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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나쯤은 좋아하는 게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누구나 하나쯤은 좋아하는 게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초등학생도 비밀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꼭 말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취미를 물어보면 “그냥 독서 좀 하는 편이에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답변을 주기 시작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 그때는 내가 코덕에 세계로 빠져든 지 한참이나 지난 후 생긴 일 같다. 코덕에 입덕한 후 나의 코덕 레벨은 10000까지는 손쉽게 넘은 것 같다. 하지만 혼자 보던 코난에 재미를 느낀 순간에서 어느덧 조금 외로움이 찾아왔다. 레벨이 10000은 넘은 것 같으니 코난에 대한 자부심은 저절로 높아져만 갔고, 이제는 잘난 척이 아닌 정말 나와 동등하게 코난에 대해 얘기할 친구가 필요해지는 처음 느끼는 그리움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혹시, 나처럼 코난을 좋아하는데 나와 같은 이유로 말 못 하는 친구가 있지는 않을까?’라는 추리가 떠오르자 슬슬 실천으로 옮기자는 단계까지 이르게 됐다.

그때 마침 학교에서 취미를 공유하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최대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외쳤다.


“저의 취미는 ⟪명탐정 코난⟫ 만화책을 읽는 것입니다!”


드디어 말했다! 외쳤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했다는 것에 올림픽에서 메달이라도 딴 심정으로 상상 속에서는 이미 세레머니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그닥 오래가진 못했다. 내 상상보다는 리액션이 별로였다. 아이들이 굳은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는 왠지 모르는 싸늘함만이 감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평범한 박수인데 나도 좋다는 반응을 기대해서 더 실망했던 것 같다.) 이어서 선생님의 답변이 내 귀에 도착했다.


“아~! 아린이는 코난 만화책을 좋아하는구나! 하하”


라는 짧은 답변이 전부였다. 딱히 공감을 해주던 사람도, 이해해주던 사람도 없는 느낌이었다. 반을 슬쩍 둘러봐도 나의 코난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 코난 친구는 없었다. 긴장 반, 기대 반이었던 내 마음은 내가 생각한 반응과 다름에 실망이 밀려왔다. 갑자기 레벨 10000에서 1레벨이 깎인 것 같았다. 분명히 여자애들 중에서는 좋아하는 애가 한 명 쯤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아이가 한 명 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역시 나 혼자만의 기대와 생각에 불과했다. 코난 친구를 못 찾았다는 실망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는 않았다. 나의 발표 시간은 그렇게 실망만 남은 채로 1분도 되지 않아 끝났지만, 나에게 짧은 발표 시간은 마치 한 시간 같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내 마음을 표현하는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바뀌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코난 생각이 나도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난이 읽고 싶어졌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집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워보니 바로 옆에 여전히 코난이 쌓여 있었다. 옆에 있는 코난을 보니 아까 깎인 레벨 1이 다시 돌아와 레벨 10000으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코난을 집어 들어 보았다.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코난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할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당당히 표지를 보이게 읽던 정아린은 온데간데 사라졌고, 지하철에서 코난을 읽을 때면 가방으로 책을 가려 보게 됐고, 카페 같은 데서는 책을 세우지 않고 테이블에 눕히고 표지를 가려서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한심하다. 이건 코덕의 자세가 아니라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오타쿠가 된 거 같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까지 찍어야 나도 당당하게 코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결말로 마무리 할까 생각해 봤다. 좋은 계획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더니 저절로 출력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온갖 맞는 말과 멋있는 말로 랩을 쏘아대는 중이었다.



얼마 후 학교에서 또 다른 발표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무슨 저학년도 아니고 이런 시간이 다 있냐고 투덜거렸지만, 나의 마음은 달랐다. 나의 코난 친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이번에는 내 생각을 뚜렷하게 논리적으로 그러면서도 기계처럼 선언하듯이 말하자고 조용히 결심했다. 딱히 준비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기로 했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올 때, 저번처럼 긴장 반, 기대 반이 아닌 나만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차례다. 자신 있게 일어서서 외쳤다.


“저는 코난 만화책을 좋아합니다! 심심할 때 보면 정말 재미있고, 트릭이 바뀌는 게 짜릿해서입니다.”


뒤에 말을 더 붙이려고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했다, 너무 유치원생 수준으로 한글 배울 때 국어책 읽듯이 말해버렸다. 할 말이 훨씬 많았는데 할 말의 반도 못했다. 기회가 왔는데 날려버린 것 같아 실망하고 있을 때, 반응이 지난번과 같았지만 내 기분과 생각이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박수를 쳐주었다. 분명 지난 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박수였지만, 나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결국 내가 어떤 마음으로 코난을 생각하는지 남들에게 분명하게 말한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만의 세계에서 코난을 좋아한다는 말과 재미있고 짜릿하다는 것에 대해 선언하고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슬슬 결말을 완성할 단계가 왔다.

 

수업을 마치고 지난 번과는 다르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코난을 생각하며 총총총 뛰어왔다. 역시나 침대에 눕자 옆에 보이는 것은 코난 만화책이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레벨이 100 더 올라갔다. 이번에는 상처를 덮으려는 마음이 아닌, 성공에 기쁨으로 코난의 첫 장을 펼친다. 그렇게 나의 <말할 수 없는 비밀> 영화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코난을 다른 친구들도 알게 된다면 나보다 잘 알게 될까 봐 코난에 대해선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나만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코난을 좋아한다는 것보다 나만의 코난을 독차지하고 싶은 초등학생의 욕심일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그리움과 외로움이 밀려와도 역시 코난은 혼자 보는 게 제맛이다.


글: 초등작가 아린

사진: 에디터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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