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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첼리나 Sep 23. 2024

루마니아에서 첫번째 거주증 만들기

이틀동안 줄을 서다

한국에서 받은 루마니아 비자는 90일 체류권이다. 90일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체류할 예정이라면, 반드시 비자 만료 전에 거주증 (쉐데레, sedere)을 발급받아야 한다. 거주증이 없으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다. 당연히 다른 나라로 이동은 불가능하며, 추후에 루마니아 입국이 꽤 오래 거부될 수도 있다.

    

나의 비자 만료일은 12월 5일이었다. 12월 21일에 겨울방학은 시작되기 때문에, 거주증을 빨리 만들어야 했다. 겨울방학에 폴란드와 노르웨이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으니까! (오로라 볼 거야.)


그러나 슬프게도 거주증은, 루마니아에 도착하자마자 접수할 수 없다. 또 생각보다 내야 할 서류가 많다. 학교에서 발급한 서류, 숙소 계약서, 경찰서 증명서까지. 그런데 유럽의 행정은 한국과 완전히 다르다. 느리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한국 학교라면 5분 안에 받을 수 있는 서류를, 무려 한 달이나 기다린 끝에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서류가 준비됐으면 이민국에 가야 하는데, 이민국이 문을 여는 시간도 요일마다 다르다. 에휴.


루마니아 이민국


아무튼 함께 일하는 교수님과 수업까지 빼가면서 이민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충격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다양한 인종으로 북적이는 건물로 들어가서, 우리는 길고 긴 줄 끝에 섰다. 그런데 줄이 줄지 않는다. 한 사람당 30분은 걸리는 것 같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우리 앞에 두 명 정도 남았을 때였다. 바로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마감이 1시 30분이니, 더 이상 접수를 받지 않겠다.”   

  

기다리던 중국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경찰들은 단호하게 창구 문을 닫았다. 수업까지 빼고 기다린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감 시간이 지났더라도 그들을 받아 줘야 하는 것인가. 직원들의 퇴근을 위해 마감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고객과 직원의 권리 가운데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가. 번호표를 주거나, 곧 마감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 정도가 있으면 더 좋았겠다, 이 정도로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교수님과 나는 전날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튿날에는 오픈런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1등 아니냐는 농담을 하며 문을 열던 우리는 절망했다.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12시 30분부터 업무 시작인데, 우리는 11시 30분에 갔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아침 7시부터 줄을 선 사람이 있다니, 우리가 결코 빠른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오후 3시 30분이 넘어서야 접수대 앞에 설 수 있었다. 입꼬리를 애써 들어 올리며 서류를 건네는데, 루마니아 직원이 루마니아어로 질문 폭격을 시작했다. 나한테 왜 이러세요. 루마니아에 온 지 한 달 남짓 된 사람이랍니다. 인사만 겨우 하는 내가 대답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직원은 가차 없이 내게 여권과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루마니아어를 못 하면 거주증을 발급해 줄 수 없다.”

    

부쿠레슈티 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이고, 채용할 때 그런 조건은 없었으며, 다른 외국인 교수도 루마니아어를 못 하지만 거주증을 받았고, 서류가 다 있다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소용없었다. 동행한 루마니아 교수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밖으로 나가 다른 직원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기까지. ‘멘붕’이라는 단어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구나,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교수님과 이야기하던 직원이 문제의 근원과 해결책을 발견했다. 이민국에서 서류를 직접 작성해야 하는데, 우리가 ‘영주권 신청’을 위한 서류를 쓴 것이다. 영주권을 받으려면 루마니아어를 잘해야 하나보다. 새로운 서류를 작성하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다시 줄을 서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결국 우리는 긴 줄 끝의 마지막에 섰다.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 처음부터 눈물바람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이 자기 창구로 오라고 손짓한 것이다. 안쓰러웠나 보다. 기쁜 마음으로 창구에 가서 서류를 내는데, 문제가 또 발생하고 말았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자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 창구는 인터넷으로 접수한 사람들을 위한 전용 창구였다. 당연히 예약제 창구라 현장에서 줄을 선 사람들을 위한 곳보다 여유로웠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삿대질과 욕을 시작했다. 루마니아어를 알아듣는 루마니아인 교수님은 쏟아지는 욕설에 힘들어하셨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선생님, 욕먹는 건 순간이지만 거주증은 1년이에요.”


폭포처럼 쏟아지는 욕을 고스란히 다 들으며 (사실을 못 알아들었지만) 버틴 끝에 접수에 성공했다. 이 한 장의 영수증을 받기 위해, 이틀을 나는 그리 울었나 보다.


거주증 카드를 받기 전 발급받는 종이쪼가리

한 달 후에 이 영수증과 여권을 가지고 가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거주증을 받을 수 있다. 한 번에 통과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단번에 접수했으니 행운아겠지.   

  

나는 안다. 이 행운은 오롯이 나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친절한 루마니아인들의 도움 때문에 무사히 이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꼭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얼마 전 법이 바뀌어 루마니아에서 일하려면 반드시 루마니아어를 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내 앞에서 거주증을 신청하던 남자에게 루마니아어 공부 좀 하라고, 이민국 직원이 다그치기도 했다고 한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루마니아어가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일할 수도 있는데, 언어가 필수여야 할까. 난민 때문에 법이 강화된 것 같다고 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행정 시스템이 체계적이고 빠른 편이라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예상을, 루마니아인 교수님이 보란 듯이 깨뜨려주셨다. 그분은 한국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는데, 매년 이런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가지고 오라는 서류도 정말 많고, 매번 말도 달라지고, 조금이라도 서류가 미비하면 가차 없이 돌려보낸다고. 한국인 직원이 너무 불친절해서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나는 죄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대할까.”  

   

하지만 그 교수님 역시, 일반 노동자가 아니라 유학생 신분이라 차별에 덜 노출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한국에서 일을 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에게, 한국의 출입국사무소는 어떤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까. 그들도 한국어가 필수일까.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서류를 돌려주며 돌아가라 쉽게 말할까. 무려 5시간을 줄을 선 끝에 얼굴을 마주한 사람에게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가라 말할까.

    

외국에서 여행자가 아니라 노동자나 거주자로 지내게 되면, 생각보다 많은 벽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 벽 때문에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이번에 보고 느끼고 배운 것 역시, 한국에 있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겠지. 끝까지 곁을 지켜준 교수님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전쟁통’이었다며 책 한 권을 써보라 권하셨다. 사실 아직도 계속 설득 중이시다. 루마니아에서의 삶을 써보라고. 하지만 다른 유럽 나라에서 꽤 오래 생활하고 계신 한국인 교수님은 내 하소연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죄송하지만 9시간이면 양호까진 아니라도 평타, 슬프게도.”     


다시 말해, 나의 거주증 획득기는 유럽에 사는 다른 이민자들의 고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 앞으로 또 어떤 거친 파도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 정말 기대된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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