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와 개통한 번호를 친한 친구 몇 명에게 알려주었고, 짧게 인사를 나누며 다음에 서울 가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서로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들도 각자의 삶이 바빴을 것이고 나도 번아웃으로 인고의 시간을 보냈으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유학하는 동안에도 연락이 몇 번 오가지 않았었기에 마음속에서정을 간직하는그것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20년 이상 된 친구들은 언제 봐도, 말없이 그냥 있어도 편하고 좋다고 믿었으니까.
24년 지기 친구 J.
번호 개통 초기에 하루에몇 시간씩 메시지로 대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해외에 있을 때도 가끔 안부를 물어주었던 친구였고 고등학교부터 인연을 이어오며 추억도 함께 나누어서 평생 친구로 남아 노년에도 옛날이야기를 하며 재미있게 여생을 보내고 싶은 친구이기에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연락이 반갑기도 했다. 번아웃으로 혼자만의 동굴로 들어가려던 차에 계속 대화를 이어가줘서 고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자 그 친구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면서 나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정치는 내 관점에서 벗어난 이야기였고, 사느냐 죽느냐를 생각하며 매일같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괴감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며, 또 누군가를 지지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걸 논할 깜량도 안 된다며 둘러댔지만 계속 묻는 통에 뉴스 기사를 검색해 보고 짧은 소견을 말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더니 그 친구는 나와의 절교를 선언하며 자신과 결이 맞지 않으니 이제는 연락하지 말자라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그때 나는 그 친구의 선택을 존중했다. 국민으로서 그리고 공동체 운명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히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와 그가 놓인 상황이 다른 관계로 생각의 폭도 달랐던 것뿐이다. 그러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절교였다는 것에 나로서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존중하고 싶었다.
"그래, 너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아있는데 내가 함께 가지 못했구나. 그래도 나는 단절보다 잠시 서원해지는 때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언제고 다시 보자. " 이 말은 차마 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 둔 채로, 나는 깊고 깊은 나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같은 꿈을 꾸던 친구 S.
1년이 조금 더 지나는 동안 혼자 산을 다니며 키운 체력과 마음의 근육으로 이제는 번아웃을 극복하기 위한 다른 시도와 변화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뒤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밝은 척 통화를 하기에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면서 서울에 왔으니 한 번 보자고 얘기했다.
20년 지기 친구 J는 워킹맘으로 미취학 자녀 한 명을 양육하고 있어서 요즘 아이와 관련된 모임도 많다고 했고, 관리자급으로 승진해서 회사일 바쁘다고 했다. 그러다만남 일정을 두어 번 미루다 보니 연락이 끊어졌다.
20대 때 둘도 없이 친했고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지금은 그 친구와 나의 상황이 달라졌다. 싱글인 나로서는 나 하나만 건사하면 되지만, 그 친구는 가족과 회사를 두루 챙겨야 하니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을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연락해서 자기 삶에 다시 나를 들여달라 밀어붙이는 것은 억지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더라도 그 친구의 마음이 나에게 향하는 날이 있다면 그것으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번아웃,
번아웃을 겪는 동안 관계에 대한 무용함도 느끼게 되면서 친구 사이에서의 소원함도 그러려니 하면서 이해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아진 것 같다.
24년 지기 H.
작은 체구에 강단이 있는 멋진 친구. 멀리서나마 항상 그 친구의 삶을 응원했었다.
H와 만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고, 일을 안 하는 내가 그 친구의 회사 앞으로 가겠노라 장소까지 정했었지만 당일 날 심리상태가 불안해지면서 한 시간 반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안 나오는 상황까지 겹치게 되면서 만나도 술을 마시고 오래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곳 근처로 올 수 없는지 물었지만, 갑작스레 변경된 약속에 친구의 불편함이 메시지에서도 느껴졌고 결국 약속은 무산되어 미안한 마음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서 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메시지를 삭제하게 되었다. 이미 나는 그 친구의 번호를 받아서 저장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번아웃이 심각해지면서 기억력 감퇴 증상들도 심해졌었고 순간 리셋되어 그것을 잊은 채 또다시 알려 달라 말해버린 것이다.
얼마나 본인에게 관심이 없고 배려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너무 미안했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개통한 번호에는 10여 개의 연락처와 카톡 몇 개가 전부였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좋을 텐데 왜 계속 놓고 사니...
시간 개념, 정확성,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들었던 나였는데, 왜 이렇게까지 된 건지...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그 친구에게 이러저러한 심리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도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 번째 친구도 연락이 끊겼다.
내가 놓아버린 정신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번아웃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번 꼬인 실타래는.
그리고 다시 관계를 단절 한채 몇 달을 보냈다. 매일같이 운동도 하고 면허증 3종 취득을 위해 노력하며 성취감을 일순간 경험하기도 하면서 전보다는 심리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괜찮아졌으니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만나서 옛 추억을 회상하며 열정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미뤄왔던 친구들 모임에 가기로 했다.
20년 이상 된 친구들이 각지에서 모이기로 한 날, 지방에 있는 친구네로 갔고 다들 모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친구들이 가져온 양주를 마시면서 옛 주량만 생각하고 마시다 기억을 잃고 말았다.
번아웃이 시작될 즈음부터 끊었던 술, 3년이 넘어 다시 마신 것이 화근이 되었을까.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아이 방에 혼자 누워있었고 방바닥 한편에는 토를 해둔 상태였다. 이런 일이 내게, 이 나이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너무 수치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숨죽이고 부리나케 방바닥을 치우고 닦았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술기운으로 아픈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친구들 앞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번아웃으로 힘들었는데 누군가의 한 마디로 마음이 울컥했었다며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와 정치 관념이 달라서 절교를 선언했던 친구 J 가 있었다.
아뿔싸, 모든 것이 잘 못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한 것일까. 지난밤의 기억을 돌려 보니 J 가 와서 합류한 것은 술자리의 중반이었기에 기억이 생생했고 서로 어딘가 서먹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어울렸다. 그러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취하면서 친구들에게 나의 속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위안이나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여나 내가 연락을 못해서 서운했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그게 아니라면 오해가 있었다면 이해해 달라는 의미에서 였던 것 같다. 그리고그 모습을 본 J는 또 다시 등을 돌렸다.
그 모임의 친구들은 20년 이상 봐온 나를 활기차고 술도 쎄서항상 술자리에서 사람들을 챙겼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 처음 보는 나의 모습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넓고 배려가 좋은 사람들이라 내가 그런 모습을 보였더라 해도 이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다음 날이 되어도 내가 어제의 일을 묻기 전까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은 괜찮으냐 물고 평소처럼 대했을 뿐.
그러나 문제는 내 마음에 있었다.
감정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번아웃에서 벗어난 것 같다며 섣부르게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추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한 마음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뒤섞여 오래토록 나를 힘들게 했다. 한국에 돌아온지 2년이훌쩍지난 때였지만 번아웃은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그날 이후로 다시 그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괜찮지 않은 감정상태.
그것은 내가 가장 방심했을 때 마음을 지나 입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말하며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잠시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걸.
모든 사람이 내 감정을 알아주고 나만큼 절실하게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도 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상황일 뿐이다.
내 기억의 파편들이 온전치 않아 혹시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실수가 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라며.
지금도 나는 기다린다.
언젠가는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고 다시 한 줄로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제는 극복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다시 실수로 기억될 일을 만들게 될까 봐 조심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