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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벽은 사치

by 김제주

나는 원래 정리벽이 있는 사람이었다.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했고, 내 공간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물건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면서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통일된 디자인과 정리된 상태는 어느새 과거의 일이 되었고, 이제 집안 곳곳이 아기 용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끊임없이 변하는 중이다.



냉장고는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다. 매일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작은 손바닥 자국들이 냉장도 문 위를 뒤덮고 있다. 냉장고를 열고 닫을 때마다 그 손자국을 보면 내 마음속의 불편함도 함께 올라온다. 아기 손이 닿는 곳마다 손자국이 찍히고, 나는 그 자국을 지울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불편함과 싸워야 한다.



싱크대 하부장은 이미 아기의 아지트가 되어버렸다. 한때 조미료통들이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던 그곳은 이제 아기의 장난감과 다름없다. 하부장 문을 열면 조미료통들이 바닥으로 굴러다니고, 아기는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비밀 공간을 즐긴다. 처음엔 어지럽혀진 주방을 보며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한숨을 쉬고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내 공간이 아기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내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늘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기준은 사치가 되었다. 집안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나의 통제 범위를 넘어설 때마다, 나는 조금씩 포기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좌절한 건 아니다. 이제는 매일매일 조금씩 타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 완벽한 정리 대신 아이가 즐겁게 놀고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냉장고 문짝의 손자국도, 조미료통이 굴러다니는 주방도, 그저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는 자란다. 내가 원하던 깔끔한 공간은 여전히 멀어져 가고 있지만, 그 대신 아이가 조금씩 자라며 나도 함께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살림살이는 망가져도, 아이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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