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은 ‘나’와 ‘너’가 없고 엄마 뱃속에서 탈출한 순서에 입각해, ‘상호존중’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상하존중’만 강조하는 호칭체계가 발달해있다 보니 인간관계가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사용하는 말의 범위에 갇힌다. 누군가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어도 나이가 언어 사용을 좌우하다 보니 상대에게 다가가는 데 한계가 있다. 동갑을 만나지 않고서는 말을 편하게 주고 받지 못한다. 한국말의 특성상 주민등록증을 까서라도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따져야 서열도 정해지고 거기서 내가 사용해야 할 언어의 범위까지 교통정리가 되다 보니 동갑이 아니고서는 대등한 인간관계가 힘들다. 이 사실이 날 처음 깨운 이래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들 중에 나는 왜 하필이면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지구상에 흔하지도 않은 언어환경 아래 태어났는지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뱃속을 탈출한 순서에 따라 정해놓은 호칭체계를 집안을 넘어 담장 밖으로까지 확장해 사용하다 보니 우리는 공적인 인간관계도 아니고 사적인 인간관계도 아닌 어정쩡한 인간관계를 마주할 때가 많다. 공적인 인간관계가 사적인 인간관계의 호칭으로 좌우된다는 얘기는 공적인 인간관계의 부재를 의미한다. 공적인 인간관계의 부재란 공적인 사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고, 이 얘기는 이 땅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society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집안에서부터 너와 나로 만나지 못하고 누가 위고 누가 아래냐로 만나다 보니 소통은 멀어졌고, 부모와 자식 간, 형제 간끼리도 명령, 복종, 지시 언어가 왔다갔다 한다. 직장에서건, 학교에서건 명령과 지시, 통제가 잘 먹히는 현실도, 우리 사회가 토론이 부재한 이유도 이 호칭체계가 한몫 했다고 본다.
‘나’와 ‘너’가 같은 나이 안에서만 성립하다보니 또래문화, 또래집단이 유난히 발달했고, 위와 아래를 따지는 상하 서열 사회이다 보니 정치고 직장생활이고 가정이고 다 조폭 발상이 먹힌다. 좋은 말로 경로우대, 장유유서지 따지고 보면 웰컴 투 조폭 세계다. 너도 인간, 나도 인간! 인간 대 인간이라는 눈높이로 상대방을 보지 않고 나이, 성별을 개입시키다 보니 인간관계가 참 피곤하게 돌아간다. 영어나 다른 언어들은 성차별 언어라는 굴욕을 벗어던지기 위해 단어를 새로 만들어 내면서까지 거듭나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보고도 깨닫는 바가 없나 보다. 한국말은 성차별에다 ‘나이’까지 한 수 더해졌다 보니 총체적 난국인데. 어느 나라 언어보다도 변화가 시급한데. 에라, 나도 모르겠다인 걸까?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우수한 언어를 가졌다고 우리 스스로 목에 힘주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세종대왕의 작품 한글이 우수한 거였지 한국말이 우수하냐는 다른 얘기다. '평등'이라는 관문에서 일찌감치 탈락이고 비인간적인 언어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우수한 언어' 타령은 주제 파악을 못 했다는 얘기다.
엄마 뱃속 탈출은 개인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데 대한민국 땅덩이에서는 '우연'에 의한 이 탈출 순서에 굉장히 의미를 부여한다. 노력해서 얻어내는 서열이라면 수긍이라도 할텐데 조금 늦게 세상에 나오고 조금 빨리 세상에 나온 게 왜 권력으로 작동하는지 여기에 의문을 던지면 간첩으로 몰린다. 오히려 체화하고 살아가다 보니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녹아들려고만 한다. 종교가 따로 없다. 집밖에서도 "너 몇 살이야?" 이 한 문장이면 게임 끝이다. 상황 제패다. 특정부류에게 혜택이 부여되어 일방통행이 특징인 언어 속에서 삶이 정체되고 일상이 피곤하게 돌아가는데도 우리는 만성이 되어서 삶이 피곤한 줄도 모른다. 노동의 피곤함, 경제적 쪼들림은 호소해도 정신을 갉아먹는 이 불편한 언어 생활은 노터치 구역이다. 옛날에야 몰라서 혹은 우리끼리 문 걸어잠그고 외부 세계랑 접촉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현대를 살아가면서 이 사실을 언제까지 묻어둘 것인가!
우리네 인간관계는 ‘가족 아니면 남’이라는 발상이 녹아 있다. 오죽하면 나라 자체가 ‘국가(國家)’이겠는가. 그냥 ‘나라’라고 하면 될 걸 國에다 家를 붙여 버렸다. 한 나라 자체가 한 덩어리 가족인데 그 안에서 형, 언니, 누나, 오빠를 찾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직장에서, 식당에서, 관공서에서 호칭 땜에 말썽이 생기는 것도 다 이 ‘국가’라는 발상이 가져온 후유증이다. 온 나라가 가족인데 거기에 사회라는 시스템을 구겨넣다 보니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게 현주소다. 최근(2024년)에는 시청자들을 '가족'이라고 칭하는 뉴스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시청자가 왜 방송 진행자들 가족인가! 회사 사장님은 사원도 가족, 방송사는 시청자도 가족, 식당 사장님 가게 사장님은 직원도 가족, 모든 관계가 여전히 가족 개념 안에서 논다. 가족 그 너머는 미지의 세계, 신비의 세계라도 되는지 가족 그 이상의 관계는 날개를 펴지 못한다.
학교에서 토론 수업이 될 수 없는 것도, 사회전반적으로 토론이 부재한 것도 입시교육 어쩌고에서 이유를 찾지만, 가정에서부터 이 빌어먹을 호칭체계가 가로막아 토론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상하서열에 입각해 동생은 언니/오빠/누나/형의 언어에 억눌리다 보니 대등한 언어소통이란 게 불가능했다. 소통이 필요없었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통제하고, 통보하면 됐으니까. 내 생각을 말하면 말대답이 되는 집안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는데 학교라고 회사라고 바로바로 모드 전환이 될까! 가정에서 소통과 토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언어 생활을 하면서 학교 교육에 토론을 기대하는 건 엄청난 모순이다. 교육은 일상을 담보한다. 가정생활과 교육은 따로 놀지 않는다. 교육은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 이런 걸 다 거둬내고 따로 국밥처럼 교육 하나만 뚝 떼어내서 볼 수 없다. 교육 개혁도 그래서 어려운 거고. 맨날 입시제도만 뜯어고치는 교육 개혁 현실이 난 그래서 답답하다.
내 집안에서부터 형/언니/오빠/누나와 남동생/여동생 이렇게 줄을 세워놓고, 한국말에서 위와 아래를 따지게끔 만들어놓고 예의는 또 왜 찾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예의 찾아봤자 조폭 세계에서 예의 찾는 격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예의란 ‘상호’간의 문제이지, ‘상하’간의 문제가 아니다. 조폭 영화가 성공하는 이유가 뭘까? 일상이 조폭 발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영화 속 얘기가 다름 아닌 현실이다 보니 조폭 영화에 공감이 가서 인기가 많아지는 거다.
사실, 처음엔 ‘나’와 ‘너’가 없고 ‘상하구조’를 강조하느라 ‘상호관계’를 무시한 호칭체계를 분석해본다는 차원이었는데, 시작하고 정리하다 보니 한국말이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남성적인 언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평소에 존댓말 반말 체계에 비추어 봤을 때 한국말이 강자의 시선이 강조된 언어라고만 생각했는데, 호칭을 정리하다보니 ‘여성부재’ 언어라는 사실이 처절히 와닿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 혹은 유령으로 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억울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던 오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위, 너는 아래! 나는 1등 시민 남자, 너는 2등 시민 여자! 이 설정이어야 관계가 편하다면 인간 실격이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눈높이로 나와 너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적이지 않은 호칭 장애물은 다 걷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똑바로 마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내가 고민했던 부분을 하나씩 만나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