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여부가 직업 유무까지 결정해버리는 말
주부(主婦) - (한 가정의) 가장(家長)의 아내, 또는 주인인 부인.
1995년 판 ‘동아 새국어사전’에서 찾아본 말이다. 이 글을 쓸 당시가 2,000년대 초반인지 중반인지 그랬는데 당시 집안에 굴러다니는 사전이라고는 이거 한 권뿐이었다.
가장의 아내라면서 주처(主妻)도 아니고 ‘주부(主婦)’란다. ‘가장의 사위’가 성립하지 않는 걸 보면 이 말은 문제가 많다. 그냥 김땡땡 씨 남편, 김뿅뿅 씨 아내라고 하면 되지 ‘가장의 아내’라는 말은 왜 필요했을까? 눈가리고 아웅도 유분수지, 주부가 어떻게 '가장의 아내'인가? '가장의 며느리'이지. ‘주인인 아내’라면 ‘주인인 남편’에 해당하는 말도 있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주인'이라는 말은 보통 '물건'이나 ‘동물’에다 붙인다. 누군가를 부르고 가리키는 호칭과 지칭에 '주인'이라는 말이 왜 등장하는지 수상하다. 이 말의 정당성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주(主)는 ‘주인 주’자이지 ‘가장 주’자가 아니다. 부(婦)는 ‘며느리 부’이지 ‘아내 부’가 아니다. 즉, 주부는 ‘주인의 며느리’라는 얘기다. 부(婦)는 자전에는 ‘아내 부’로 나와 있지도 않지만 오늘날 얍삽하게 인터넷사전에 첨가해 놓은 뜻을 봐도 1차적인 뜻이 아니다. ‘아내 처(妻)’라는 글자가 엄연히 있는데 며느리와 아내를 동시에 뜻하는 글자를 가져다 썼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인이 시아버지면 ‘며느리 부’? 주인이 남편이면 ‘아내 부’? '주부', '부부'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무리 봐도 '시'라는 실체도 없는 이 한국식 한자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아니면 일본어에서 가져왔거나. しゅふ(主婦). 전자이건 후자이건 뜻은 그대로이고 발음만 달라지지 단어 조합에 문제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강아지나 고양이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고 '주인'이라는 말은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문제는 치워두고, 주부라는 말은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직업이 될 수 없다. 직업이라면 고용주가 있어야 한다. 주부는 누구에게 고용되어 있는가? 고용주는 없는데 고용인만 있는 직업은 무늬만 직업, 속된 말로 짝퉁 직업이다. 영어에서는 자영업조차 self-employed다. '고용'이라는 말을 썼다. 설마 주부도 스스로를 고용했다고 해야 하나? 개인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결혼한 여자들은 서류를 받아들면 직업란에 당당하게 ‘주부’라고 적는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으로 통한다는 말인데, 저렇게 적나라한 한자를 어떻게 가뿐히 이런 뜻으로 써먹을 수 있는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되지 않는 말이다.
어디 가서 직업 작성할 때, 결혼한 여자가 직장에 다니면 ‘직장인’이라고 적는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무직’이라고 적는다. 결혼해서 직장에 다니는 여자는 직업이 두 개다. 하나는 직장인, 또 하나는 주부! 직업이 두 개이지만 당사자도 그렇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렇고 '투잡맘'이라고 하지 않는다. 결혼해서 집에서 살림하고 육아만 하는 여자는 직업이 한 개다. 주부! 그것도 앞에다 전업을 붙여서 전업주부라고 구분한다. 여자들은 결혼한 것만으로도 직업을 얻는다. 직장에 다니는 결혼한 남자는 직업이 한 개다. 직장인! 결혼을 했건 안 했건 남자가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무직'이라고 한다. 결혼한 남자들은 하나로 몽땅 묶는 말이 없다. 主婦는 있어도 主夫는 없었다. 主妻도 없다. 왜? 주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주부가 “직업”이니까 직장에 다니는 여자는 서류에 직장인+주부라고 적어야 마땅하다. 전업주부와 주부를 구분하려면 이럴 때 써먹든가. 같은 여자끼리 전업주부는 입 다물라는 재갈 물림용 단어로 전락시키지 말고. 요즘은 직장에 다니는 아이 엄마들을 '직딩맘'이라고 한다. 그럼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엄마들은 '주부맘'인가?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으니까 따지자면 '직업맘'인데, 누구도 직업맘이라고 하지 않는다. 주부가 '주인의 며느리', '주인인 며느리' 이렇게 두 가지로 풀이되는 것처럼 '직딩맘' 역시 '직딩인 엄마', '직딩의 엄마' 이렇게 두 가지 풀이도 가능하다. 혼동을 부르는 표현이 되는데 왜 굳이 이런 모호한 말을 쓸까! 직장인이라고만 해도 될 걸 굳이 '직장인 엄마'라고 '엄마'를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직딩아내'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못 봤다. '직딩아빠'라고 소개하는 사람도 못 봤다.
사전 얘기로 돌아와서, 재미있는 사실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사전이 자꾸 눈가리고 아웅을 한다는 거다. [다음] 사전을 찾아보니
(1) (기본의미) 한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서 주관하는 여자 주인.
(2) 한집안의 제사를 맡아 책임을 진 사람의 아내.
이라고 나와 있다. 원래의 뜻은 어디로 가버렸다. 네이버 사전에도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다. 갈수록 가관이다. 참 눈물겹다. 한 나라의 사전이 단어를 이 정도로 밖에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게 처참하다. 직업이 되려면 보통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활동을 주목해야 한다. '주부'가 직업이 되려면 '가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도출되어야 한다. 한자는 저렇게 써놓고 어쩌자고 설명은 딴소리를 하고 있는가! 그것도, 육아는 빼놓고 살림만 얘기한다. 육아는 육아도우미한테 밀렸나?
뭐 영어권에서도 housewife 팔자는 비슷한가 보다. 구글 검색하니까 housewife라는 단어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이냐는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다. 젠더 중립적인 단어를 쓰자면서 homemaker로 바꾸었다는데, 요즘은 'stay-at-home mom/mum(집콕맘?)'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국어사전은 과거의 영광을 버리고 싶지 않은가 보다.
이 글을 손볼 당시(한 5년? 6년? 된 거 같다.) 여성가족부에서 ‘주부’라는 말 대신 ‘살림꾼’이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했다는 소식이 기사에 떴다. 일단, 한자가 아니라는 점은 맘에 드나 ‘꾼’이라는 접미사는 소리꾼, 춤꾼, 어그로꾼, 구경꾼부터 시작해 사전을 찾아봐도 딱히 직업군이 아니어도 붙일 수 있는 말이다. ‘살림꾼’이라는 말은 살림을 능숙하게, 알뜰하게 잘하는 사람을 얘기하는 거지 단순하게 ‘살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살림가'라고 해야 그나마 말이 통한다. 거기다, 집안일을 말할 때는 살림일지 몰라도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양육은 고려되지 않은 말이다. 이후로 이렇다저렇다할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살림꾼’이라는 말은 그냥 반짝 등장하고 탈락했나 보다.
나는 이 비인간적인 단어를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어디 가서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지 않는다. '무직'이라고 적는다. 번호로 선택해야하거나 주어진 예시에서 골라야할 땐 어쩔 수 없으니까 주부를 찍지만 속이 쓰리다 못해 괘씸하기까지 하다. 결혼으로 인한 자동 취업 당첨치고는 아프다. 이 고약한 현실을 토로해도 나만 병신되는 또 고약한 현실. 때론 미칠 거 같았다. 한자와 따로 노는 저 음흉한 뜻을 가진 말이 아니라 글자와 뜻이 일치하면 왜 망설이겠는가. '브런치스토리' 시작할 때도 직업 '작성'이 아니고 '고르기'라 실패했다. '무직'이 없었다.
차라리 쓰라고 하면 '무직'이라고 적으면 그만이지만, 온세상 직업군 다 나열해놓은 것도 아니면서 고르라고 할 땐 시험 문제 하나 틀리는 수준의 기분이 아니다. 나를 설명하는 말이 없는데 그래도 골라내야 하는 상황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안의 속앓이였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직업 가치가 아니라고 나라 경제 지표에도 포함시키지 않는 직업 취급하면서, '한집안의 우두머리의 며느리'라는 고리타분한 신분이 왜 직업란에 호출되는지 난 죽었다 깨어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남자들은 자기 직업을 말할 때 가족 중 누군가를 끌어와서 말하지 않는다.
(원래 '주부'에 관한 글은 한참 뒤에다 써놓았으나 이번 추석때 가족여행 중 못 볼 글을 보고 난 후 그 자리에서 글을 써서 올리려던 글(2탄) 때문에 먼저 써놓았던 이 글까지 불려나옴. 올리기 전 또 한번 손을 보긴 했음. 거의 20여 년을 두고 총 세 번에 걸쳐 쓴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