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 여러분, 저희는 잠시 후 밴쿠버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고..."
어? 내가 맞게 들은 건가? 밴쿠버? 토론토가 아니고? 행선지가 급 바뀐 건가? 비행기를 잘못 탔나? 어떻게 된 거지?
아버지 얼굴을 본다. 무표정이시다. 궁금해서 물어본다.
"아빠, 밴쿠버라는데... 토론토가 아닌데요?"
"....."
답이 없으시다. 역시나, 별 기대는 안 했다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 죽겠는 심정이었다.
어쨌든 비행기에서 내렸다. 큰 창 밖으로 활주로와 비행기들이 보였다. 날씨는 흐릿했고 곧 비가 한바탕 쏟아질 기세였다. 어디론가 계속 걸어갔다. 또 다른 탑승구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그랬다. 밴쿠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토론토 직항은 없었다.
3시간 정도 대기 한단다. 처음에는 그냥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다가 좀이 너무 쑤셔서 탑승구 근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신기했다, 내가 해외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다니... 지금 같아서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지.
비행기 탈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탑승구 쪽으로 점점 몰려왔다. 옆에 아버지를 봤다. '비행기를 밴쿠버에서 갈아탄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안 알려주셨어요?' 여전히 무표정이시군. 아버지는 가끔, 아니 종종 전혀 예측 불가의 말과 행동을 하신다. 내가 이민을 간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의 스토리는 이렇다.
1992년도 12월로 되감기를 해본다.
이때 MBC에서 '억새 바람'이란 드라마를 방영했다.
두 분 다 정말 젊으셨네요
당시에 뻔한 내용들의 드라마가 대부분이었기에 한 가족이 이민을 가서 겪는 고충과 이런저런 스토리는 매우 신선했다. 어린 나였지만 첫 회부터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무엇보다 어린 형제들이 미국에서 학교 생활을 하기 시작하는데 너무 신기해 보였다. 그런데 정말 많이 놀림당하고 차별당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아이들이 형제를 엄청 괴롭힌다. 드라마 대사 중 '칭크, 칭크'중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이 종종 나온다. 아... 미국애들은 동양 애들을 다 통 틀어서 저렇게 놀리는구나. 내가 저렇게 놀림받고 저렇게 괴롭힘을 당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부르르 떨린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아우, 쟤네들 진짜 못돼먹었다... 형제들 진짜 불쌍하다..." 이때 아버지가 훅 들어오신다.
"삼오야, 우리도 이민 간다."
"어? 네? 뭐라고요?"
"우리도 쟤네들처럼 저기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캐나다로 이민 갈 거라고."
"... 아니 그게 무슨 말인데.. 가긴 어딜 가는데..."
순간 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움직일 수 도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글퍼졌다. 저긴 형제니까 서로 의지라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할 텐데 저 혹독한 놀림과 괴롭힘을 온전히 나 혼자 다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저 두 돌 도 안 된 아기에게 의지해야 하는 건가? 큰일 났다. 어떻게든 안 가보려고 버텨야 한다. 순간 오만 생각 다 들었다. 아, 가출? 봉천동 큰고모네 집으로 갈까? 버스 번호도 알고 하니까. (이때 우리 가족은 서울 살 때였다)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중 전혀 먹히지 않을 설득 멘트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캐나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 못 때려."
(제가 선생님 복이 없어서 맷집 하나는 잘 단련되었답니다. 그냥 맞을래요.)
"캐나다가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천국인데. 매일매일이 어린이날이야."
(저는 몇 년 후면 어린이가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어린이날이 즐겁지가 않아요.)
"거기 있으면, 특히 지금 너 때 가면 영어도 쉽게, 금방 배운다. 1년, 2년 정도 지나면 말이 술술 나올걸?"
(아니, 내가 영어를 잘하게 해 달랬냐고 요? 지금 방과 후 컴퓨터 수업 때 하는 걸로도 충분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황당하다 못해 기억이 너무 선명하다. 드라마에서 아이들의 괴롭힘이 극에 달았을 때 마치 짠 것처럼 "우리 이민 간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대의 센스에 제가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요.
며칠 후 학교에서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반 아이 중에, 실명은 거론 못 하겠고 지금 현재 잘 나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 한 명과 이름이 같다...라고까지만 밝히겠다. 얘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와서 자기 눈을 손가락으로 양 옆으로 찢더니 '칭크, 칭크'거리는 게 아닌가. 이 자식이 어떻게 알고 날 이렇게 놀리는 거지? 생각해 보니까 겨울방학 직전이었는데 내가 아이들에게 더 이상 못 볼 것 같다고 했다. 당연히 왜냐고 물어보지. 이사 간다고 했다. 당연히 어디로?라고 묻지 않겠는가. 그래서 '온양온천 (아산), 그러고 얼마 후 캐나다로...'
아이들 대부분 믿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와중에 틈새시장을 노린 '눈찢남'은 촐싹거리면서 꾸준하게 나를 놀렸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인데. 뭐, 국민학교 4학년 짜리가 뭘 알았겠나. 어쨌든 가뜩이나 우울하고 심각한 나의 불같은 감정에 이 자식이 제대로 기름을 부었으니 결국 나는 어퍼컷을 한 방 제대로 날렸다.
'칭크 1:0 국가대표'
선생님께 불려 갔다. '오늘은 1+1 느낌으로 더 맞겠지? 진짜 잘못했으니...' 웬걸? 선생님이 온화하신 미소로 내 볼을 쓰다듬어 주신다.
'삼오야, 캐나다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씩씩하게 지내야 해. 알았지?"
(눈물이 계속 뚝뚝... 그래, 난 어려서부터 울보였다.)
깔끔하게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던 내 서울에서의 학교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 국가대표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는데 선생님께서 나에게 실드를 쳐주셨다고 들었다. 나로서는 최상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