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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맑음 Oct 01. 2024

참 잘했어요

유맑음 동화#8

 오랜만에 책가방이 가벼웠다. 괜스레 소풍 가는 기분이 났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왔다. 학교 앞 중앙공원에는 벌써부터 학생들이 바글거렸다. 어깨가 뻐근해지려 했다.


 ‘이를 어쩐담…….’


 한 손에 든 반쪽짜리 갱지를 바스락 구겼다. 나는 공처럼 쪼그라든 종이를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담임 선생님은 5학년 3반 팻말을 들고 계셨다. 우리 반 아이들도 제법 모였다.


 “여러분, 체험 종이는 모두 가져왔죠? 혹시 두고 온 사람?”


 체험 종이는 지금 내 주머니 속에 꽁꽁 숨어 있다. 나는 푹 덮인 앞머리로 내 눈을 슬쩍 감추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선생님이 뾰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안 가져온 사람은 오늘 진로 박람회 끝나면 뒷정리시킬 거라고 했지? 강서우. 체험 종이 가져왔어?”


 선생님은 굳이 날 콕 집어서 물었다. 출석번호 1번은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 자주 불린다. 강 씨가 무슨 죄라고.

 “네…….”

 “꺼내 봐.”

 구겨져버린 내 종이공은 주머니 안에서만 꾸물거렸다. 선생님이 조금 다그치듯 말했다.

 “딱 봐도 안 가져온 표정인데? 서우는 끝나고 뒷정리다. 자, 또 안 가져온 사람?”


 선생님은 새 체험 종이를 내 손에 쥐어주며 지나갔다. <초등학생 진로 박람회>라고 적힌 빳빳한 종이였다. 체험 종이에는 도장 찍는 칸이 세 칸뿐이었다.

 ‘세 번 안에 거길 가 볼 수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툭툭 나왔다.


 넓은 공원에 별처럼 많은 직업별 체험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관심 있는 직업을 간단히 체험해 본 뒤에, 체험 종이에 완료 도장을 받으면 되었다. 부스마다 직업 선생님들이 앉아서 학생들을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면 들어오라고 할까 봐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춤주춤 걸었다.


 다른 학생들이 한둘 체험을 하고 나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도장 자랑을 했다. 직업별로 도장 모양이 달랐다. 드론 조종사는 드론 모양, 유튜버는 카메라 모양을 찍어주는 거 같았다. 그렇다면 거긴, 아마도 마이크 모양이겠지?


 내 발은 자꾸 날 붐비는 데로 데려갔다. 첫 번째 부스는 ‘마술사’였다. 마술사가 직접 선보이는 신체 분리 마술은 경이로웠다. 도장도 받을 겸 눈요기를 하려는 애들이 많이 왔다. 내 꿈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간단한 마술 도구를 두세 개 만지작 거렸더니 순식간에 첫 번째 체험이 끝났다.


 ‘마술사’ 부스는 깜찍한 요술봉 모양 도장이었다. 그런데 내 종이엔 난데없이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혔다. 학생들이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아무 도장이나 찍어준 거 같았다. 자랑할 데도 없지만 괜히 섭섭했다.


 눈 깜짝할 새 두 번째 부스로 들어왔다. 이번엔 ‘웹툰 작가’다. ‘마술사’ 바로 옆이라 자연스럽게 휩쓸려 온 거였다. 현직 웹툰 작가인 선생님이 시범으로 네 컷 만화를 뚝딱 그렸다. 선생님처럼 대충 휙휙 그리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그리려고 보니 동그라미 하나 그리기가 어려웠다. 네 컷은커녕 한 컷도 채우기 힘들었다.


 내 체험 종이에는 또다시 ‘참 잘했어요’ 도장이 번지듯 찍혔다. 네 컷을 모두 채워야 귀여운 팔레트 모양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팔레트 도장을 받은 애들이 키득거리며 부스를 나갔다. 번져버린 도장만큼이나 내 마음에도 먹물이 번지는 듯했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칸만큼은 먹칠하고 싶지 않았다. 저편 부스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인파에 떠밀려 자꾸 멀어졌다. 모두가 나랑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거 같았다. 기어코 애먼 데 줄을 서고야 말았다. 부스 위쪽엔 ‘꽃보다 아름다운 직업, 플로리스트’라고 적혀있었다.

 줄을 서있는데 부스 안이 훤히 보였다. 플로리스트 선생님이 간이 책상에 생화를 잔뜩 깔았다. 그중 원하는 꽃가지를 골라 작은 꽃다발을 만드는 거였다. 손재주 없는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서우야!”


 그때,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내 짝꿍 유미였다. 유미는 내 뒤, 뒤, 뒤에 서있었다. 모르는 애들이 둘이나 사이에 낀 바람에 나는 손만 살짝 올려 안녕, 했다. 유미는 눈치 보지 않고 우렁차게 말했다.


 “하도 사람이 많아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네. 종이는 다 채웠어?”

 나도 모르게 종이를 꽉 쥐었다. 하필 비어있는 마지막 칸이 꼬깃꼬깃해졌다.

 “아니, 아직. 하나 남았어.”

 “뭐? 잘 안 들려!”

  내 바로 뒤에 선 애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나는 유미를 향해 양 손가락을 엑스 자로 맞대었다.

 “아, 아직 다 못 채웠다고?”

 유미가 또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면 나랑 저쪽 부스 안 갈래? 여기 오려던 게 아니었거든.”

 저쪽 부스! 귀가 번쩍 뜨였다. 예쁘고 똑똑한 유미랑 함께라면 갈 용기가 났다. 조심스레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좋았어. 가자!”

 유미는 줄에서 빠져나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 유미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유미야, 넌 몇 칸이나 채웠어?”

 “난 두 칸! 아까 ‘퍼스널컬러 디렉터’랑 ‘유튜버’ 다녀왔어.”

유미는 도장이 콩콩 찍힌 종이를 내게 펼쳐 보였다. 하나는 무지개 색깔 도장, 하나는 카메라 모양 도장이다. ‘초등학생 진로 박람회’라는 제목도 어쩐지 더 화려해 보였다.

 “나도 두 칸이긴 한데….”

 내 손에 들린 종이를 유미가 낚아챘다.

 “참 잘했어요? 이건 어디 다녀온 거야?”

 “으응, 난 ‘마술사’랑 ‘웹툰’….”

 유미는 내 종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참, 아쉽겠다. 예쁜 도장받는 재미가 쏠쏠한데. 근데 너, 마술사가 꿈이었어?”

 “아니.”

 “그럼 웹툰 작가?”

 “아니….”

 “뭐야. 그럼 네가 진짜 가고 싶은 곳은?”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나는 말이야….”

 “어? 여기다!”

 유미는 내 팔목을 탁 잡아 세웠다. 우리가 선 곳은 ‘아나운서’ 부스 앞이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바로 그 ‘아나운서’ 부스.

 “유미 너, 여기 오고 싶었어?”

 “응! 나 아나운서가 꿈이거든. 요즘에 볼펜 물고 발음 연습도 하고 있어. 난 여기서 체험할 건데, 너는 어디로 갈 거야?”


 나는 유미 눈을 얼른 피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아나운서가 꿈이라고.

 “어, 으응. 난 좀 더 둘러봐야 할 거 같아. 너 먼저 하고 있어.”

 유미가 생긋 웃고는 부스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주위가 한산했다. 부스에 들어가는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내가 ‘아나운서’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네가?’라고 코웃음 칠 거 같았다. 난 유미처럼 인기가 많지도, 공부를 잘하지도 않으니까.


 ‘아나운서’ 오른쪽에는 ‘헤어디자이너’가 있었다. 난 손재주가 없어서 헤어디자이너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얼굴만 덜렁 있는 사람 모형이 쭉 늘어서 있는 모습도 조금 섬뜩했다. 그렇다고 왼쪽 부스는 더더욱 자신 없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기에 난 음치인 데다, 부끄럼도 많다.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내가 아나운서를 꿈꾸기 시작한 건 3학년 때부터였다. 날짜도 생생히 기억난다. 9월 1일. 매달 1일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날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 오늘이…… 1일이네. 1번 누구지? 그래, 강서우.”

 “네.”

 “서우가 65 페이지 한번 읽어 보렴.”

 하필 국어과목이 들은 날이었다. 것도 이야기 읽기가 걸렸다. 나긋나긋하게 읽으면 다들 피식 웃을 테고, 딱딱하게 읽으면 선생님이 못마땅해할 거 같았다. 자꾸 식은땀이 났다.

 “강서우? 어서.”

 평소엔 나한테 눈길 한 번 안 주던 애들이 다 나를 쳐다봤다. 에라, 모르겠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그 송사리 한 마리를 파시오. 얼마면 되겠소?’ 나그네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래쪽 냇가로 내려가면 이런 송사리가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읽을수록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목소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삼일을 배가 곯은 나그네는 욕심이 났습니다. ‘그럼 이백 냥 주시지요.’ 나그네는 아주 비싼 값을 불렀습니다. 노인은 곧바로 주머니에서 이백 냥을 꺼내어 나그네에게 주었습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배고프다지만, 사람을 속이다니. 나그네가 몹시 얄미웠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나그네는 노인에게 송사리를 얼른 건넸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백 냥이면 아주 싼 값이네. 가족의 품은 값을 매길 수 없으니 말일세.’ 노인은 송사리를 냇가에 풀어주고선 유유히 떠났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호흡을 늘어뜨려 끝을 맺었다. 긴장이 풀리자, 손발 끝이 저릿했다. 선생님이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서우, 제법인데? 아나운서 같았어. 아주 잘했다.”

 그건 초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받은 칭찬이었다. 공부머리도 없고, 친구도 잘 못 사귀는 나는 늘 골칫덩이였으니까. 그때부터 난 아나운서를 꿈꿨다. 전기가 찌릿 올랐던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뜨거운 햇볕이 주춤했다. 여전히 난 ‘아나운서’ 부스 앞을 떠나지 못했다. 유미는 어느새 머리를 반듯하게 싹싹 다듬고, 준비된 마이크 앞에 섰다. 방송국에나 있을 법한 카메라가 유미를 비추었다. 그러자 커다란 모니터에 유미가 나왔다. 아나운서 선생님은 유미에게 대본을 건넸다.


“김유미라고 했지? 이건 짧은 뉴스 대본이야. 한번 읽어 볼래?”


 유미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반듯하게 묶은 머리에 또렷한 눈망울, 그리고 명쾌한 발음까지 벌써 아나운서 태가 났다. 아나운서 선생님이 유미 머리를 쓰다듬고 밝은 미소를 띠었다.

 유미를 볼수록 나는 아나운서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머리도 덥수룩해 보이고, 옷차림도 괜히 후줄근해 보였다. 카메라에 비추면 눈도 단추 구멍만 해 보일 게 분명했다. 구겨진 얼굴이 도저히 펴지지 않았다.


 “학생, 카메라 테스트 한번 해볼래요?”

 아나운서 선생님이 부스 앞을 서성이던 내게 말을 걸었다. 출석번호를 불린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유미도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우리 학생도 아나운서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선생님은 딱 보면 알지요. 학생은 이름이?”

 선생님이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강서우요.”

 “서우! 이름 참 예쁘다. 음, 서우는…… 이거 한 번 읽어보자!”

 대본이 내 손에 들렸다. 제법 긴 대본이었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벌써부터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유미가 옆에 서서 두 팔을 당겨 파이팅을 외쳤다. 선생님도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안녕하십니까. 9시 뉴스입니다.”

 폭염 때문에 물고기가 떼죽음 당했다는 뉴스였다. 2년 전 읽었던 송사리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러자 조금씩 집중이 되기 시작했다. 배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하나 둘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애들이 비웃으면 어떡해.’

 대본을 읽는 와중에도 걱정이 몰려왔다. 그런데도 대본은 술술 읽혔다. 아마도 선생님이 방긋 웃고 계신 덕분인 듯했다.

 “이상 뉴스를 마칩니다. 강서우 앵커였습니다.”

 대본이 끝나자,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구경하던 학생들, 유미, 그리고 선생님까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서우, 정말 잘했어! 아나운서 꿈나무다운 걸?”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난스럽게 눈물이 나오려 했다. 꾹꾹 참느라 턱이 다 아팠다. 속닥거리는 학생들 얘기도 귓가에 옅게 들려왔다.


 “쟤 우리 반 강서우 맞지? 와, 이렇게 보니까 달라 보이네.”

 “난 진짜 아나운서가 읽는 줄 알았어!”

 마음속에 불꽃축제가 열렸다. 울컥했다가도 웃음이 났다. 문득 모니터가 눈에 들었다. 화면에 비친 나는 제법 깔끔했다. 허리를 더욱 꼿꼿이 펴고,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유미가 화면을 뚫어져라 보더니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서우야! 너 지금 완전 아나운서 같아!”


 비로소 박람회 체험 칸이 모두 채워졌다. 유미도 나도 마지막 칸에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혔다. 선생님이 마이크 모양 도장을 깜빡했다며 미안해하셨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이 도장이 이제는 더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미가 내게 물었다.

 “서우야, 너도 아나운서가 꿈이었어? 진작 말하지! 그럼 처음부터 같이 들어갔을 텐데.”

 “으응, 난 왠지 안 어울리는 거 같아서.”

 “안 어울리기는! 너 정말 잘하더라. 깜짝 놀랐어.”

 “고마워. 너야말로 진짜 아나운서 같았어.”

 얼굴이 바싹 달아올랐다. 가슴이 뜨끈뜨끈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한테 이런 말을 들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유미는 한껏 들떠서 말했다.

 “서우야. 우리 앞으로 같이 대본 연습할래? 너한테 배울 게 많을 거 같아!”

 “그래, 좋아. 서로 영상도 찍어주는 거 어때?”

 “정말 좋지!”


 우리는 당장 이번 주말부터 맹연습에 돌입하기로 했다. 내 꿈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엄마아빠한테도 어서 들려주고 싶다. 아까 읽은 대본이 머릿속에 콕콕 박혀서 자꾸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상 뉴스를 마칩니다. 강서우 앵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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