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 깜찍한 부조리 37화 - 어린이날 선물
현수가 회사에서 밤늦게 귀가한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고 현관 바닥에 10여 켤레 넘는 신발이 3줄로 짝을 맞추어 정리되어 있다.
아이들의 작고 앙증맞은 신발은 앞쪽에 놓여있다. 그리고 염치없이 뭉툭하게 커 보이는 미라와 현수의 운동화가 뒤쪽 줄에 놓여있다.
현수는 신발을 벗으며 나름 정성스럽게 정리된 각양각색의 신발을 보며 웃는다. 그리고 미라와 아이들이 조곤조곤 속삭이는 안방 쪽을 쳐다본다.
불이 꺼진 안방은 문이 열려있고, 거실의 전등 불빛이 안방 입구 안쪽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안방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인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아빠 왔어.”
미라가 속삭이듯 인주에게 지시한다.
“그래, 아빠 신발도 정리해야지.”
인주는 임무에 충실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알았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복을 입은 인주가 안방에서 나온다.
평소 같으면 퇴근한 현수에게 반갑게 인사해야 할 녀석이지만 오늘따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런 인주를 보며 현수가 먼저 말을 건넨다.
“인주 아직 안 잤어?”
인주는 현수가 건네는 말을 무시하며 곧장 현관으로 다가온다. 현수의 구두를 잡고 현관 바닥에 놓인 다른 신발들과 줄을 맞추어 정리한다.
“아이참, 신발 정리가 얼마나 힘든데….”
신발을 정리하면서 의젓하게 잔소리하는 인주. 현수가 그런 인주를 바라보며 웃는다.
“이 신발 다 인주가 정리한 거야?”
“응.”
무슨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거만하게 대답하며 쪼그려 앉아 신발을 다시 정리하는 인주.
불이 꺼진 안방에서 미라와 혜진이 토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소라게~”
“엄마가 안 된다고 하잖아.”
“우리 친구들도 샀단 말이야.”
혜진의 투정에 미라가 매정하게 말한다.
“친구 샀다고 너도 사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
“엄마~.”
“...”
미라가 혜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혜진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아빠에게 사달라고 할 거야!”
신발 정리를 마친 인주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옷을 입은 혜진이 안방에서 나온다.
역시 이 녀석도 현수에게 인사하기보다는 조르기로 현수와의 대화를 시작한다.
“아빠, 소라게 사줘.”
혜진의 뜬금없는 요구에 현수는 혜진을 쳐다보며 말한다.
“소라개? 개를 사다 달라고?”
혜진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한다.
“멍멍 짖는 개 말고 소.라.게!”
현수는 대충 이해한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척 딴전을 피운다.
“그러면 그 소라개는 어떻게 짖어.”
혜진은 이런 고단수의 현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설명한다.
“소라 껍데기 속에 사는 바닷게가 있어, 그게 소라게야.”
현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말한다.
“아, 그 소라게~.”
혜진은 친절한 목소리로 소라게 살 수 있는 곳까지 현수에게 알려준다.
“응, 우리 동네 가게에서 팔아.”
“하 참, 가게에서 별것을 다 파네.”
혜진은 현수의 눈을 애절하게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한다.
“아빠, 응?”
그러나 현수는 혜진의 간곡한 요청을 미라에게로 다시 떠넘긴다.
“글쎄, 그것은 엄마가 사다 줘야 하는 것 같은데.”
혜진은 자기 어깨를 흔들며 현수를 조른다.
“아, 아빠~”
현수는 도망가듯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에 혼자 남게 된 혜진은 입을 쭉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안방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간다.
학교에서 돌아온 인주가 가정통신문을 미라에게 내민다.
“엄마, 선생님이 준비물 가져오라고 했어.”
미라는 가정통신문을 읽는다.
“색종이, 딱풀, 공작가위, 음…. 집에 색종이가 없네.”
인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엄마, 색종이 사러 가야 해.”
미라가 혜진을 보며 말한다.
“혜진아, 한주 좀 보고 있어, 엄마 색종이 사러 갔다 올게.”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혜진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엄마, 나도 가.”
“엄마 빨리 갔다 올게, 한주랑 집에 있어.”
그리고 막무가내 한주도 나선다.
“엄마 나도 갈래.”
미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들에게 다짐받듯이 말한다.
“엄마가 너희들 데려가는 대신 가게에서 뭐 사다 달라고 하면 안 돼.”
그러나 한주는 미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현관 쪽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있다.
미라와 아이들이 엘리베이터 입구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미라는 다시 한번 다짐받듯이 아이들에게 말한다.
“가게에서 뭘 사다 달라고 하면 엄마는 그냥 올 거야.”
인주가 자기 물건 사러 간다는 것을 기세등등하게 말한다.
“엄마, 색종이만 살 거지, 그지~”
혜진이 신경질적으로 인주를 쏘아붙인다.
“아, 알았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주가 생글거리며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다.
미라와 아이들이 문방구로 들어선다. 아이들이 다른 물건을 고르기 전에 미라가 선수를 치듯 가게 주인에게 묻는다.
“학교 준비물인데 색종이 있어요?”
“아, 카네이션 만드는 색종이 말이죠?”
“학생들이 많이 사 가나 봐요?”
미라의 말에 가게 주인이 웃으며 말한다.
“얼마 안 있어서 어버이날이잖아요.”
미라가 색종이 사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아, 예.”
문방구 주인이 색종이를 건넨다. 그때 혜진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소리친다.
“어, 소라게다!”
혜진은 소라게 채집통이 놓인 곳으로 가자 인주와 한주도 그곳으로 따라간다.
“와, 소라게다!”
아이들은 소라게를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진 작은 소라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소라게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한껏 발동시킨다.
미라는 짐짓 관심 없는 척하며 가게 주인에게 돈을 건네고 아이들을 재촉한다.
“자, 가자.”
한주가 소라게가 신기한 듯이 소리친다.
“엄마, 이거 소라게야!”
미라가 관심 없는 듯 대답한다.
“그래, 알았어, 이제 가자.”
혜진이 미라에게 애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요구한다.
“엄마, 소라게 사줘.”
“안 돼!”
미라는 강한 한마디로 거절한다. 어른들 장삿속에 작은 생물까지도 장난감으로 변한 것을 못마땅한 미라, 더군다나 그 작은 생물에 상품성을 더하기 위해 알룩달룩하게 색깔까지 입혀져 있다. 그러나 문방구 주인이 그 틈을 비집고 들며 장사 수완을 발휘한다.
“소라게가 요즘 어린이날 선물로 많이 나가요.”
문방구 주인의 암묵적인 도움, 혜진은 잽싸게 그 도움을 잡아챈다.
“엄마, 어린이날 선물로 소라게 사다 주면 안 돼?”
“어린이날 선물?”
어린이날 선물이라는 말에 흔들리는 듯한 미라, 그러나 미라의 결정은 냉정하고 단호하다.
“어린이날 선물로 소라게는 아니야, 소라게가 불쌍하잖아.”
이런 상황에서 무식한 한주가 소라게의 용도를 묻는다.
“엄마, 이거 먹을 수 있어?”
“못 먹어.”
혜진이 미라를 쳐다보며 발을 동동거리며 말한다.
“아, 엄마 사 줘~.”
미라는 혜진의 절실한 눈빛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린다.
“그 대신 어린이날 다른 것은 안 사다 주기다.”
“응.”
미라는 할 수 없이 소라게를 사게 된다. 기뻐하는 아이들.
혜진은 소라게 채집통을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간다. 그리고 엄숙하게 뒤따르는 인주와 한주.
거실 책상 위에 놓여진 소라게 채집통, 아이들이 그 주위에 모여서 경애하는 눈빛으로 소라게를 응시하고 있다. 소라게 채집통 옆에는 소라게에게 진상할 상추와 감자튀김 그리고 손가락만 한 장난감 자동차가 놓여있다.
혜진이 상추를 조금 잘라 소라게 채집통으로 집어넣는다.
“소라게야, 상추 먹어, 상추.”
혜진의 양쪽에 서 있는 인주와 한주도 소라게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소라게야, 먹어.”
“감자튀김도 좀 먹어 봐.”
소라게를 향한 아이들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퇴근한 현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혜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현수에게 소라게를 자랑한다.
“아빠, 소라게 샀어.”
“결국 소라게를 샀어?”
그렇게 말하는 현수에게 혜진이 뻐기듯 말한다.
“응, 엄마가 어린이날 선물로 사줬어.”
현수는 생각 없이 한마디를 툭 던진다.
“집에서는 소라게가 오래 못 살 텐데….”
한주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현수의 말에 강하게 반대한다.
“아니야, 오래 살 수 있어!”
“그런가?”
한주에게 밀린 현수가 책상 위에 놓인 소라게 채집통을 보며 말한다.
“소라게는 시원하고 조용한 곳을 좋아해.”
혜진이 진지하게 묻는다.
“그러면 어디서 키워.”
“베란다는 햇볕 때문에 안되고, 화장실은 어때?”
“소라게가 화장실에 혼자 있으면 무서워.”
한주의 말을 듣는 현수. 소라게가 무서워한다는 것인지 한주가 무섭다는 것인지 현수는 헷갈린다. 그래서 소라게 놓아둘 다른 곳을 말한다.
“화장실이 아니면. 현관 신발장 위는 어때?”
“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혜진이 현수의 말에 호응한다. 현수는 자신의 제안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책상 위에 놓인 감자튀김으로 손이 간다. 그러나 혜진은 감자튀김을 집으려는 현수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친다.
“아빠 안 돼, 이거 소라게가 먹을 거야.”
“아빠도 좀 먹으면 안 돼?”
혜진은 현수를 향해 곁눈질하며 감자튀김을 숨긴다.
“안 돼!”
“소라게가 아빠보다 더 좋아?”
현수가 그렇게 말하며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이제 소라게에게도 지위가 밀리는 아빠, 현수.