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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일까?

이럴 땐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현장실습도 물 건너갔다.


열심히 했던 내 시간은 끝이 나고, 나는 천식 진단을 계기로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만 한다.


‘먼지가 없고, 깨끗하면서 내 적성에도 맞는 일이 뭘까?’하는 고민으로 교차로 신문을 펼친다.



그래서 치과 병원에 면접을 보고, 취업을 했다.

첫 달 월급 80만 원을 받고, 가장 먼저 할머니 김치 냉장고를 사드렸다. 그 당시 ‘딤채’ 김치냉장고가 89만 원이니까 월급에다가 갖고 있던 돈을 더해 사드린 것이다.


나는 어르신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동안 키워 주심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단지 어린 내 마음은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요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이 병원은 매달 일정 매출을 달성하면, 인센티브가 나오는 곳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곳이었지만 점점 일을 하면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모두가 한 팀이 되어 일을 하고, 그 성과를 나누는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노력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해야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 코디네이터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강의를 들으면서 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짐을 챙겨 바로 강사 아카데미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운이 좋게도 면접을 보고, 바로 강사로 취직이 되었다. 20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아카데미인데 홈페이지로 볼 때와는 조금 달랐다. 전임으로 일하는 사람이 대표님 뿐이었고, 모두 겸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대표님과 단둘이서 숨 막히게 어떻게 일하냐고.

하지만, 나는 빨리 성장해서 내 집을 갖고 효도를 하면서 보통의 삶이 되어야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은 강사로 취업을 했으니까

강의를 가르쳐 주는 곳 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표님은 내게 100개의 연락처 리스트를 주면서 160만 원짜리 교육 과정에 사람들을 등록시키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이 일이 강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냐고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대표님은 ‘일대 일로 한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면, 일대 다수인 교육 현장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전화를 할까 고민을 했다.

혹시나 틀리면 안 되니까 혼자 대본을 짜고 연습을 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 수많은 상황들을 정리하고 그에 따른 대응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쪽 업계로 들어온 지 이제 첫 날인데 누가 내 말을 믿어 줄 것이며, 또 돈을 지불할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더욱이 얼굴도 보지 않고, 전화 한 통화로 내 말을 듣고 쉽게 결제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전략을 짤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대면으로 오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했다. 대면으로 오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거나 혹은 혜택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대표님과 논의했지만 대표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셨다. 그래서 나는 코디네이터 과정 때 배운 이미지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아카데미에 오면 면접 메이컵을 도와주겠다는 혜택으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한 달 동안 10명 이상을 등록할 수 있었다. 보통 팀장급도 10명을 못한다고 그랬는데 나는 첫 달 매출이 2천만 원 정도가 된 것이다. 그래서 대표님은 기분이 너무 좋다며 맞춤정장을 한 벌 해 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잘하는 일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며 영업을 계속 시키셨다. 나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 생계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강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대표님께 제안했다.


“대표님, 제가 목표 매출을 올리겠습니다.

대신 다른 시간은 학생들에게 개인 코칭을 하면서 강의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싶은데 그건 허락해 주세요.”


그래서 한 명으로 시작된 내 강의는 어느덧 40~50명이 빡빡하게 들어왔고, 전문 강사들의 정규 반은 이내 폐지가 되었다. 강의하는 것이 좋았던 나는 자연스레 영업에 쏟는 에너지가 점점 줄어드니 매출에도 영향이 가고, 대표님과 갈등도 생겼다.


그래서 그 매출을 기존의 맨투맨이 아닌 기업 대 기업으로 채우겠다고 말하면서 네이버에 기업과 대학을 검색했다. 일일이 찾은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서 찾아뵌 결과 나는 90% 이상의 승률로 혁신적인 매출을 기록하게 된다.


취업 캠프 하나가 1천만 원 정도 견적이기 때문에 결국 같은 공을 들여도 더 큰 수익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경비를 제외하면 절반 정도이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의 새로운 수익원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생각한다.


나는 이때까지 3~4시간 정도 잠을 자며 성과를 만들었다.


그래서 A기업의 경우 매년 1만 명 지원해서 1~2명 뽑는 채용에 2년 연속 입사를 시켰고, 대학교 취업 컨설팅을 가면 학생들이 너무 몰려서 MBC에서 취재도 올 정도였다. 월급은 80만 원에서 시작해서 100만 원 초반을 넘기지 않았지만, 나는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렇게 아카데미 대표님 덕분에 내 안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시도를 하는 것은 좋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월급을 주는 것에 조금 인색하셨다.


원래 영업직들의 경우 나와 같은 매출을 올리면 500~600만 원은 기본이었는데 나는 1/3에 해당하는 급여만 받았기 때문이다. 또 영업을 위해 중고 자동차를 사서 km당 주유비를 받았는데, 나중에 정산해 보니 운행하면 할수록 내가 손해가 나는 구조였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급여가 적어서 퇴사한다는 말에 스스로 내 성과급을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이상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만큼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점점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을 하면서 늘 갈증이 생겼다. 첫 만남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내 가치를 인정해 주었지만, ‘첫 만남부터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건강보험공단 CS강사 면접을 보고 입사를 하게 된다. 원래는 1명을 뽑으려는 계획이었는데, 목소리가 크고 카리스마 있는 시연강의로 추가 채용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 다시 시작해 보자.

나는 잘할 수 있다.

하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사촌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 주변에서 네가 가장 존경스러워. 진심이야.그런데 너를 보면 마치 오늘 살고 끝낼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 인생은 마라톤이라 하잖아. 적당히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걱정돼. 원래 너는 공부하는 거 좋아하니까 내가 다시 한번 더 도와줄게. 공부해. 자꾸 전쟁터 나가는 장군처럼 힘들게 싸우지 말고, 공부 더 해서 진짜 원하는 일이 뭔지 한 번 생각해 봐.”


그러면서 두 번째로 나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늘 전화상으로 잘 지낸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지 않음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던 것이다.


그렇다.

사실은 너무 무섭다.

언제부턴가 무서워졌다.

숨을 죽이고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지만

숨이 차오르는 순간들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그래서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라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고 온몸은 늘 피곤에 찌들어 있는 나는, 강의 현장에선 정작 피에로가 되어 웃고 있다. 그리고 긍정을 말한다.


긍정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질문이 이어진다.


‘열심히’라는 것과 ‘불안’은 원래 같이 가는 걸까?

누구에게 이 마음을 열고 말해볼까?

혹시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럴 땐 정말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소망이 가득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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