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굴러 떨어졌다. 오리 밥을 주러 내천에 갔다가 돌계단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우리 오리도 아니었다.
구급차에서 아버지는 사실상 마지막 말을 뱉으셨다.
“추워.”
그날 잠실에서 미팅 중이었다. 동생의 연락을 받고 남편에게 상황을 알렸다. 상사에게 연락했고 이틀 뒤에 있을 출장도 미루어 달라 부탁했다. 새벽 비행기를 예약 후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상태와 어머니의 안부만 묻고 끊었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통화했고, 짐을 쌌으며 저녁 설거지까지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다.
병실 앞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탁한 눈으로 우리를 맞았다. 마음 놓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우리에게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까지 모두 모였고 면회까지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우린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버지를 살려 달라는 기도를 했을까. 돌아가실지도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신호처럼 손을 꾹 붙들었다. 수술을 할 수 있을지 경과를 봐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길 바랐다. 알코올에 찌들고 허약한 아버지는 수술의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네 남매가 둘러 섰다. 죽은 듯한 아버지가 힘겹게 두 번 숨을 내쉴 때마다 발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서늘하고 마른 그 발을 잡아 보았다. 의식이 없어도 홀로 고통과 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일주일 후 돌아가셨다. 명을 다 채운 노인의 죽음처럼 장례식장 안에는 꽃과 사람들의 소리로 빈틈이 없었다. 누가 손님인지 누가 일손을 돕는 사람인지 모르는 곳에서 어머니는 전에 없이 활기찼다. 때때로 손님들 맞는 일과 음식을 내어 놓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기이했다. 시내에 사시는 나이 지긋하신 친척 할머니가 오시자 어머니는 뜨거운 국물이 든 미역국 쟁반을 직접 날랐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할머니가 국물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추워.”
오랜만에 아버지가 가엽게 느껴졌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숭늉을 후후 불면서 마시던 아버지. 12월 써늘한 물웅덩이에 반쯤 몸이 담긴 아버지는 추워서, 너무 추워서 돌아가셨을 거다. 오리들은 쓰러진 아버지의 낡은 점퍼 위에 흩뿌려진 밥알 주변으로 모여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이 난간 아래를 내려다 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