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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을 진단받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귀인이 생겼다.

나이가 5살 더 많은 여자 대표님인데 정의롭고, 매우 긍정적인 분이다. 대표님의 부모님께서는 항상 나를 보면 말씀하신다.


“최소윤 소장님은 꼭 성공할 겁니다.

오래 살다보면, 사람을 잘 보는 눈이 생겨요. 최소장님처럼 좋은 인품을 지닌 사람들은 성공하게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요.”


분명 덕담으로 하신 말이겠지만, 나에게는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그래서 그 한 마디가 참 고맙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나도 그런 부모님이 갖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다음 생애 태어난다면 그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내게는 그 대표님이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쨌든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강의의 영역이 넓혀지고, 새로운 기회를 많이 얻게 되었다.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분은 온전히 나를 믿어주었고, 그 믿음에 부응이라도 한 듯 나는 더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래서 프리랜서임에도 강의 스케줄이 3개월씩 차 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이제 빛을 보려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이다.




하늘은 정말 날 돕지 않는 걸까?


펼쳐 놓은 수많은 일들이 정리가 될 시간도 없이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졌다.


기약 없는 팬데믹은 모두를 공포에 몰아 넣고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멈춘 관계와 거리 두기로 인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란을 겪는다고 하지만, 나는 매출만큼 키워 온 지출의 규모와 빚, 그리고 앞으로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저마다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강사도 많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 꼬박 6개월을 쉬고, 코로나 백신의 수입으로 서서히 마스크를 끼며 교육이 시작되었다.  


공공기관의 경우 강의를 하려면 백신 패스가 필수이고, 나는 서둘러 코로나 백신을 맞으려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을 했다.



남편의 지인이 의료약품 도매업을 해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병원에 빈자리를 추천해 주었고, 나는 구미에서 40분이나 걸려 김천까지 가서 주사를 맞았다.


그런데,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머리가 아프고, 온몸에 근육통이 생겼다. 그리고 다음 날 욕조 안에 들어가서 몸을 살피는데 양쪽 다리가 이유 없이 멍으로 가득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관찰을 했다. 한 달 뒤가 2차 접종이고, 그때까지는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멍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옅어지려고 할 즈음 극심한 가려움이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나와 유사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가려움이 심하다 못해 긁다가 피가 많이 나서 깁스까지 한 상태였다.  


어느덧 2차 접종일이 되었고, 의사 선생님께 양쪽 다리를 걷어서 상처투성이인 모습과 멍든 사진을 보여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일시적 일 것이라 말씀하시며, 코로나 걸려서 죽는 것보다 가려운 게 나으니까 서둘러 주사를 맞는 것이 이득이라 했다. 나는 다시 여쭈었다.


“선생님, 제가 찾아보니까 백신 접종 이후 멍이 드는 것은 혈관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글이 있던데요. 정말 괜찮은가요? 가려운 사람은 종종 있어도 멍이 드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고 어떤 글에서 본 것 같아요.”


하지만, 선생님은 단호했다.


자기의 전문성을 믿으라 하셨고, 나는 이왕 먼 길까지 갔으니 주사를 맞고 왔다. 사실 운전도 어려워서 남편에게 부탁해서 겨우 갔었는데, 그런 여러 시그널을 무시하면서까지 주사를 맞은 게 나의 최대 실수였다.


정말인지 그때는 2차 코로나 백신 접종이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바꾸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시간은 온전히 멈추었고, 비로소 악몽은 시작되었다.  


나는 집안에서 걸어 다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니 침대에서 일어나면, 발바닥을 디딜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했다. 걷다가 넘어지고, 또 걷다가 넘어진다.


그리고 허리도 점점 딱딱해지고, 그에 따라 몸 전체가 굳어서 그런지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서 160~180이 되었다. 잠은 왜 그렇게 많이 오는지 하루를 잠자는 시간으로 모두 보내게 되었다.


먹는 둥 마는 둥 그저 잠만 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치열하게 살면서 억지로 잠을 줄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을 자면서 점점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기력을 잃고 있었다. 밤마다 가위에 눌려서 소리를 치며 깨고, 어두운 형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잠에 들면 악몽을 꾸면서 식은땀을 흘리는데 이불 전체가 흠뻑 젖어서 매일 이불을 갈아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잠을 많이 자서 활동량이 부족해지면서 배변활동이 쉽지 않았고, 언제부터 인가 자의적인 배변이 되지 않아 인위적으로 배출해야 했다. 병원을 가려고 하면 눈앞이 뿌옇게 되면서 시야가 흐려지고, 반대로 청각은 예민해져서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몸은 점점 굳어가고, 어느덧 100kg의 거구가 되었다. 50kg에서 시작된 3개월 만의 변화가 지금도 생각하면 좀처럼 상상이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몸을 자각할 수 있는 기운조차 없이 그저 시체처럼 지내고 있었고, 아이가 동생 생긴 거 같다는 말에 비로소 거울을 봤기 때문이다.


정말 조금만 움직이면 온몸이 아픈 통증 때문에 그냥 차라리 누워 있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아파서 병원을 방문하면 내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통증의학과. 이비인후과, 심장내과, 안과, 한의원 모두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코로나 백신의 인과성을 입증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조심스레 정신과를 권했다. 물론 이 병원들을 한 군데씩 간 것이 아니고 각 진료과 별로 여러 군데를 다녔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대답 아니면 정신과를 권유하셔서 결국 정신과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정신과에서는 마음의 문제는 보통 몸의 문제로 나타나지 않는다며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누워서 지내는 거 말고, 또 통증을 그저 참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밤마다 다리에 쥐가 나는 현상 때문에 정형외과를 방문했는데 자가면역질환이 의심된다고 하셔서 류머티즘 내과를 가게 되었다.


그래서 30여 종의 피검사를 한 뒤 자가면역질환이 양성으로 나와서 소견서를 가지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대학병원에서의 검사는 또 자가면역질환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결국, 섬유근육통이라는 다른 난치병을 진단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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