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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Oct 08. 2024

은행


은행. 은행나무의 열매. 여름날 은행나무를 위로 올려다보면 청포도 같은 알맹이들이 가득가득 들어차있다. 열매가 노랗게 물들고, 떨어지고, 거리에 꼬릿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면, 걷는 내내 바닥을 조심해야 한다면, 드디어 가을이 온 거다.

 - 오늘은 은행구이에 맥주를 먹자.

친구 세명과 호프집에서 모둠꼬치구이를 시켰다. 다른 것도 양이 퍽 적었지만 가장 서운했던 건 이쑤시개에 꽂힌 은행 세알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은행 세알을 나눠 먹으니 너무 감질맛이 났다고, 더 먹고 싶었다는 말을 스치듯 이야기했다.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손질한 은행을 두 봉지나 나에게 안겼다.

 - 우와 엄청 많은데?

 - 우리 딸 먹이려고 깠지. 독이 있다니까 10개 이상씩 먹으면 안 돼.

 - 10개씩이면 100번도 더 먹겠는데?

나는 매끈하고 작은 은행 알갱이들을 기름 두른 팬에 살랑살랑 구워냈다. 맛소금도 잊지 않고 살짝 뿌려 간을 맞추었다. 포크로 콕 찍어 한 알씩 입에 넣어 씹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에 작정하고 먹으면 10알 넘게 먹을 수 있지만 참아야 했다. 그렇게 맥주 안주삼아 두세 번 꺼내어 볶아먹고는 냉동고 한편에 넣어두었고, 내내 잊었다. 아주 나중에서야 은행이 손질하기 어려운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랗게 익어 떨어진 은행을 줍는다. 물렁해진 노란 과육을 벗겨내기 위해 양파망 따위에 은행을 넣고 서로 문지르고 으깬다. 그러면 딱딱한 겉껍질에 둘러싸인 은행알이 나온다. 은행알을 깨끗이 씻는다. 냄새는 보통 겉 과육에서 나는 것이므로, 으깨고 씻어내는 동안 꼬릿한 냄새를 견뎌야 한다. 은행을 잘 말려 가위 따위로 겉껍질을 부수고 깐다. 그제야 우리가 먹는 은행알이 나온다.

세상엔 내가 깨닫지 못한 사랑이 너무 많아.

오래전, 할머니는 계절마다 여러 음식들을 우리 집으로 보내었다. 봄에는 수확한 마늘을 다져 몇 봉지씩 보내고, 고추가 빨갛게 익으면 그것을 빻아 고춧가루를, 들깻잎에 열매가 들면 기름을 내어 들기름을, 늦가을에는 김장 김치를. 그것들이 얼마나 맛있고,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를 보러 시골에 내려간 날, 할머니는 손등에 커다란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등에 붙이는 큰 사이즈의 파스를 말이다.

 - 손등에 파스를 왜 붙이는 거야?

 - 손 끝이 시리고 관절이 아픈게.

 - 왜 그러지?

 - 오늘 마늘을 다진게 그런가벼.

할머니는 우리가 오는 아침부터 마늘 껍질을 까고, 다듬고, 절구에 넣어 빻기를 계속했을 것이다. 마늘껍질을 얇아서 벗기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손 끝에 매운 마늘이 닿아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진 마늘은 엄마 자동차 트렁크에 실릴 것이다. 우리 집 냉동고에 차곡차곡 쌓여 보관될 것이다. 하루종일 허리를 웅크리고 손가락을 오므려 마늘을 빻았을 할머니를 떠올렸다.

-      다진 마늘이 뭐라고, 그냥 사 먹고 말지.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할머니 작은 손등에 꼭 맞게 파스를 오려 놓았다. 할머니가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하는 그 파스를.

국내산 고춧가루가 얼마나 비싼지. 갓 짠 들기름이 얼마나 맛이 좋은지. 냉동실에 쟁여놓는 다진 마늘이 얼마나 든든한지. 그 꼬릿한 냄새가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길을 가다 어디선가 꼬릿한 은행냄새가 난다. 바닥에 부서진 노란 은행 과육을 본다. 은행을 까고 있는 엄마의 손 끝을 상상한다. 손이 시리도록 마늘을 다졌을 할머니의 손끝도. 어쩐지 냄새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 오늘은 냉동실에 엄마의 사랑을 꺼내 기름에 볶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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