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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맑음 Oct 06. 2024

꿈꾸는 종이학

유맑음 동화#9

 천 마리 종이학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트 모양 유리병 투명하게 비워지고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 있던 은빛 종이학까지 모두 털려 나왔다. 그러잖아도 그득했던 쓰레기봉투가 터질 지경이었다.

 종이학들이 얼기설기 엉기고 짓눌렸다. 은빛 종이학만은 꽁꽁 묶인 비닐 매듭 사이로 얼굴과 날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아파트 앞 공용쓰레기 함에 퉁퉁한 쓰레기봉투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별수 없이 종이학이 든 봉투는 우악스러운 공용쓰레기 함 옆에 털썩 놓였다.


 종이학들이 저마다 한숨을 푸, 내쉬었다. 울상이 된 은빛 종이학은 얼굴과 날개가 끼인 채 쓸쓸한 밤바람을 맞았다.

 ‘말도 안 돼. 내가 쓰레기 신세라니.’


 유난히 시렸던 새벽이 가고 따사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눈부신 햇살에 은빛 종이학이 쨍, 하고 반짝였다.


 “얘, 넌 누구니?”

 쓰레기 더미 위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은빛 종이학은 위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곰 인형……?”

 의류 수거함 위에 덜렁 놓인, 시커멓고 낡은 곰 인형이었다. 군데군데 구정물이 묻은 털 때문에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맞아, 난 귀여운 곰 인형이야. 흠, 어디 보자. 넌 인형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니고.”

 곰 인형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난 종이학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난 채이가 만든 생일 선물이었어. 이젠 아니지만…….

 “선물? 근데 지금은 네 꼴이 말이 아니네.”

 곰 인형이 어깨가 움츠러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 혹시 너도 버려진 거니?”

 “그럴 리가. 난 버려진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야. 조금 있으면 누군가 날 데리러 올 거거든.”

 “누가 데려간다고?”

 “그래. 나처럼 이렇게 예쁜 곰 인형을 가만 두고 배겨?”

 은빛 종이학이 말을 얼버무렸다. 곰 인형이 마땅찮은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쳇, 두고 봐. 나를 깨끗하게 해 줄 새 주인을 만나서 내 미모를 이 세상에 뽐내고 말 거야!”

 터무니없는 곰 인형의 꿈에 은빛 종이학이 핏, 웃었다.

 “넌 멋진 꿈이 있구나.”

 “당연하지. 넌?”

 “꿈이라면 하나 있긴 한데…….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 꿈이 뭔데? 어서 말해봐. 궁금한 건 못 참아!”

 은빛 종이학이 한참을 머뭇거렸다. 곰 인형이 딱딱한 콧구멍을 씰룩였다.

 “있지, 난 ‘진짜 학’이 되고 싶어. 하늘을 날아서 선물을 물어다 주는 학 말이야. 종이학은 아주 초라해. 이렇게 버려지면 그걸로 끝이지.”

 가만 듣던 곰 인형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진짜 살아있는 새 말이야? 얘, 넌 정말 엉터리 꿈을 꾸고 있구나? 크크.”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했잖아.”

 은빛 종이학이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곰 인형은 그제야 조금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쿡, 내뱉었다.

 “큼,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 꿈꾸는 건 자유니까!”


 곰 인형은 다시금 동그란 눈을 번뜩이며 새 주인을 기다렸다. 은빛 종이학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가냘픈 목 주위를 둘러싼 비닐 매듭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쓰레기 함 주위에 뜨거운 뙤약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은빛 종이학은 불볕에 타버리지 않고 용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주인과 산책 중이던 강아지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쓰레기 함 앞을 지날 때쯤, 강아지가 목줄이 팽팽해지도록 끼익 멈추어 섰다.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강아지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포포, 얼른 와야지!”


 주인이 다그쳐도 강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아지는 쓰레기봉투 꼭대기에 끼인 은빛 종이학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은빛 종이학을 꺼내려고 봉지를 박박 긁기 시작했다. 봉투 가운데 구멍이 나자, 매듭진 데까지 주욱 찢어지고 말았다.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오며 은빛 종이학마저 봉지 바깥으로 굴러 떨어졌다. 강아지는 홀로 떨구어진 은빛 종이학에 눈을 떼지 못했다. 강아지는 앞발로 종이학을 이리저리 굴렸다. 영롱했던 은빛 날개가 찌그러졌다. 주인이 안 보는 틈에 강아지는 종이학을 입에 쏙 물었다.


 “포포! 거기서 뭐 해. 얼른 가자!”


 주인이 목줄을 연신 끌어당겼다. 은빛 종이학은 강아지 이빨에 걸린 채 쓰레기 더미를 떠났다.

 호젓한 산책로를 지나 둥근언덕을 내려올 때였다. 주인은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려고 걸음을 멈추었다. 강아지가 간식 냄새를 맡고 입을 벌렸다. 주인이 간식을 입에 넣어주려다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포포! 또 뭘 주워 먹은 거야? 어서 뱉어, 어서!”


 주인이 강아지 입 앞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강아지는 그만 손바닥 위에 은빛 종이학을 훅 뱉었다.


 “으, 이게 뭐야! 쓰레기를 주워 먹으면 어떡해, 포포!”

 주인은 눅눅해진 종이학을 풀밭에 휙 던졌다. 은빛 종이학이 한쪽 날개를 열심히 퍼덕거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속절없이 풀밭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얘, 잠깐 옆으로 비켜 봐.”

 정신을 잃었던 은빛 종이학이 별안간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깨어났다.

 “얘, 좀 나와 보라니깐? 거기에 꿀이 가득 하단 말이야.”

 눈을 떠보니 새하얀 나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은빛 종이학이 떨어진 곳은 활짝 핀 꽃술 위였다.

 “미, 미안해. 여기가 네 자린 줄 몰랐어.”

 나비는 팔랑이는 날개로 찐득해진 종이학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그러고는 꽃술에 앉아 꿀을 쭉쭉 빨아먹으며 말했다.

 “근데 넌 나비도 아니고, 새라고 하긴 나보다 작고……. 대체 정체가 뭐야?”

 나비가 새침한 눈을 하고선 종이학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난 종이로 만든 학이야. 지금은 한낱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만…….”

 “학이라고? 내가 본 학은 나보다 훨씬 컸는데! 아, 알겠다! 넌 아기 학이구나?”

 나비는 ‘종이’를 모르는 거 같았다. 꽃밭에서만 살아왔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기 학……?”

 은빛 종이학이 조금 웃었다. ‘아기 학’이 된 게 내심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비가 애처로운 눈으로 물었다.

 “얘, 너 엄마는 어디 있어? 길을 잃은 거야?”

 “엄마……? 어, 저기 나, 나무숲 어디에 있을 거야!”

 은빛 종이학이 대충 둘러댔다.

 “맙소사, 엄마가 걱정하실라! 내가 얼른 데려다줄게.”

 “어?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괜찮…… 으아아!”


 나비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종이학을 등에 태웠다. 낯선 바람결에 은빛 종이학이 휘청였다. 축축해진 종이 덕에 금세 나비 등에 철썩 붙었다. 실바람에 차츰 몸을 맡겼다. 나비의 푸르른 세상이 끝없이 펼쳐졌다. 유리병 안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내가 정말 날고 있어. 하늘을 날고 있다고!’


 나비는 우거진 숲 속에 들어가 무작정 새 둥지부터 찾았다. 그러고는 은빛 종이학을 엉뚱한 둥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맞지? 아직 엄마는 안 오셨나 보네.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나비야, 혹시 여기가 어디…….”

 “고맙단 인사는 됐어. 그럼 난 이만!”

 나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날아갔다. 나비에게 새 둥지를 구별하는 눈은 없는 모양이었다. 은빛 종이학은 차갑고 거친 둥지에 꼼짝없이 갇혀야 했다.

 “아잇, 깜짝이야! 넌 누구야?”

 어두운 둥지 안에서 누군가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종이학보다 조금 더 큰 아기 벌새였다.

 “안녕……! 나는 아, 아기 학이야. 많이 놀랐지?”

 은빛 종이학이 얼떨결에 거짓말을 했다.

 “아기 학이라고? 그런데 나보다도 작네? 우리 벌새들보다 작은 새는 처음 봤어.”

 아기 벌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만난 아기 학이 제법 마음에 든 거 같았다. 아기 벌새가 아기 학에게 물었다.

 “우리 둥지엔 왜 온 거야?”
 “잘못 찾아왔어. 나비가 날 여기에 두고 갔거든.”

 “그래? 이왕 그렇게 된 거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 나랑 놀자.”

 “고마워.”

 아기 벌새가 잔뜩 신이 났는지 조그만 날개를 파닥거렸다.

 “학은 선물을 물어다 주는 새라고 하던데. 네가 그 학이라는 거지?”

 “그게, 사실은……. 난 종이학이야. 종이로 접은 가짜 학. 미안해. 내가 거짓말했어.”

 “종이학? 뭐 어때! 그래도 학은 맞잖아. 그렇지?”

 “응.”

 “너는 종이여서 그런지 정말 예쁜 빛깔을 갖고 있구나? 많은 새를 봤지만, 너처럼 빛나는 새는 본 적이 없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사람들은 날 좋아하지 않아. 나보다는 최신형 장난감 같은 근사한 선물을 좋아하지.”

 “너야말로 얼마나 근사한데! 정성 들여 만들어진 학이잖아.


 은빛 종이학이 고개를 떨구었다.

 채이는 분명 그랬다. 한 달 동안이나 천 마리 종이학을 정성스레 접었다. 채이가 마지막 천 번째로 고른 종이는 은빛 색종이였다. 거기에는 영우를 향한 메시지를 적어 학을 접었다. 완성된 천마리 종이학 유리병에 담아 영우에게 생일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영우 생일을 이틀 앞두고였다. 영우는 벌써 많은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았다. 자동차 장난감, 캐릭터 필기구 세트, 스마트폰 케이스 같은 멋진 선물이었다. 채이의 종이학은 소리 없이 초라해지고 있었다.


 “그랬지……. ”

 아기 벌새는 작은 날개로 은빛 종이학을 토닥였다. 은빛 날개를 어루만지던 아기 벌새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히익! 여기 좀 봐. 네 날개가 찢어졌어. 이제 곧 우리 엄마가 오실 거야. 엄마한테 치료해 달라고 해보자.”


 어미 벌새가 온다니! 은빛 종이학은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 새 부리가 은빛 몸뚱이를 죽죽 찢어놓는 상상을 했다. 때마침 어미 벌새가 먹이를 가지고 나타났다. 아기 벌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엄마! 제게 친구가 생겼어요! 종이학이에요. 나비 등을 타고 왔어요. 그런데 날개를 많이 다쳤어요. 어떡하죠?”


 어미 벌새가 은빛 종이학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이게 뭐야! 이건 학이 아니잖아? 이런 지저분한 종이 쪼가리가 우리 둥지에 있다니, 맙소사.”

 어미 벌새는 아기 벌새에게 해라도 까 종이학을 잽싸게 물었다.

 “엄마, 그 애는 제 친구라고요!”

 “종이 쪼가리가 어떻게 네 친구니? 여기 뒀다가 괜히 왕부리새 눈에 띄기라도 해 봐. 그럼 아주 큰 일이라고!”


 어미 벌새는 종이학을 부리 사이에 가둔 채로 훌쩍 날아올랐다. 아기 벌새와 인사할 틈도 주지 않았다. 은빛 종이학은 뾰족한 부리로 잔뜩 쪼임을 당하지 않은 걸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미 벌새는 숲 속을 벗어나 시내로 나아갔다. 시내에는 종이 쪼가리 비슷한 쓰레기들이 많았다. 버려도 티 나지 않을 만한 곳을, 어미 벌새는 잘 알고 있었다.


 “널 쪼아버리지 않은 건 아기 벌새가 널 잠시나마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이야. 다신 우리 아기 벌새 앞에 얼씬도 말거라! ”

 어미 벌새는 종이학을 공중에 떨궜다. 찢어진 은빛 날개가 애처롭게 팔랑였다. 날갯짓은 아무 소용없었다. 은빛 종이학은 흩날리는 진눈깨비처럼 쓸쓸한 바람을 타고 떨어졌다.


 톡.


 “앗! 뭐야, 내 머리에 새똥이 떨어졌나 봐!”

 은빛 종이학은 열 살 배기 남자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머리 위를 탁탁 털어보았다. 종이학이 땅으로 떨어졌다. 새똥이 아니었다. 아이의 찡그린 얼굴에 금세 호기심 꽃이 피었다.


 “어, 이건 종이학이잖아? 어디서 난 거지?”


 아이는 발 앞에 놓인 종이학을 요리조리 살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요정을 만난 듯 하얀 미소를 지었다. 은빛 종이학은 형체만 겨우 남은 채 제법 구겨져 있었다. 선 따라 다시 접으면 예쁜 종이학으로 돌아올 거 같았다. 아이는 종이학이 찢어지지 않도록 살살 펼치기 시작했다. 펼친 은빛 종이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생일 축하해.’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세상에, 오늘이 내 생일인데! 하늘이 보낸 선물인가 봐!

 신이 난 아이가 두 발로 콩콩 뛰었다. 푸른 하늘과 은빛 선물을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는 올록볼록해진 책가방을 열었다. 학교에서 받은 크고 작은 생일 선물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선물들 사이를 휘휘 저으며 겨우 교과서를 꺼내 집었다. 그러고는 은빛 색종이를 작은 손톱으로 싹싹 펼쳐서 교과서 사이에 곱게 끼워두었다.


 ‘오늘은 정말 최고의 생일이야!’

 빳빳하게 펴놓은 은빛 종이를 바라보며 아이가 빙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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