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산담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문희 Sep 27. 2024

커피잔에 콩죽

  

  원래 사이좋은 부녀였다. 늦게 결혼해 얻은 첫 딸은 입안의 혀처럼 살갑게 굴었다. 아버지 역시 심성이 다정하고 순한 사람이었지만 기운차고 부지런해야 할 촌부의 미덕은 갖추지 못했다. 아침에 밭일을 시작하면 힘에 부쳐 오후에는 드러누워야 했고 벌여 놓은 일은 많아도 어느 하나 마무리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 몫은 고스란히 어머니와 우리가 떠안았다.

  

  아버지의 사람 좋은 얼굴과 재미난 이야기면 충분했던 언니는 점점 아버지의 이면을 알게 되었다. 아마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이가 돼버린 건 그날 이후였을지 모른다.

  

  일손 하나가 아쉬운 계절이었다. 한낮에 아버지는 집에 손님을 모시고 왔다. 손에는 4홉 소주가 들려 있었다. 손님에게 방석까지 깔아주시는 아버지의 얼굴엔 쑥스러운 듯 천진한 미소가 보였다. 감색 양복에 넥타이를 매신 분은 먼 곳에 사시는 아버지의 옛 친구라고 하셨다.

  “미정아, 술상 받아와라.”

  이미 술을 드신 모습도 반갑지 않았지만, 어린 우리에게 술상 심부름을 시키다니 언니는 당황하여할 줄 모른다고 아버지에게 눈치를 주었다.

  “나이가 몇인데 그것도 못 하냐. 술잔 하게 그, 그거 커피잔이나 갖고 와라.”

  덧붙여 말했다.

  “집에 안주할 게 뭐 있냐?”

  “아침에 엄마가 콩죽 쒔는데...”

  “그럼 소반에! 커피잔에! 콩죽에! 수저 챙기면 되겠네.”

  아버지는 점잖게 앉아 계신 손님 눈치를 보며 다급하게 내뱉으셨다.

  

  난생처음 술상을 차리게 생긴 우리는 부엌에서 우왕좌왕했다. 그래도 시골집 마루에 옛 친구를 들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었다. 겨우 짝을 맞춰 수저를 올린 그 작은 상을 둘이서 마주 들고 아버지와 친구분 사이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으나 이내 표정이 굳었다. 둥근 소반 위에 놓인 커피잔 안에는 콩죽이 되직하게 들어앉았다.

  

  나에게는 그저 우스운 경험이었지만 둘은 수시로 그 사건을 곱씹었다. 아버지는 척척 알아듣지 못하는 딸을, 언니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아버지를 탓했다. 언니는 사건이 원인이 아버지라는 걸 집요하게 상기시켰다. 어느 순간부터 무력해진 아버지를 예의 바르고 논리적으로 단죄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감정이 격해졌고 서운해했으며 더욱 고집스럽게 게을러졌다. 둘은 이상적인 아버지와 딸을 기준으로 두고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언니와 나는 하루 더 고향 집에 머물렀다. 커피와 쿠키를 곁들여 마루에서 잠시나마 달콤한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언니는 자신이 어렸고 아버지가 젊었을 적 몇 안 되는 둘 사이의 에피소드를 꺼냈다.

  “우린 커피잔과 콩죽이었어.”

  언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잔의 얄브스름한 손잡이를 잡았다. 뜨거운 김을 후 부니 구수한 콩죽 냄새가 퍼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