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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tattoola Oct 22. 2024

날 강하게 키워준 손님 2

환자 손님과 갱스터의 애인

    트로피 손님을 받고 몇 달 뒤, 뜨거운 햇빛이 저문 후 바람이 비교적 선선하던 저녁에, 누군가 샵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당시 샵에는 나와 다른 베테랑 작업자 한 명뿐이었는데, (편의상 B로 지칭하겠다.) 도어벨이 울리고 반팔 차림의 손님이 들어오자마자 온몸에 빨갛게 수포처럼 돋아난 손님의 빨간 피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정말 영락없이 위생시험에서 보던 카포시 육종(에이즈 환자에게서 많이 보이는 악성 질환이다.) 사진처럼 보이는 붉은 반점이 얼굴을 포함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몸을 긁던 손님은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아무거나” 타투를 받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장. 많이 부서진 상태로 샛노랗게 변해 있는 손님의 손톱과 피부 상태를 보면 당연히 타투는 택도 없는 소리였지만, 친절하게 응대하기 위해 피부질환이 있으신 상태에서는 타투를 해드릴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괜찮다. 돈 줄 테니 빨리 지금 당장 타투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안 괜찮은데…’


    약간 무서워져서 B에게 도와달라고 힐끔 쳐다보니 (키와 덩치가 무척 커서 거대하고 귀여운 테디베어 느낌을 가지고 있던 중년의 남자 타투이스트분이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나를 두고 화장실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B는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두 시간 넘게 스스로를 감금했다.) 당황한 나를 두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버린 그를 닭 쫓던 개 마냥 쳐다보고 있었더니, 손님은 꼭 나에게 타투를 받고 싶다며 더욱 강하게 때를 썼다. 아무리 담력이 강한 나라도 이건 무서웠다. 이제는 건강하신 분이라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결국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SOS를 청했는데, 사장님께서는,


“네가 만약 모든 손님을 병균 보유자라고 생각하고 철저히 위생을 지킨다면, 설사 그 손님이 정말 에이즈나 다른 병이 있다 해도 겁낼 것이 없을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80년대 무법지대 같은 시절, 에이즈 감염자에게 직접 타투를 해줬던 경험을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그때는 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이 직접 보지 않아서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그 순간은 나의 안전이 뒷전인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정말 에이즈 환자도 손님으로 받으셨던 분이다... 할 말은 없다. 맞는 말이긴 해도 살갗을 뚫어 피를 묻히는 직업인데 백 불 벌자고 이런 리스크를 짊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서 이번만큼은 싫었다.


    결국 계속 자리를 지키고 서서 두 시간째 나를 바라보던 손님에게 "이렇게 계속 영업 방해를 하면 경찰을 부르겠다"라고 큰소리로 엄포를 놓고, 실제로 전화기를 들어 신고하려 하자 그제야 후다닥 나가셨다. 좋게 설득하려 하니 될 것 같아 계속 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화장실에서 듣고 있다가 슬며시 나온 B에게, 대체 어떻게 신참인 나를 이상한 손님과 둘이 두고 갈 수 있냐고 크게 쏘아붙였더니 배시시 웃으며 자기도 무서웠다며 사과했다. 나보다 20년 이상 연상이고, 여러모로 곤란할 때 도움을 주진 않는 선배였지만, 뭔가 귀엽고 솔직해서 미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샵에 출근하니 건물 밖에서부터 여자의 비명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가 보니 B가 식은땀을 흘리며 어떤 히스패닉 여성 손님의 등에 작업을 하고 있었다. 스텐실을 보니 등 전체에 날개를 하는 모양인데 이제 겨우 끄트머리 깃털 하나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보통 타투이스트들은 그렇게 작업에 방해가 되면 손님에게 가만히 계시라고 말이라도 하는데 입도 벙긋 안 하길래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여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소리 지르며 온몸을 비트는 손님을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 유튜브에서도 본 적 없었다. 몸을 어찌나 격렬하게 움직이며 소리를 지르시는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B가 죽상을 하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바로 옆 의자에는 문신이 빼곡히 차 있는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B를 째려보며 앉아있었는데, 들어보니 그 남자는 바로 여자 손님의 살벌한 갱스터 애인이었다! LA를 주름잡는다나…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고 있었구나. 불쌍한 B가 풀 죽어 두려워하는 표정을 보자, 나를 두고 화장실에 갔을 때의 얄미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측은함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마음으로 응원하며 문을 닫고 샵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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