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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 선화 Oct 09. 2024

얼굴을 가린 빠순이

지구 밖 화성의 올림포스 산에 오른 사이언으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한 시간, 혜성은 고요히 지구 속 화성산을 올라갔다. 숨은 차도 대화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화성 시민들의 성지 화성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높기만 높고 아무 생명체도 살지 않는 올림포스산보다 다채로운 생명의 활기가 넘치는 화성산이 훨씬 낫지!

거친 숨을 고르던 혜성은 굵다란 느티나무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옥상에 있는 작은 돔의 정면면이 뚜렷하게 보였다. 저 돔 아래 있던 혜성의 교실은 이제 운석 전시실이 됐다. 

난데없이 운석이 떨어져 구멍이 난 천장엔 그 아찔했던 순간을 재연하기 위해 뚫린 상태를 보존한 채 강화유리가 깔렸다. 강화유리가 설치된 천장과 통하는 옥상엔 뚫린 천장의 덮게 격인 둥그런 작은 돔이 설치됐다. 운석 전시실 안에서 보면 하늘이 훤히 보인다.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다는 건 밖에서도 안이 보인다는 것. 그런 이유로 옥상은 폐쇄됐고, 혹시 누가 돔을 부수고 운석을 훔쳐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엔 고압 전기까지 흐른다. 

우주의 기적을 내려주었던 성스러운 꿈의 고향이 사람들이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지뢰가 쫙 깔린 비무장지대 같은 위험지대로 변질되다니……. 이건 다 화성에서 설쳐대는 사이언 때문이야!

불끈 열이 솟구처 오른 혜성은 사이언이 있는 화성을 찾아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화성이 어디 붙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괜히 제일 빛나는 별만 째려보다 다시 꿈의 고향 옥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곳을 탈환하기 위해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하기도 했었지……. 

요즘 수도 명성엔 스파이더맨이 시도 때도 없이 출현했다. 실내 암벽 등반은 시시하고, 산에 가자니 화석 에너지 대란으로 장거리 외출이 쉽지 않아, 고육지책으로 고층 빌딩을 절벽 삼아 스파이더맨처럼 오르는 빌딩 클라이밍 붐이 일어난 것이다. 고층 빌딩이 없는 화성에도 간혹 화성 외곽의 빈 아파트에서 빌딩 클라이밍 전용 접착제를 바르고 클라이밍을 하는 중년층들이 있긴 했는데, 난민들이 오고 나서부턴 아예 볼 수가 없다. 

우주대스타가 되기 위해 혜성은 화성의 유일무이한 스파이더맨이 되기를 자처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반드시 옥상에 발을 딛겠다는 일념하에 클라이밍용 접착제를 듬뿍 바르고 벽타기를 하다 그만 손과 발이 학교 벽에 딱 붙어버렸다. 너무 떡칠한 접착제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영락없이 끈끈이에 붙은 파리 신세가 된 혜성은 손목의 스마트 워치로 겨우 라인과 배달에게 구조 요청을 해 그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근데 이 모든 불상사는 적나라하게 CCTV에 찍히고 말았다. 오라지 이사장은 한 번만 이런 일이 있으면 운석 강탈범으로 신고하겠다고 반협박을 했다.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그 이후론 옥상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말 손에 잡힐 듯 바로 코앞에 있는데, 꿈의 고향에 발도 들일 수 없다니…… 사무친 그리움에 코끝이 시큰거린 지경이었다. 혹시 고향을 떠나온 기후 난민들의 심정도 이럴까? 

기후 난민들은 미래의 꿈을 꿨던 땅이 돌이킬 수 없는 기후비상사태로 파괴되어 다신 돌아갈 수 없다. 그들에겐 이 지구 속 화성이 사이언이 설치고 다니는 저 지구 밖 화성만큼 낯설 것이다. 몸은 화성 땅에 겨우 붙어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잃어버린 꿈을 꿨던 그 땅에 있겠지. 꿈이 있다는 건 나아가야 할 시공간의 방향이 확실하다는 건데, 그걸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황망할까. 공연 갔을 때 얼핏 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이 빠진 듯 눈동자가 텅 비어있었다. 단 한 사람 룬아만 빼고……. 

초롱초롱한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룬아는 라인이 지정한 혜성의 공식 빠순이로, 해저 화산 폭발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순간 이동물질 모베오의 지구 유일의 생산지 랑바린에서 왔다.

다른 기후 난민들은 홍수, 지진, 화재 등으로 살던 곳이 파괴됐어도 남아있기라도 한데 랑바린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가장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을 것 같은 그 애의 눈동자는 이상하게 늘 맑고 고요한 호수 같았다. 

정말 보통 멘탈이 아닌 듯했다. 강철 멘탈을 가진 그 애를 만난 건 난민 아파트에서 콘서트를 하던 날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온통 알 수 없는 외계어를 남발하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여자애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 앤 탱자 밴드의 노래가 정말 우주에서 제일 좋다며 방방 뛰었다. 

마치 오래된 해외 팬을 만난 것처럼 신나게 룬아와 얘기를 주고받다가 왕소름 돋는 얘기를 들었다. 우주의 기적처럼 우주 명곡이 내려오던 순간 룬아가 화성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단다! 

랑바린의 푸른 자연 속에 살던 룬아는 갑갑한 콘크리트 아파트가 싫어 화성에서 제일 울창한 화성산에 종종 들렀다. 그러다 다친 무지갯빛 깃털의 새를 발견하고 치료해서 날려 보내줬는데, 마침 그게 혜성의 눈에 들어왔고, 우주적 창조의 순간을 맞을 수 있었던 거다.

혜성에게 일생일대의 기적을 선물했던 새는 한국에서 팔색조로 불리는 새로, 랑바린 섬에서 전해오는 키마의 전설과 관련돼 있었다. 그 전설은 꽤 흥미로웠다. 

아주 먼 옛날, 오색 찬란한 깃털을 뽐내는 거대한 새가 랑바린에 날아왔다. 덩치가 크고 화려한 색을 뽐내는 새가 수컷 ‘키’이고, 그보다 몸집이 작은 새는 암컷 ‘마’였다. 랑바린인들은 둘을 키마라 불렀다. 

키마는 살아있는 벌레를 먹지 않고, 살아있는 풀을 뜯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 새였다. 

피리 소리를 내는 키마는 모든 생명과 소통하는 능력을 지녔다. 랑바린 인들은 신령한 새 키마를 정성스레 모셨다. 

랑바린의 오동나무 숲 ‘텐키마’에 머물던 키마는 알을 낳은 다음 태양을 향해 사라졌고, 부화된 새끼는 뿔뿔이 흩어졌다가 그중 몇 쌍만 천년 후에 랑바린으로 돌아왔다. 천년에 한 번 키마가 돌아와 알을 낳으면 랑바린에 커다란 축복이 내렸다. 아프던 사람들은 모두 나았고, 마을에선 신기한 식물과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으며, 사람들의 마음엔 평온이 찾아왔다. 

모계 사회인 랑바린의 전통과 지식을 전수하는 여성 지도자 드바는 키마가 돌아오던 날을 그림으로 남겨 보존하며 사람들에게 키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랑바린인들은 키마 그림을 집집마다 걸어놓고 키마가 다시 랑바린으로 돌아올 날을 간절히 염원했다. 

랑바린인들이 신처럼 숭상하던 키마는 룬아의 증조할머니가 젊었을 때 돌아왔다고 한다. 암수가 동시에 오지만 그때 먼저 돌아온 건 암컷 마뿐이었다. 배에 털이 잔뜩 뽑힌 마는 힘겹게 가장 오래된 오동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털이 뽑힌 마만 돌아온 게 뭔가 이상했지만 랑바린인들은 곧 수컷 키도 돌아와 축복을 내리리라 믿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키는 오지 않고, 랑바린인들 조차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텐키마에 외부인이 들이닥쳤다. 그는 총으로 가장 오래된 오동나무에 앉아있던 마를 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드바는 그 외부인을 얼른 섬 밖으로 추방하고는 총 맞은 마를 치료 했다. 드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는 천년의 생이 담긴 깃털만 남기고 빛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룬아의 귀엔 오색 깃털로 만들어진 귀걸이가 항상 걸려 있다. 랑바린인이라면 누구나 마지막 마의 깃털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룬아는 키마가 전 세계에 분포하던 새라며 한국식 이름을 알려줬다. 그건 바로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는 수컷 봉, 암컷 황을 합쳐 불리는 ‘봉황’이었다. 

봉황을 떠올리니 랑바린인들이 사랑하는 새 키마의 모습을 얼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얘기를 들려준 룬아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그 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색 바탕에 꽃잎이 네 개인 꽃이 기하학적으로 수놓아진 천으로 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초록 눈동자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팬데믹이 자주 일어나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이 많고, 난민 아파트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혹시나 모를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늘 마스크를 착용하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콘서트 이후 종종 개판에 노래를 듣기 위해 오던 그 애는 늘 그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 고온으로 다들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붓는 날도, 룬아는 마스크와 한 몸이었다. 음료며 떡 과자 같은 걸 줘도 그 애는 한 번도 즉시 마스크를 벗고 먹지 않았다. 

혹시 학교에서 자주 만나다 보면 마스크 아래 숨겨진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난민 아이들이 학교에 입성하는 날을 은근히 기다렸는데 그 앤 학교에 오지 않았다. 한국어를 정말 모국어처럼 잘하는 룬아는 학교에 한 번도 다닌 적이 없다고 했다. 학교에 온 난민 애들 몇 명에게 통역기로 깃털 귀걸이에 마스크 쓴 소녀를 아냐고 물었다. 거의 다 몰랐지만 특이한 깃털 귀걸이를 하고 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소녀를 봤다는 애도 있었다. 역시나 그 애는 아파트 안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고 있었다. 

룬아는 왜 마스크를 벗지 않을까? 도시 괴담 속 빨간 마스크처럼 얼굴에 커다란 상처라도 있는 걸까? 

굳이 남의 상처를 들출 필요는 없기에 그냥 마스크를 룬아의 얼굴로 여기려고 했다. 꾹 눌러놓은 궁금증이 증폭된 건 그 애가 빠순이 인증을 한 날부터였다. 

여느 때처럼 개판에서 멤버들이랑 연습을 하고 있는데 룬아가 불쑥 찾아와서는 파란 바탕에 하얀색 동심원이 겹겹이 있는 500원보다 조금 큰 신기한 돌을 건넸다. 그건 랑바린 섬의 꽃돌로 가지고 있으면 새로 태어날 수 있으니 우주대스타로 다시 태어나라고 했다. 

제일 가까이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라인은 혜성에게 빠순이가 생겨서 축하한다며 박수를 쳤다. 한국어를 잘하지만 빠순이란 말은 모르는 룬아는 의아하게 라인을 쳐다봤다. 라인은 친절하게 빠순이의 의미를 알려줬고, 그걸 알아들은 룬아는 자랑스레 혜성의 빠순이가 맞다고 대답까지 했다. 사라진 고향의 돌을 간직하고 싶을 텐데 선뜻 그런 희귀한 걸 조공하듯 내놓는 걸 보면 확실히 빠순이가 맞는 것 같긴 했다. 

말로만 듣던 빠순이가 생기자 혜성의 붕 뜬 마음은 지구를 뚫고 우주로 날아간 듯했다. 자신의 노래를 그렇게 좋아하고 꿈을 응원해 주는 룬아의 얼굴이 더더욱 궁금했다. 몇 번이고 룬아에게 얼굴을 한 번만 보여달라고 부탁했지만 눈웃음만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혜성은 최초 빠순이의 얼굴을 정확히 모른다. 

아직도 주머니 속엔 꽃돌이 있다. 룬아가 건넨 순간부터 꽃돌은 언제나 혜성과 함께였다.  

꿈의 고향 옥상엔 갈 수 없지만 어쩌면 빠순이 룬아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걸핏하면 아파트를 나와 화성산에 오는 그 애는 산에서 홀로 자기도 한다. 무섭지 않냐고 물었지만 랑바린에선 늘 자연 속에서 잠들었다며 괜찮단다. 오늘처럼 옥상이 그리워 여기서 노래를 부를 때면 그걸 들은 룬아가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꼭 우주 명곡이 내려오던 그 날처럼 말이다. 

룬아의 초록 눈을 떠올리며 혜성은 열정을 다해 우주 명곡을 연주했다. 

살랑살랑 가을바람에 나뭇가지와 꽃들이 흔들리고 하늘에 뜬 별이 유난히 더 반짝였다. 

혜성이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의 팬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마스크를 쓴 채 긴 머리를 휘날리는 룬아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귀에 걸린 오색찬란한 깃털이 휘날렸다. 봉황이 상상 속 새인 것처럼 키마도 랑바린의 전설 속 새로 여기고 있지만, 저 깃털 귀걸이를 볼 때마다 키마가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온 룬아가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 노랜 언제 들어도 키마가 오는 날 우리 마을에서 연주했다는 음악과 비슷한 것 같아. 정말 좋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랑바린에서 전해오던 음악과 비슷하다니. 그 섬 근처에서 날아온 팔색조 때문인가? 새와 감응한 그 날은 혜성의 전설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 엄청난 전설이 시작된 건 룬아의 자연을 아끼는 마음 덕분이다. 늘 자연과 가까이 닿고 싶은 룬아는 오늘도 맨발이었다. 

“신발은 또 어쩌고? 다치면 어떡해?”

“산은 날 지켜주기만 했어. 노래는 잘 되고 있어?”

“아직……우주대스타처럼 빛이 가득한 노래를 만들고 싶은데 잘할 수 있을까?”

“이미 넌 아름다운 별을 품은 우주야.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네 속에 있는 별의 씨앗이 여물길 기다려봐.”

“넌 네 빠순이라 좋은 말만 해주는구나…….”

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랑바린에선 인간을 우주로 여겨. 처음 이 얘길 들을 땐 이해가 잘 안 됐어. 한국어를 가르쳐 준 한국인 친구가 왜 인간이 우주인지 알려줬어. 사람 몸에는 우주에 있는 별에 맞먹는 원자가 있대. 우주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인간도 우주야. 지구 땅에 발붙이고 있는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시각도 자신의 우주를 탐험 중인 거야.”

문득 사이언의 화성 탐험에 늘 환호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인간이 모두 우주라면 그 사람들도 우주라는 얘기다. 그럼 그 사람들은 본인들이 우주를 탐험 중인 줄도 모르고 남의 우주 탐험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건가? 근데 정말 인간을 우주라고 할 수 있나? 아무리 눈 씻고 주위를 둘러봐도 우주처럼 끊임없이 확장하고 드넓은 포용력을 지닌 인간은 찾아볼 수 없다. 

혜성이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지구엔 자기 가족, 자기 집, 자기 몸밖에 모르는 좀생이들만 득실거리잖아. 대체 왜 그런 걸까? 아,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모두 자기가 우주란 걸 잊은 걸까? 하긴 나도 뭐 우주보단 좀생이에 가깝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의 감옥에 갇혀 자신이 우주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 랑바린인들은 모두 자신이 우주란 걸 자각할 수 있었어. 감각의 지배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든. 사실 인간의 감각이란 건 그리 믿을 게 못 돼. 아무리 유목민처럼 뛰어난 시각을 지닌 사람도 자기 몸을 드나드는 공기를 볼 수는 없어. 가시광선 영역 안에서 보이는 사물만 감지할 수 있으니까. 또 박쥐처럼 초음파를 들을 수 있는 청력도 없고, 개처럼 후각으로 세상을 느끼지도 못해.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은 너무 좁아.”

학교 근처에도 안 가본 룬아는 학교를 11년째 다닌 혜성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룬아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감각 밖의 넓은 우주를 보려면 자신이 우주라는 걸 자각해야 하는데 이미 감각에 길들여져서 쉽지 않지. 하지만 다행히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 자신이 우주라는 걸 깨닫기도 해. 사랑을 하며 새로운 창조의 순간을 맞을 때랑 삶에서 커다란 감동이 찾아올 때야.”

갑자기 옥상에서의 일이 떠올라 혜성은 흥분이 됐다. 

“나도 그런 적 있어! 저 옥상에서 네가 살려준 팔색조를 본 순간 머리에 막 불이 들어오는 것 같더니 우주명곡이 만들어졌다니까!” 

룬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예술가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가 우주라는 걸 느끼기도 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하거나 부모가 되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아. 생명의 탄생은 또 다른 우주를 창조하는 거니까.”

혜성이 우주명곡이 내려오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진짜 나도 그때 노래가 색깔로 보이고, 내 마음이 우주처럼 넓어진 것 같았어! 무슨 초능력을 얻은 줄 알았다니까. 근데 그날 이후 그런 일은 없었어. 커다란 감동을 느끼면 다시 그런 기적을 맛볼 수 있을까? 대체 얼마나 큰 감동이어야 하는 거야?”

“커다란 감동을 느끼려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커다란 감동을 주면 돼. 너처럼 음악을 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우주란 걸 지속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대. 자신이 느꼈던 감동을 잊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면 더더욱 감동이 커져서 자신에게 돌아오거든. 우주의 모든 건 에너지인데 감동처럼 큰 에너지는 없어. 음악은 인간이란 우주를 관통하는 굉장한 진동을 지닌 우주의 언어야. 넌 이미 우주라는 걸 느끼기도 했고 음악이란 우주의 언어에 능통하니 다시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혜성은 100개 외국어를 마스터한 능력과도 바꾸지 않은 우주의 언어, 음악에 능통한 자신이 새삼 자랑스러웠다. 

“음악이 우주의 언어가 맞긴 하지! 어서 멋지게 노래를 완성해야 하는데, 잘 안 돼. 옥상에서 하면 잘 될 것 같은데……."

룬아가 밤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을 보며 말했다.

“어디 있든 네가 우주라는 걸 잊지 말고 별의 씨앗이 여물어 잘 자랄 수 있게 묵묵히 기다려봐. 저기 보이는 별빛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100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이라고 하잖아.” 

“그렇게 오랜 시간 전에 출발한 빛들이었어? 빛을 전하는 건 참 힘든 일이구나. 저기 운석이 진짜 소원을 이루어주는 운석이라면 금방 우주대스타가 될 텐데……. 그 전에 운석이 내게 돼야 하겠지만…….”

룬아가 옥상에 있는 돔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운석이 지구에 왜 떨어지는 줄 알아?”

이제껏 그냥 운석이 자기 손에 떨어지길 바라만 왔지. 왜 떨어지는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혜성은 한참 뜸을 들이다 겨우 답했다. 

“글쎄…… 요새 기후비상사태 때문에 하도 난리라 사람들이 많이 불안해하잖아. 우주가 애들 사탕 주며 달래듯 인간들을 달래려고 보낸 건가? 근데 좀 달래주려면 지구인 숫자만큼 운석을 보내야지. 왜 그렇게 적게 보내서 사람들을 더 안달 나게 하는 건지 원…….”

룬아가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석은 사람들의 소원을 위해 온 게 아니야. 지구에 빛을 주기 위해 온 거야.”

“그런가? 그 빛이 나한테 좀 왔으면 좋겠는데…… 사실 앞날이 깜깜할 때가 더 많거든. 빠순이 널 만나니 다시 밝아졌네. 고마워. 정말.”

“우주는 좋은 걸 퍼뜨려. 사람들의 우주는 다 연결돼 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거야.”

룬아는 우주에 대해 알려주는 선생님 같았다. 룬아의 얘길 확실히 다 믿는 건 아니지만 하품만 나오는 학교 수업과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온갖 잡소리보다 재미있고 마음이 더 끌리긴 했다. 우주밖에 모르는 룬아의 초록색 눈동자에 하늘에 있는 검은 우주가 가득 담겼다. 

저 오묘한 빛을 지닌 눈동자 밑에 숨어 있는 코와 입은 어떻게 생겼을까? 마스크를 확 잡아 뜯어서 룬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빠순이, 대체 얼굴은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미안해. 난 얼굴이 남들과 너무 달라. 넌 날 이상하게 여길 거야. 어쩌면 날 싫어할지도 몰라.”

난민 아파트엔 영양소 부족으로 생긴 노마라는 병 때문에 코나 입이 일그러진 애들이 있다. 혹시 그래서 마스크를 벗지 않는 건가?

“네가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 인간은 우주라며! 난 우주 같은 사람이라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빠에게도 그날 이후 내 얼굴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어.”

“그날? 랑바린 섬에서 살 때를 말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늘만 보던 룬아가 슬며시 입을 뗐다. 

“너무 낯설고 강한 바람이 랑바린에 들이닥쳤어. 그때 내 얼굴도 바뀌고 마음도 바뀌었지.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얻었어. ‘룬아’이기 전에 난 햇싱이었어. 랑바린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성장하면 이름이 바뀌어. 햇싱은 내 첫 이름이야.”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얻은 혜성의 첫 이름은 탱자, 그리고 잠시 별똥이라 불리다, 지금까지 쭉 환혜성으로 살고 있다. 

평생 똑같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세계에 사는 혜성에게 마음이 성장하면 이름이 바뀌는 세계에서 온 룬아가 그저 신기했다. 룬아는 조용히 햇싱으로 살았던 랑바린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혜성은 룬아의 이야기를 통해 사라진 랑바린 섬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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