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누름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

by 하랑

억누름



마음을 눌러 눌러 떠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음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합니다.


마흔아홉의 혁은 허울대 멀쩡한 노총각입니다.

외모도, 인성도, 사회적 능력도, 경제적 능력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이 많다 보니 말이 좀 많습니다. 역사, 문화, 경제, 상식 등 다방면으로 능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게 되고 말도 많아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결혼과는 인연이 없는지 결혼직전에 연인과 헤어졌습니다.


그 후로는 숨바꼭질하듯 마음에 드는 여성은 그를 외면하고 그를 좋아하는 여성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대학원에서 인연이 되어 모임을 하게 되었고 세명의 여성과 친하게 됩니다. 두 명은 솔로로 연하이고 한 명은 기혼이고 여섯 살 연상입니다. 벌써 안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혁이는 자신을 따르는 솔로인 연하의 여성을 마다하고 유부녀인 S에게 자꾸 마음이 갑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해주는 그녀가 만날수록 좋아집니다. 물론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는 않았지요.

그녀도 혁을 친한 동생쯤으로 대합니다.


혁은 핑곗거리만 있으면 S를 만나기 위해 번개를 칩니다. 물론 개인톡으로 S의 일정을 먼저 확인 후에 말입니다. 공짜 영화티켓이 생겼다며 번개를 치고, 오픈한 가성비 좋은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며 번개를 치고, 비가 온다고 빈대떡에 소주 한잔하자고 번개를 칩니다. S의 일정과 참석여부를 먼저 확인하고 모임주선을 하다 보니 S는 늘 참석하게 되고 둘은 자주 보게 됩니다. 어떤 대화를 하든 잘 통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게 되는 그녀와의 공간이 유쾌하고 보람됩니다.


혁은 점점 그녀가 좋아집니다. 그래서 겁이 납니다. 그녀는 평화로운 가정에서 남편과의 관계도 좋아 보입니다. 혁은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가며 갈등합니다. 솔직한 사랑을 표현하며 그녀에게 다가가야 할지... 도덕에 문제 되지 않게 지금처럼 마음속으로만 좋아해야 할지... 머리로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이 자꾸 다가가라고 부추깁니다.


오늘도 혁이는 영화를 보자고 번개를 친 상태입니다. 4명이 함께 모이기로 했는데 그녀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렙니다. 혁이가 모임에 가는 이유는 그녀입니다.


이기적은 자신의 사랑 때문에 그녀가 곤란해질까 염려도 됩니다. 그녀는 가족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절대 남편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혁이를 그냥 친한 동생으로만 여기고 있지요.

그래서 혁이는 오늘도 솟아오르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밝게 웃습니다. 그녀와의 어색해지는 공간이 싫기 때문이고 혁이의 마음을 알게 되면 그녀는 절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테니까요.


표현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감정을 숨기는 일상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데... 혁이는 스스로 병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솔직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스스로의 감정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을 수밖에...


혁이는 일단 억누름을 선택합니다.






억누름



허울대 멀쩡한 이름 하나,

마흔아홉의 노총각은

웃음으로 빛나지만

가슴 안에는 소란이 번진다.



함께 웃는 자리,

먼저 묻고 먼저 이끌며

그녀와의 공간을 위해 번개를 친다.



비 오는 저녁,

소주와 빈대떡 사이

그녀의 웃음이 불빛처럼 번진다.



침범할 수 없는

그녀의 행복한 환경

그의 손은 주머니 속에서 움츠린다.



가슴은 다가가라 속삭이지만

머리는 물러서라 다그친다.

말하지 않는 사랑,

숨기는 기쁨,

억누름 속에 더 단단해지는 고독.



사랑은 쟁취가 아니라

때론 포기여야 한다는 걸,

웃음 속에서 배운다.



오늘도 그는

솟아오르는 심장을 눌러

밝게 웃는다.

혹여 그녀가

멀어질까 두려워서.



억누름!

그것이 그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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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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