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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빈 Nov 18. 2024

나일 수도 있었다 (4)

이별의 발단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 대다수에게는 소중하고 기념할 만한 날이겠지만 내겐 달랐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졌던 나는 실제 태어난 날을 알지 못했고, 결국 보육원에 들어온 날이 내 생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공허함이 밀려올 따름이었고, 그 허전한 구석을 채워준 것이 일훈이었다. 


매년 자정이 되면 제일 먼저 보내주던 생일 축하 메시지, 아침이면 어김없이 걸려오던 전화. 보육원을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빼먹은 적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수신된 메시지가 없습니다.’

‘부재중 전화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지금까지,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일훈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기를 수십 번. 머릿속에서 불길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자존심과 불안함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걸까?’


결국 찾아낸 변명에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 주연. 무슨 일이야?


너무도 평이한 음성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슨 일이라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꾹 누르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 저녁에 뭐 해?”

-오늘 저녁? 나 약속 있는데?

“약속? 누구랑?”

-어, 있어. 너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때 들려온 속삭이는 듯한 여자의 음성.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냐. 됐어. 끊을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생일에, 선애와 함께 있는 일훈이라니. 이보다 더 비참한 생일이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끊을게.’


이 말이 어쩌면 우리 관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주연 씨, 잘 마시네. 자, 건배!”


회식 자리. 옆자리에 앉은 장례식장 부장이 연신 술을 권했다. 평소라면 정중히 거절했겠지만, 오늘은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은 그 ‘평소’가 아니니까.


건배를 하고 또 술잔을 비웠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마시는 것인데, 취기가 오를수록 기억이 선명해졌다. 

왠지 쭈뼛거리던 일훈의 목소리, 전화 너머로 들려온 선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요즘 일훈이 달라진 것 같기는 했다. 전화도 자주 안 받고, 만나자는 말도 슬쩍슬쩍 피하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바빠서….’라는 대답만 돌아왔으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 되어서야 회식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몸은 술기운에 휘청거렸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그런데 그렇게 집 앞에 도착해 무심코 올려다본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내가 불을 끄지 않고 나왔나? 하는 생각도 잠시, 거짓말처럼 취기가 싹 가셨다. 비밀번호를 알고 들어가 있을 유일한 사람. 일훈이었다. 


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역시 그는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나 왔어!”


그러나 현관문너머의 광경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해!!”


환하게 밝혀진 거실에 풍선과 리본이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켜진 케이크가 놓여있었고, 일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애가 있었다.


“깜짝 놀랐지? 선애가 아이디어를 냈다. 서프라이즈로 생일파티를 하자고. 케이크도 직접 골랐고. 어때, 멋지지 않아?”


일훈이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 내가 아닌 선애가 주인공인 듯한, 그 애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는 생일 파티. 케이크에 꽂힌 촛불마저 그녀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둘이서 준비했을 시간들을 생각하자 속이 끓어올랐다. 


“주연 언니. 이거 내 선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고마워. 그런데 나 혼자 좀 쉬고 싶어. 지금 좀 많이 피곤하네.”


내 차가운 반응에 일훈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준비했는데 생일 파티는 해야지.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벌써 자정 넘었어. 내 생일은 어제였고. 그러니까 둘 다 좀 가줄래?”


단호한 축객령에 두 사람은 떠났다. 문이 닫히고 난 후 나는 선애가 건넨 선물을 바닥에 던졌다. 


이건 내 생일 파티가 아니었다. 선애가 연출한 로맨스의 한 장면일 뿐. 그리고 일훈은 그것을 실현시키는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이다.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진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핑계 대 보지만, 사실은 안다. 이건 단순히 생일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선애가 내게서 일훈을 빼앗아가는 것 같아서.


그 옛날 내게서 입양의 기회를 빼앗았던 것처럼 말이다.




일훈과의 냉전은 전례 없이 길었다. 그간 서로 의견이 맞지 않거나 다툼이 있을 때면 먼저 사과하는 것은 일훈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척 그의 사과를 받아주곤 했다. 


늘 그렇듯 습관처럼 그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먼저 연락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보름이 되어갔다. 기다림에 지쳐가던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받았다. 


[7시, 거기에서 보자.]


퇴근 후, 나는 일훈이 말한 그곳으로 향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포장마차. 장례를 치를 때마다 우리는 이곳에서 소주를 마셨다. 일종의 루틴이고, 씻김굿 같은 것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구석에 앉은 일훈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반쯤 비운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평소의 일훈이라면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겠지만, 오늘은 그저 탁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왔어? 앉아.”

“술 마실 기분 아니야. 네 주정 들은 기분은 더더욱 아니고.”

“그래도 앉아! 할 얘기 있으니까.”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일훈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이건 그걸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너한테 난 뭐냐?”

“뭐?”

“김주연한테 노일훈은 어떤 존재냐고!”


돌연한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런 질문이 필요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물음은,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나… 선애랑 잤다.”


순간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너무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어떤 말도 고를 수 없었다. 


“그래서?”


한참만에 나온 내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어쩌면 이미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일 파티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일훈이 벌떡 일어서더니 내 팔을 잡았다. 


“김주연. 네가 나를 잡아줘. 그럼 이건 그냥 실수로 넘길 수 있어. 술김에 저지른 하룻밤의 일탈로. 네가 나를 잡아주기만 하면….”


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떼어냈다. 잡아주면 된다고? 이미 무너진 신뢰를, 배신당한 사랑을 어떻게 다시 붙잡는단 말인가. 


“넌 이미 선택했어, 일훈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등을 돌려 나가는 순간, 일훈의 격앙된 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너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우리가 이렇게 헤어져도?”


나는 멈칫했다.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보지 않았다.   


포장마차를 나서는 순간까지도, 일훈이 나를 붙잡을 거라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뒤에서 달려와 내 어깨를 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릴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나를 다시 찾아온 건 선애였다.


회사 근처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보리색 봉투. 


봉투를 펴자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청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담긴 내용은 심플했다.   


[노일훈, 나선애.

두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그 첫날을 축하해 주세요.]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 일이 있은지 겨우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이 둘이 결혼을 한다고?


“그래도 언니한테 주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참 대단하다, 너.”

“언니가 꼭 와주면 좋겠어.” 


그 말을 하는 선애의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초대는 고마워. 그런데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도 봐서 알잖아. 내 일이 그렇다는 걸. 사람이 스케줄 맞춰 죽는 게 아니니까.”


선애는 잠시 망설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을 꾹 눌렀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래도 와줘. 꼭.”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대로 카페를 나와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오늘, 일훈을 향한 미련인지, 그와의 추억에 대한 예의인지 모를 감정이 나를 결혼식장으로 이끌었다.


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틈새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애가 다가왔다.  


“언니, 와줘서 고마워.”

“축하해.”


내 목소리는 담담했다. 옆에 선 일훈은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행복하게 잘 살아.”


돌아서는데 선애가 팔을 잡았다. 손아귀에 실린 힘이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주연 언니,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무슨 말이야?”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결국은 언니도 모든 걸 이해하게 될 거야. 그때는….”

“여기 있었구나. 우리 예쁜 딸.”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선애의 부모인 김 교수와 그 남편이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 빨리 부모 품을 떠나다니. 서운하구나. 아직 아빠가 해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제가 아버님 몫까지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일훈은 선애의 허리를 살짝 감싸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선애의 아버지는 그런 그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선애야. 기억해라. 넌 영원히 우리 집 귀한 딸이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네, 아빠. 알고 있어요.”

“선애야, 이제 새 삶을 시작하니 잘 살아야 한다.”


평생을 장례식장에서 일하며 이별의 순간들을 지켜봐 온 나였지만, 이런 위화감은 처음이었다. 축하와 기쁨이 가득해야 할 결혼식장에서 마치 장례식을 치르는 듯한 무게가 느껴지다니. 선애의 부모가 전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딸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아쉬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선애는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게요.”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택시 뒷좌석에 기댔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가 이토록 허망할 줄은 몰랐다.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갑자기 음악이 끊기고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5시 45분쯤, 인천공항 고속도로 서울방향에서 발생한 대규모 연쇄 추돌 사고로 현재까지 2명이 사망하고 65명이 다쳤습니다.]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인천공항 고속도로라면,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지나갔을 그 도로가 아닌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일훈의 번호를 눌렀지만 신호음만 울릴 뿐이었다. 황급히 문자를 보냈다.


[너희 둘 다 괜찮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 사이 방송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00여 대의 차량이 잇따라 추돌한 이 사고로 지금까지 66세 임모 씨와 24세 나모 씨가 그 목숨을 잃었으며 특히 이 중 나모 씨는 신혼여행을 가던 길인 것으로 알려져 주위의 안타까움을….]


< 마지막 회로 이어집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지구 반대편 출장 중입니다. 

금요일 업데가 되지 못한 것에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며,

다음번은 마지막 회롤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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