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집집마다 우영팟이 있다. 우영팟은 집 주위에 있는 작은 텃밭이다. 그곳에 호박, 양파, 오이, 상추 등 사계절 내내 양식이 될 채소가 자란다. 우리 집 마당 앞에 길게 우영팟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우영팟에 꽃씨를 뿌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고추씨를 심어야 할 곳에 먹지도 못할 꽃타령이냐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가을 아침. 등교하려는 나의 눈앞에 밤사이 모조리 만개한 하얀 꽃봉오리들이 밀려들었다. 메리도 놀랐는지 꽃을 보며 컹컹댔다. 하얀 캡 모자를 쓴 아버지가 담배를 입에 물고 긴 호스로 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는 자랑스러운 듯 돌아보며 말했다.
“학교에 꽃 좀 가지고 갈래?”
흰 국화가 넉넉하게 신문지에 돌돌 말렸다. 보기 좋았다. 열매를 감싸 안 듯 동그랗게 오므린 꽃잎이 탐스러워 난 어쩔 줄 몰랐다.
언제부터 하얀 국화가 조화로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어릴 적 이 꽃을 아무렇지 않게 학교로 들고 갔고 꽃병에 꽂아 교탁 위에 두면 아이들도 선생님도 좋아 웃었다. 집에 오시는 분들도 예쁘다며 한 아름씩 꺾어 가시는 걸로 보아 제주에선 그저 고운 가을꽃이었을게다.
가을밤 해가 져 노곤한 몸을 이끌고 온 어머니가 수돗가 댓돌에 앉아 하얀 우영팟을 쳐다보았다. 고추가 자라 빨갛게 익어할 그 자리에 흰 국화가 가득하다. 어머니는 가만히, 오래도록 국화밭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생각난 듯 일어나 호스를 들고 꽃에 물을 뿌렸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엷은 미소가 보였다.
어둑해질수록 국화는 더 하얘지고 고요해졌다. 그 틈을 타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다. 집에 전등이 모두 꺼지면 우리 집 마당은 하얀 국화와 그 옆에 웅크린 메리와 귀뚜라미 울음소리로 가을이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