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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윤강사 Sep 13. 2024

하나의 삶, 두 개의 이름

불안하지만, 나는 잘하고 있다.

강사라는 직업은 온전히 내가 노력한 만큼 평가를 받는 것이 좋아 선택한 직업이다.


하지만, 매번 평가를 받는 압박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대학교 시절 성적 장학금을 생활비로 돌리고, 학자금 융자가 2천만이 있는 상태에서 출발한 사회생활은 빚을 갚고, 빛을 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잠을 줄이고, 먹는 것도 줄이고, 생활도 줄이면서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어느덧 천 권 이상 쌓인 책들을 보면서 늘 불안하지만 ‘나는 잘하고 있다’며 애써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스펙이 무엇보다 중요한 강의 시장에서 나는 어떤 곳이든 첫 관문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그 위축이 주는 열등감은 사람들의 무리에도 쉽게 들어가지 못했고, 인맥을 활용하는 강의의 기회도 쉽지 않았다. 한 칸씩, 한 칸씩 성장하고는 있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비교가 되었다. 더욱이 본격적으로 프리랜서를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고 난 이후였기 때문에 아이를 두고 일한다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일상과 일의 범위도 뒤섞인 채 내 삶은 여유가 없이 돌아갔다.




아이가 돌 무렵에는 열이 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감기라는 진단을 받다가 낫지 않아 대학병원에 갔더니 폐렴이라 입원을 하라고 했다. 입원을 하면 매일 피검사를 하는데, 삼일 째 되던 날 아침 회진때 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의사 선생님께서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오시더니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얼음이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지방과 서울의 의료기술 차이가 10년은 넘게 납니다. 어머니께서 힘드시겠지만 아이가 워낙 어리고 지금 열이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니 바로 서울대 병원으로 가시죠. 제 아이라면 저는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아이를 안고 조용히 퇴원을 했다.

그리고 병원 복도에 앉아서 내가 갖고 있던 연락처 전부에게 이 상황을 문자로 보내고 조언을 얻었다. 머리가 하얘져서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이를 그대로 둘 수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지인으로부터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 병원이 백혈병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119 구급차를 타고 영남대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자꾸만 내 눈물이 아이의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자꾸 사는 게 벌을 받는 기분일까? 그래. 그럼 차라리 나에게 벌을 주면 되지. 왜 어린아이에게.. 이제 더 이상 링거 바늘 들어갈 혈관도 없는데. 신이 있나? 신이 존재하나?


저기요! 하나님! 부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자꾸 주시는 건가요? 네?’


또 숨이 찼다.

어리시절부터 달려온 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어른들 말처럼 기술이나 배우고, 은행이나 취직을 했으면 빚을 갚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됐을까?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면 외로움을 덜 느꼈을까?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하고, 계획적으로 아이를 가졌다면 지금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을까?


그래, 맞다. 내 잘못이다.

내가 오기를 부린 탓에 또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혹시나 아이가 백혈병이면 어떡하지? 보험약관은 어떻게 되어 있더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아이한테 미안함이 북받쳤다.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나는 정말 못난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아이에게 잘 해야지. 내가 받지 못한 사랑 아이에겐 되물림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현실에서 통하지 않았다.



불안한 내 마음은 지금까지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병실에 가득한 사이비종교 책자를 보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친척들은 병문안을 와서 아이 이름을 잘못 지은 거 아니냐는 말을 한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짓고, 아버님께 한자를 부탁드려서 출생 신고를 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이름을 가지고 철학원을 방문했더니, 아이의 이름이 ‘추풍낙엽과 같고, 단명을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사실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없는 돈이라도 준비해서 이왕이면 좋은 이름으로 세상에 불리길 바랐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때 ‘아빠는 한자에 쓰면 안 되는 글자가 들어 있고, 엄마는 한쪽 날개를 잃은 독수리’라는 뜻을 지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 모두 개명을 하게 되었다.

물론 개명의 영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아이는 며칠 뒤 진행된 검사에서 백혈병이 아닌 다른 감염으로 최종 진단되어 2주를 더 치료받고 퇴원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분명 좋아질 것이다.


연예인들도 무명으로 활동을 하다가 이름을 개명하고 나면 갑자기 드라마 출연이 되고, 광고도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우리 가족도 이제 더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되어서 보통의 평범한 가정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나의 삶,

두 개의 이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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