나 기다려야 룬아의 마음이 바뀔까? 그 애 마음이 바뀌면 얼굴을 볼 수 있을텐데…….

혜성은 가만히 룬아의 마스크 밑 얼굴을 상상하다 화성산을 내려왔다. 

벌써 밤이 꽤 깊어 있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다 일본의 지진 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지진이 일어나기 전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정말 세상이 멸망하려는 건가? 그 전에 룬아 얼굴은 볼 수 있을까? 

혜성은 씁쓸하게 밤길을 걸었다. 전력난으로 가로등 대부분이 꺼진 화성 시내는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컴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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